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79화 (279/403)

279. 유유도생.-2-

화구 위 냄비 속에선 칠리소스가 끓고 있었다.

생토마토의 감칠맛과 풍미를 되도록 오래 잡아둘 수 있도록 아주 약한 불로 조금씩 졸아드는 칠리소스를 보고 차윤구는 기쁨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내 의도를 이만큼이나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차윤구는 꼭 따로 검색해본 적도 없는 개인적인 관심사가 갑자기 올튜브의 추천 영상으로 올라왔을 때가 생각났다.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하고 일단 보긴 하는데, 나중에 다시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지 않는가? '대체 어떻게 이렇게 날 속속들이 알고 있는가.' 하면서.

물론 세상에 이유가 없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은 법이니, AI나 알고리즘 같은 이런저런 복잡한 설명을 곁들이면 어떻게든 말이 되긴 한다.

같은 맥락으로 놓고 보기엔 수준 차이가 있는 사건이지만, 비슷한 일 정도는 일어날 수 있는 법이라고 자기세뇌를 거치니 얼추 납득은 할 수 있었다.

…… 납득을 했을 뿐이지,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일은 잘 풀렸어.'

가장 문제가 되리라 여겼던 초반부를 성공적으로 넘겼다. 이후는 눈덩이가 비탈을 구르며 덩치를 불리듯 요리를 차차 완성해나가면 된다.

김선엽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선엽이 준비한 메뉴는 해물겨자채. 전채로 내가기 위해 준비한 메뉴였다.

관자와 해삼, 살이 단단한 생선 몇 가지와 오징어, 문어, 전복 등을 아주 얇게 썰어서 살짝 데치는 등의 전처리를 거친 뒤 겨자 소스에 버무리면 끝나는 비교적 간단한 메뉴지만, 해산물을 다루는 만큼 마냥 간단한 메뉴도 아니다.

해물마다 각각 다루는 방법이 다르며, 어떤 것은 생으로 나가고, 또 어떤 것은 익히는 등 처리를 다르게 하되 식감은 통일성과 구별감을 동시에 갖출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어려운 과정이 눈앞에선 이미 반 이상 끝나 버린 이유는.

"어, 어……."

처음 차윤구의 요망을 정확히 맞춘 칠리소스를 봤을 때엔 감탄스러운 마음이 컸지만, 자신이 고른 메뉴인 해물겨자채를 이토록 완벽하게 밑 손질을 해놓았을 줄은 몰랐다.

새우는 데치는 데신 살짝 쪄서 깔끔하게 껍질을 벗긴 후 먹기 좋은 모양으로 썰어놓았고, 전복은 솔로 깔끔하게 세척한 뒤 탄력을 즐길 수 있되 질기는 느낌은 안 들 정도의 두께로 썰려 있다.

문어와 오징어는 어떤 처리를 한 것인지, 세밀하고도 균일한 칼집이 인상적이다. 데치는 작업만 잘 한다면 아주 예쁜 모양이 나오겠지.

"우렁각시라도 왔다갔나……."

그러고 보니 우렁과 소라는 친척이지 않나?

손질된 재료 사이에 섞인 소라를 발견한 김선엽이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만큼 당황스럽다는 뜻이었다.

"조, 좋은 게 좋은 거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일단 지금은 손을 움직이는 게 먼저다.

차윤구와 김선엽은 그렇게 되뇌며 잡생각을 끊고 몸을 움직이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점점 굳어가는 몸이 움직이지 않게 될 것 같았으니까.

***

심사가 진행됨에 따라 선행조와 후행조는 몇 번을 연달아 교체됐다.

그리고 순서가 자신들에게 돌아오면 돌아올수록, 차윤구와 김선엽의 얼굴에는 경탄 대신 경악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본래 이 심사는 후반부로 갈수록 선행과 후행의 어긋남이 점차 줄어드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 그게 정상인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긋남이 아예 사라질 수는 없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두 사람은, 자신들의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그 어긋남이라는 것이 아예 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치 자신의 분신이 자기 대신 요리를 하고 있었단 듯이.

자리로 돌아와 칼을 잡으면, 직전까지 이 자리에 서 있었던 게 꼭 자신인 것 마냥 일의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소름이 돋았다. 심사는 잘 풀리니 좋은 거 아니냐고?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으면 이 세상에 도플갱어 같은 괴담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샀을 리가 있나.

"야, 선엽아. 이거……."

"그…… 결국 이렇게 됐네요. 차 셰프."

이 심사의 제한시간은 90분이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90분을 채워야 하는 심사는 아니다.

90분이 되기 이전에 요리를 마무리할 수 있다면, 이론적으로는 일찍 심사를 마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론적'이란 말을 보면 알다시피,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그런데 지금 차윤구와 김선엽은, 그 '이론적'을 현실로 끄집어냈다.

그것도 후행조의 마지막 차례가 되기도 전인 고작 70분 만에, 그들은 메뉴를 제출했다.

"버, 벌써요?"

"예. 그렇게 됐네요, 이게."

제출을 하겠다는 말에 놀라는 스태프였으나, 정작 제출자인 차윤구와 김선엽도 이 사실이 믿기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아마 이 사람들은 이해 못 할 테지만 말이야.'

정작 차윤구 자신도 마찬가지지 않은가.

전복, 소라, 오징어, 문어, 새우, 관자를 비롯한 다양한 야채로 만들어진 해물겨자채.

칠리소스에 마라 소스에 들어가는 매운 향유香油를 넣고 끓여 다양한 향과 매콤한 맛을 추가한 칠리새우.

마지막으로 따끔한 매운맛을 가라앉혀주는 홍콩식 우유푸딩, 솽피나이까지.

물론 찬혁, 유동건, 차윤구, 김선엽 네 사람 중 누구든지 이 정도 메뉴는 얼마든 혼자서 만들 수 있었겠으나, 이번 심사는 오히려 다수이기에 더욱 힘든 메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 제출한 레시피와 거의 완벽하게 동일한 완성품이 나왔다.

불가능하리라 생각되던 과제를 가능케 한 통찰력과 임기응변, 그리고 본래의 솜씨.

자신이 그 팀의 인원이면서도 차윤구와 김선엽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앞으로 경쟁해야 할 상대란 말이지?'

얕볼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언더독일지도 모른다.

그들과 경력이 비슷하거나, 더욱 긴 유동건이라면 모를까 설마 18살 고등학생을 상대로 도전자의 자리에 선 기분을 맛볼 줄이야.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현실이었다.

제출할 접시를 서로 나누어 들고 심사단에게 향하며, 김선엽이 차윤구에게 말했다.

"여태껏 한두 번 실감한 게 아니긴 하지만, 정말 천재라는 건 있나 보네요."

"그래, 있지. 당장 우리 옆에도 말이야."

유동건, 차윤구, 김선엽, 그리고 류찬혁 팀.

2차 심사, 최단 기록으로 합격.

심사 전 꺼냈던 공약의 첫 단계를 성공적으로 밟고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

"아, 끝내셨다고요? 정말요?"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와중, 갑자기 나와 유동건 사장님만 나오라는 소리에 대기실을 나선 우리는 뜻밖의 소식에 작게 감탄했다.

조리장 쪽에서 차윤구 셰프와 김선엽 쿡이 아예 그쪽 차례에 심사를 끝내버렸다는 것이다.

'아니 뭐, 사실 예상하고 있긴 했지.'

대충 우리가 완성해놓은 것과 그 두 사람의 작업 속도를 역산해서 합치면 대략적인 소요 시간은 알 수 있다.

'그래도 꽤 빠르긴 하네.'

끝낼 때가 되었으니 빡세게 라스트 스퍼트를 돌린 걸까. 아무튼 대단한 사람들이다.

"완료자 대기실로 안내해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예."

스태프를 따라 이동한 곳은 조리장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던 넓은 방이었다. 조리장 쪽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대신 대기실 맞은편에선 온갖 기재를 옮기며 들락날락하는 스태프들이 많아 그쪽 소리가 시끄럽다.

'방 안이 왜 죄다 초록색이지? 저게 크로마킨가 뭔가 하는 그건가?'

새삼스럽게 촬영장에 왔다는 느낌이 들어서 신기한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다 대기실로 입장.

난로에서 피어오른 훈훈한 온기가 가득한 방 안에서 먼저 도착한 듯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찾았다.

난로 주변에 앉아 온기를 쬐던 김선엽 쿡이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반겼다.

"어, 왔구나! 고생 많았다. 유동건 셰프도 이쪽으로 오셔서 불 좀 쬐세요."

옛날에 설치된 기구를 그대로 이용 중인 건지, 굉장히 옛스런 느낌이 나는 연탄난로 위에 올라가 있던 주전자를 들더니 대기실 한쪽에 놓인 탁자에서 가져온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따라 넘기는 김선엽 쿡.

유동건 사장님에 이어 종이컵을 받아드니, 종이컵 안에는 다갈색 믹스커피가 담겨 있다.

단 커피는 그다지 취향이 아니긴 하지만 친절과 온기가 반가워 감사히 받았다.

"심사받으셨다면서요? 깜짝 놀랐어요. 되게 빠르게 끝내셨네요."

"사장님이랑 네가 잘 해준 덕분이지."

"에이, 우리가 뭘 했다고. 그쪽에서 단서를 잘 남겨줘서 그렇지. 찬혁이가 빨리 눈치챈 것도 있고."

"아니에요. 다들 잘 해주셔서 거의 얹혀간 건데요, 뭐."

서로에게 공을 돌리며 웃는 우리들. 특히나 입을 크게 찢고 있던 김선엽 쿡이 이어서 말했다.

"일단 결과는 당연히 합격이었고, 아마 점수도 높을 거야. 점수를 체크하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어차피 P 아니면 F 아니에요?"

"교양 과목 얘기 꺼내지 마라…… 요즘에야 간신히 학부생 시절 악몽을 안 꾸고 있는데."

"아하하……."

"충고하는데, 대학 갈 거면 교수가 시키는 건 공부랑 과제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마. 진심이다. 네 인생을 위한 아주 소중한 조언이야."

"알겠어요."

그래, 알지. 너무 잘 알아서 탈이지. 안 그래도 지금 학교에서도 비슷한 느낌이라.

회귀 전에는 돈 나올 구석이 없어서 그런 걸로라도 점수를 따며 장학금을 노려야 했지만, 지금은 딱히 그럴 필요도 없잖아. 그거 하나만큼은 정말 다행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이야기에 유동건 사장님과 차윤구 셰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사실, 저분들 고생에 비하면 그다지 대단한 고생은 아닌 일이겠지 싶긴 하다.

어쨌든, 일단 일이 잘 풀렸다는 건 확인했으니 됐다.

탈락할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테고, 최단기록이라면 분명 크게 눈에 띌 테니 서로의 얼굴을 알리기에도 좋은 기회겠지.

그리고 마침, 그 기회를 잡을 순간이 우리에게 찾아왔다.

"실례합니다. 참가자 분들, 저희가 합격자 인터뷰 시간을 가질 예정이었는데 여러분이 굉장히 일찍 끝나셔서 먼저 개인 인터뷰를 따려고 하거든요. 잠시 휴식하시다가 이따가 스태프 안내 따라서 메이크업 먼저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메이크업 완료되는 순으로 인터뷰 시작할게요."

"아, 네!"

인터뷰.

아까는 팀 전체가 같이 인터뷰를 찍긴 했지만, 개인 인터뷰는 또 처음이네.

'아, 그럼 아까 그 촬영 장비가…….'

어쩐지 맞은편이 분주하다 싶더라니, 우리가 너무 끝내서 그쪽 마감 일정이 당겨진 모양이다.

갑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진 처지가 된 그들에게 작은 미안함을 느꼈다.

잠시 후.

흐른 땀을 적당히 말리고 뜨거워진 몸을 식힌 우리는 하나둘 스태프가 준비한 메이크업 시트로 이동했다.

화장이라니, 태어나서 스킨, 로션에 더해 가끔 보습제 말고는 발라본 적 없는데. 아, 위장크림도 화장품인가? 아무튼.

우리에게 달라붙은 스타일리스트 일동 중, 날 담당하게 된 분이 호들갑을 떤다.

"어려서 그런가, 불에 그을린 거 빼면 피부도 깨끗하고 본판도 좋아서 별로 만질 것도 없네요! 인터뷰 룸에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있겠어요!"

아, 그거 감사합니다. 근데 입 근처를 그렇게 톡톡 두드리면서 말씀하시니 대답을 못 하겠네요.

"근데 인상이 너무 쎄서 아이라인은 최대한 적게 긋고 눈썹이랑 눈꼬리가 좀 아래로 쳐져 보이게 칠할게요. 아마 조금만 웃어도 활짝 웃는 걸로 보일 거예요!"

…… 욕인가?

욕은 아니지?

화장이란 건 정말 이해 못 할 세계라고,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지금 움직였다간 눈썹이 기러기가 될 판이었기에 속으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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