281. 프렌치 스탠드오프.-1-
"잘 하고 있을까?"
모처럼 찾아온 주말. 방학식이 얼마 남지 않아 짐 정리가 한창인 기숙사를 떠나 시내로 놀러 온 나현주가 혼잣말처럼 흘린 질문에 다음 부를 노래를 고르던 양희연이 고개를 돌렸다.
"잘 해? 누가?"
"알면서."
"……난 또 누구라고."
이내 흥미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린 양희연이었으나, 노래방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앞서서 찬혁의 이야기를 꺼낸 게 그쪽이라는 걸 아는 나현주는 옅게 웃을 뿐이다.
그마저도 나현주를 잘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눈매를 살짝 찡그린 걸로만 보일 테지.
특유의 사백안과 어지간한 모델 뺨치는 키와 체형이 섞이면, 안 그래도 변화가 적어 거리감이 드는 인상이 순식간에 위압적인 느낌으로 변한다. 아마 바깥에서 지금 같은 얼굴로 다니다간 좀 치는 쎈언니 취급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나현주와 양희연, 단 두 사람밖에 없는 노래방 안.
적어도 요 2년 동안 룸메이트로 함께 붙어살다시피 한 양희연은 그런 나현주의 표정 변화를 왜곡 없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와 웃노? 뭐가 웃긴데?"
"아니. 아무것도 아냐."
"하이고, 실없다."
찡그린 얼굴로 핀잔을 주고는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양희연이었으나, 정작 리모컨을 누르는 손길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윽고 건조기에 넣은 석고처럼 손이 굳었다.
두 눈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작 초점이 맞지 않는다.
시야 안에 보이는 것에 관심이 없단 뜻이다.
그걸 눈치챈 나현주가 묘한 웃음기가 깃든 목소리로 양희연에게 물었다.
"걱정돼?"
"가, 가시나가 자꾸 뭐라카노! 나가 와?!"
강한 부정은 곧 강한 긍정이라고 하던가. 언젠가 책에서나 보았던 말을 실제로 보게 되니 괜히 웃음을 참기 힘들어진 나현주였다. 물론, 양희연은 더더욱 날뛰었고.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노래방 스피커에서 다음 손님을 위해 얼른 곡을 선택해달라는 재촉이 들려온 뒤에야 양희연은 간신히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금 리모컨을 잡았다.
그러나 그 손짓은 단순히 기기를 조작해 잡스런 소리가 들리지 않게끔 하는 것일 뿐, 정작 신경은 다른 곳에 쏠려 있단 걸 나현주는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몇 번이나 같은 페이지만 돌고 있는걸.'
나현주가 묘하게 흐뭇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양희연은 변명이라도 하는 것 마냥 황급히 말을 꺼냈다.
"금마 걱정해서 뭐 좋을 게 있다꼬. 가가 살짝 제정신이 아이긴 한데 어디 가가 지 앞가림도 못 할 놈은 아이다 안 카나."
"그렇지."
제정신이 아니란 말에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긍정하는 나현주의 모습을 보면 과연 찬혁이 무어라 했을까.
능력을 인정해줘서 고맙다? 내 머리가 뭐가 어떠냐고 그러느냐?
어느 쪽이든 말이 되는 것 같아 양희연은 피식 웃고는 이어서 말했다.
"뻔하지. 또 가가 혼자 지 잘났다 나대고 있을 기다."
무슨 돗자리라도 깐 사람처럼 훤히 보인다는 듯 단언하는 그녀의 말을 직접 들었다면, 아마 찬혁은 분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왜냐하면, 상황이 실제로 그러했으니까.
그것이 설령 본의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
다음 심사 과제가 발표된 직후, 참가자 일동의 눈빛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서로를 향한 경계심으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즉시 탈락이란 엄청난 패널티가 걸린 1대1 데스매치.
이번 심사에 걸린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진짜 쉴 틈을 안 주네.'
안 그래도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심사를 간신히 통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바로 이렇게 어깨가 무거워지는 심사라니.
부담이 원동력이니 뭐니 말했던 게 무색해지는 기분이다. 어? 사람이 어깨에 좀 적당히 뭐가 올라가 있어야지 너무 무겁게 지려다가 허리 나가고 무릎 나가고 사람이 죽는다.
무슨 골고다 언덕을 거슬러 올라 형장까지 십자가를 끌고 걷는 것도 아니고.
그쪽 이야기는 너무 자세히 파고들면 후환이 무서우니 이쯤 해두자. 어쨌든. 우리가 곤란하든 말든 심사위원단은 그저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심사를 진행할 속셈으로 보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정은 빠듯하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초침을 느리게 만들 수 없다면 사람이 빨리 움직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 올바름에 따라 심사단이 재빨리 행동을 개시했다. 언젠가 보았던 물건을 앞으로 꺼내오는 제작진. 2차 심사에서 팀을 나눌 때 사용했던 제비뽑기 상자다.
"지금부터 대진표를 짜도록 하겠습니다. 호명된 참가자는 대답해주세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김선옥 셰프가 상자 입구에 거침없이 손을 넣고는 휘젓기 시작한다.
수십 개의 플라스틱 공이 서로 부딪히며 거슬리는 소음을 만들었다. 어찌나 조용한지, 따로 마이크 같은 게 설치된 것도 아닌데 그 소리가 똑똑히 귀에 틀어박힐 정도다.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김선옥 셰프의 움직임에 맞춰 울리던 소리가 이윽고 뚝 멈추고, 상자 속으로 감춰졌던 손이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손에 함께 잡혀 나오는 플라스틱 공 하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기 적힌 건 누군가의 참가번호이리라.
그것이 공개되는 순간을 모두가 긴장감 어린 시선으로…… 보진 않는다. 애당초 40분의 1 확률인데. 보통 거기서 자기가 걸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긴장감보다는 호기심 어린 시선이 김선옥 셰프에게 집중되는 가운데, 공을 힐끗 살핀 그녀가 이윽고 숫자가 적힌 방향을 우리 쪽으로, 정확히는 카메라 쪽으로 향하며 외쳤다.
"39번!"
흐음. 첫 타자는 39번이구나. 누군진 몰라도 40명 중에 가장 먼저 뽑히다니, 어지간한 사람이다. 이건 운이 나쁘다고 봐야 하는 걸까. 아니면 좋다고 봐야 하는 걸까.
먼젓번 심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첫 타자가 된 건 불쌍하지만, 그래도 빨리 끝낸 뒤 조금이나마 더 길게 휴식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크게 나쁜 일도 아닐 것이다.
아니다. 이게 오늘의 마지막 심사가 될지도 모르는데,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끝난대 봤자 크게 이득은 없는 거 아닌가?
"39번!"
그나저나 39번은 누구길래 아직도 대답이 없는 거야? 앞에서 셰프가 부르는 소리가 안 들리나?
잠시 머리 위를 방황하던 정신줄을 붙잡고 고개를 든다.
그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외마디 탄성이 터져 나온 건.
"아."
고개를 들자 자연스레 마주치게 된 날 향한 수많은 시선.
그렇다. 난 그저 현실도피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39번. 어딘가 익숙한 그 번호는, 지금 당장 내 앞가슴에 달린 명찰에 적힌 숫자였으니까.
"실화냐……."
미치겠네 진짜.
***
사실, 찬혁이 첫 번째 제비로 지목된 것 자체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머피의 법칙이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결국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는 법이다.
40명의 참가자 중 하필 가장 높은 주목도를 구가하는 찬혁이 첫 번째로 뽑힌 것 또한 그저 그럴 수도 있던 일이 일어났을 뿐인 이야기다.
다만, 참가자들에게는 그런 이성적 사고를 유지할 여유가 단박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그렇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뽑혀 찬혁의 상대가 될 인물이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뜻이다.
여태껏 거친 두 번의 심사를 통해 찬혁을 향한 참가자 일동의 경계심은 말 그대로 극한까지 치달아 있었다.
살짝 오해가 겹친 평가이긴 하나, 찬혁은 1차 심가 때 최고점을 받은 전적이 있으며, 또한 2차 심사 때엔 그 누구보다 빠르게 합격 통지를 받은 팀의 일원이었다.
한 번은, 그래. 한 번은 우연이라고 치자.
하지만 그 우연이 두 번 반복되면, 그건 과연 우연일까?
우연이 세 번 반복 됐을 때엔 그것을 우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18살 어린애가 우연히 예선전 심사에 합격해서, 첫 번째 심사에서 우연히 최고점을 받고, 두 번째 심사에선 우연히 가장 빨리 합격한 팀에 소속된 걸까?
당연하게도 각 참가자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미 그들에게 있어서 찬혁은 그럴만한 능력을 충분히 갖춘 실력자이자, 어린 나이에 세계를 넘보는 천재였다.
천재의 등장은 세계를 요동치게 한다.
그러나 천재가 그 모습을 널리 드러낼 때엔, 필연적으로 그 발아래 쓰러져 천재를 드높여주기 위한 희생양이 되어 딛고 올라설 발판 역할을 맡은 누군가가 있다.
이를테면 제갈량과 주유처럼.
이를테면 파가니니와 리스트처럼.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자리에 모인 어느 누구도, 그 '누군가'가 되고 싶지 않았다.
바로 그렇기에 작금의 상황은 굉장히 이상한 구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름 여유와 호기심이 팽배하던 조리장의 분위기가 단숨에 살이 에일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오른다.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뽑기로 탈락자를 정하는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싸늘한 냉기가 두터운 목조 벽과 난방장치의 온기를 뚫고 참가자들의 전신을 휘감는다.
'절대 안 된다. 여기서 뽑히면 절대 안 돼……!'
'이건 이겨도 좋은 소린 못 들어…….'
'이겨봤자 크게 얻을 것도 없는데, 지면 왕창 잃는다!'
프로 셰프가 어린 학생과 겨루어 이기는 건 평범한 시청자에게는 당연한 일로 보이겠지.
반대로 진다면 그 실력으로 어떻게 프로 딱지를 달고 있냐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찬혁의 진짜 실력은 아직 미지수인 상황.
리스크가 이토록 큰데 리턴은 쥐꼬리만큼도 없는 자리에 서고픈 마음을 가진 참가자는 없었다.
특히 2차 심사에서 찬혁과 같이 심사를 치른 세 사람은 숫제 믿지도 않는 신까지 찾아가며 진심으로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리고픈 심정이었다.
'……아니, 다들 왜 저래?'
그 상황을 이해할 턱이 없는 찬혁은 그저 별 희한한 꼴 다 보겠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멀뚱히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엄청난 긴장감 속 좌중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드디어 김선옥이 다음 공을 빼내어 그들에게 펼쳐 보인다.
"13번!"
38명의 안도와, 1명의 무뚝뚝한 콧소리. 그리고…….
"저, 저요……?"
한 사람의 경악이. 고요 가운데에서 사이좋게 뒤섞였다.
너무 많은 수의 안도에 단수인 경악이 잠겨 사라질 무렵, 김선옥이 지체 없이 다음 공을 빼든다.
그러나 이번에는 뽑아든 상자가 다르다.
참가자의 참가번호로 가득하던 상자가 아닌 다른 상자.
그렇다면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1차전 메뉴를 발표하겠습니다!"
추측할 필요 또한 없었다. 어차피 곧 모두가 알게 될 테니까.
"첫 번째 경기. 대결 메뉴는…… 부야베스!"
다만, 그 정체를 모르는 편이 누군가에게는 행복했을지도 몰랐다.
"오."
"무, 무슨……?!"
주특기를 맞이한 젊은 요리사의 미소와, 반대로 상대의 주특기를 맞이한 연륜 있는 요리사의 경악이 몇 칸의 조리대 가운데에서 거칠게 맞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