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토사구생.-4-
'이러면 나가린데.'
곤란하다. 진심으로 곤란하다.
팀을 나누어 교대로 조리에 임하게 만드는 분단 심사. 거기까지 예상한 건 좋다. 실제로 기본 골자는 같았으니 의미 없는 예측은 아니었다. 일단 일부는 맞았으니까.
하지만 그다음에 나온 내용이 곤란하다.
상의할 시간도 없이 팀이 고른 세 가지 메뉴를 최대한 원형을 유지한 채 만들라니.
'완전 망겜이잖아…….'
철정이 녀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충 그런 기분이었다.
당장 계란후라이 하나를 만들더라도 누군가 계란을 그냥 프라이팬에 깨놓고 그걸 그대로 남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마저 완성해달라고 떠안긴다면, 그게 어떤 요리가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계란후라이를 만들려 했던 것이 갑자기 스크램블 에그나 오믈렛으로 변해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
고작 계란을 익혀 먹는 요리 하나만 해도 그렇게 될 판국에 전채, 메인, 디저트 세 가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무슨 반평생 같이 손발을 맞춰온 막역지우라면 모를까 오늘 막 처음 만난 팀원끼리 무슨 수로 그런 곡예를 부리겠어.
눈앞까지 닥친 심사의 정체를 알게 된 여타 참가자도 대부분 나와 다를 게 없는 심정을 토로했으나, 말을 꺼내지 말라는 서슬 퍼런 경고에는 감히 맞서지 못했다.
모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상황. 김선옥 셰프는 어디선가 가져온 큼직한 박스를 이리저리 뒤적이시더니, 이윽고 그곳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뽑아든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인원은 대열을 이탈하여 제 뒤에서 다시 집합하세요."
과연, 저건 제비뽑기였구나. 쪽지에 적힌 번호가 불릴 때마다 참가자가 하나둘 그녀의 뒤에 선다.
아마 이 심사가 치러질 동안 지금 불려간 이들과 얼굴이나마 마주할 수 있는 건 지금뿐이겠지. 다른 세 사람도 생각은 같았는지, 우리는 누가 그러자고 말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서로를 바라봤다.
"……."
"……."
소리를 내선 안 되기에 대화는 나눌 수 없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에 담긴 표정은 같다.
결의와 응원.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팀원을 향해 나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할 수 없더라도 속내는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아마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까.
"19번 참가자. 앞으로 나오세요."
"27번 참가자. 앞으로 나오세요."
묵묵히 차례를 기다리던 그때, 드디어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는, 우리 중 일부였지만.
차윤구 셰프와 김선엽 쿡이 자리를 비웠다.
남은 건 나와 유동건 사장님 뿐.
살짝 불안함이 남은 시선으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유동건 사장님이었으나, 이윽고 고개를 이리저리 휘저으시곤 고개를 앞으로 향한다.
"잘 해보자."
"네."
찌릿. 정말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김선옥 셰프의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오는 게 느껴졌다. 조심하자, 조심. 팀이 나눠진 뒤여서 망정이지, 나눠지기 전이었다면 시선 대신 불호령이 떨어졌을지도.
"이상으로 팀 나누기를 마치겠습니다. 호명 받아 앞으로 나온 인원은 저와 함께 이동합니다. 다른 분들은 스태프를 따라 대기실로 이동해주세요."
오호라.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이제야 알았다.
과연 이쪽과 저쪽, 어느 쪽이 레시피를 만들어 제출하느냐. 요컨대 시작하는 팀이 누구냐는 것이 의문이었는데. 김선옥 셰프가 저쪽과 함께 이동한다면 답은 나온 거겠지.
'순서로 따지면 저쪽이 선, 우리가 후인가.'
90분의 조리시간을 10분씩 쪼개면 9번. 시작과 끝을 저쪽에서 담당하는 게 된다. 하긴, 원본 레시피에 최대한 가깝게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이면 그게 당연한가.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며 스태프를 따라 걷고 있자니, 어느새 우리가 다음 차례까지 기다리고 있을 대기실에 도착했다.
암막 커튼에 두꺼운 방음문. 그리고 환히 빛나는 14개의 모니터.
각각의 모니터는 서로 다른 조리대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구도로 비추고 있다.
적어도 요리하는 모습 정도는 볼 수 있게 해 주겠다 그건가. 그 와중에 음량은 전부 음소거인 점에서 쓸데없는 철저함을 느낀다. 진짜 제대로 고생 한 번 해보라는 제작진의 음습한 악의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예상은 했지만, 정말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
믿을 건 결국 나 자신과, 그리고 팀원들.
부디 그들이 잘 해주길 바라며, 나는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주시했다. 보고 짐작하는 것. 그게 내가 당장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십여 분의 시간이 흐른 뒤, 하나둘 조리장에 들어오는 참가자의 모습이 화면에 비친다.
2차 심사의 막이 올랐다.
***
'확실히, 요즘 애들이 영리한 구석이 있단 건 맞는 말이야.'
조리대 앞에 선 차윤구가 헛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읊조렸다.
그는 심사가 시작되기 전, 자유시간에 찬혁과 나눈 대화를 되새겼다.
"2차 심사는 팀전이잖아요? 제 예상이긴 한데, 아마 다른 팀과 1대1로 대결하는 구도는 안 나올 확률이 높아요."
"왜?"
"시간이 너무 부족하잖아요."
"하긴, 기껏해야 이틀밖에 없으니까."
"그럼 어떤 과제가 나올 것 같나요? 찬혁 학생."
"글쎄요…… 저도 짐작이지만, 아마 팀 전체가 대결하는 팀대항전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또…… 팀이 쪼개질 가능성도 있고요."
"팀을 만들어 놓고 굳이 쪼갠다고? 왜?"
"그거야 저도 모르죠. 제작진이 그걸로 뭘 평가할지도 모르겠고. 근데 일단 무슨 상황이 되든 대책 정도는 세워둘 수 있잖아요."
대책. 좋은 발상이었다.
앞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상 너무 구체적인 방안은 세워둘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만약 어떤 상황이 되면 이렇게 이야기해둔 대로 행동하자'쯤 되는 이야기는 미리 나누었다.
그리고 그런 대책 중 하나가, 바로 찬혁이 꺼낸 이 말이었다.
"저희, 배려는 하지 말죠."
"배려를 하지 말자니?"
"만약 여차할 상황이 되면 다른 팀원한테 맞춰준다고 굳이 잘 하는 걸 포기하진 말자고요."
여차할 때, 상의를 할 수 없을 때에는 가장 단순하게 하자.
본인의 특기를 최대한 살려서, 그대로 요리하는 거다.
예를 들어 차윤구 자신은 특기인 중식을, 김선엽은 한식을, 유동건이나 찬혁이라면 프렌치를.
옛날이라면 모를까 요즘의 요리사는 자기 분야만 잘 하는 걸로는 부족하다. 실제 업무로 끌고 오진 않더라도, 최소한 지식은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주특기가 아닌 분야여도 조력 정도라면 심사에서도 충분히 통하리라는 판단이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특기가 아닌 분야로 누군가의 특기에 조력해야 한다는 건, 조력을 하는 쪽에서도 힘들지만, 받는 쪽에서도 여러모로 진땀을 빼는 일이다.
아무리 달리기가 빠른 사람이어도 2인3각으로 달리는 건 어렵다.
빠르냐 느리냐의 문제가 아니라 달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니까.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극한의 2인3각이다. 눈과 귀를 막고 몸의 감각만으로 발목을 묶은 상대와 함께 앞으로 뛰어나가는 것.
얼마나 발을 뻗어야 할지, 팔은 얼마나 휘두를지, 직선으로 갈지, 옆으로 꺾을지.
무엇하나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앞을 더듬어가며 나아가는 기분이다.
그러나 찬혁은 말했다.
"그냥 온 힘을 다해서 뛰면 돼요. 애당초 서로 뛰는 속도가 비슷한 사람이면, 온 힘을 다해 뛰어도 큰 문제는 안 생기잖아요."
건방진 소리였다.
'당신의 전력질주는 나와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면전에 대고 말한 꼴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일까, 차윤구와 김선엽은 그런 찬혁의 건방짐이 그리 아니꼽게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건방지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찬혁의 그 말은 남을 낮잡아보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자신을 너무 치켜세우는 말처럼 들리지도 않았으니까.
그냥 있는 사실을 말한다는 듯 담담한 태도가 오히려 설득력을 갖춘 것처럼 느껴졌을 뿐.
그런 면모에 설득을 당한 탓일까.
너무 단순해서 대책이란 말을 붙이기조차 조심스러운 계획에 별 반론 없이 고개를 끄덕인 건.
그 당돌함을 떠올리곤 작게 웃음을 터트린 차윤구가 김선엽에게 말했다.
"선엽 씨, 전채를 좀 맡아줘. 메인은 내가 맞지."
"예, 셰프."
그들 사이에 명확히 나뉜 위계 같은 것은 없으나, 그래도 본래 쌓인 경력과 현재의 직위는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만큼 쌓인 경험과 솜씨가 있다는 뜻이니까.
그것을 충분히 이해한 김선엽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얌전히 차윤구의 제안에 따랐다.
결국 중요한 건 팀이 이기는 것이었으니까.
짧은 상의 시간도 이로써 종료.
조리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를 신호탄 삼아, 14팀의 경주가 시작된다.
***
찬혁이 숨소리마저 죽이며 모니터가 뚫어져라 시선을 향한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잡느라 작아진 화면 속에서 두 사람의 자그마한 행동 하나마저 놓치지 않기 위함이다.
다른 팀 중 몇몇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어떻게 일을 풀어나갈지를 상의하는 곳도 있었으나, 찬혁은 그마저도 필요 없다는 듯, 그저 현장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만을 최대한 눈에 담기 위해 애썼다.
마치 기계처럼 미동조차 없이, 조그만 감정의 변화도 보여주지 않고.
그러나 그런 찬혁의 모습에선 기계에게선 결코 나오지 않을, 귀기鬼氣와도 같은 무언가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어떻게 이런 어린아이에게서 저런 분위기가 느껴질 수 있는 것일까. 유동건이 내심 질색한 표정을 감출 정도로.
그런 찬혁이 간신히 몸을 움직인 건 대기실에 놓인 타이머의 남은 시간이 1분을 막 넘긴 뒤였다.
"후……."
마치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는 것마냥 길게 숨을 내뱉는 찬혁을 보며 유동건이 물었다.
"어떤 것 같아?"
"글쎄요. 아직 확신은 못 하겠지만, 저 두 사람, 아예 일을 나눠져서 하는 것 같아요."
"나눠져서?"
"예. 한 사람은 전채고, 한 사람은 메인. 그런 식으로요."
"하긴, 같이 하다 동선 꼬이면 그건 그것대로 알기 힘들지. 보자, 차 씨가 메인이고 김 군이 전채인가?"
"아마 그렇겠죠."
처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보다 팀을 대하는 말투가 한결 편해진 유동건의 물음에 찬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해야 재료 손질이나 간신히 마친 상황이긴 했지만, 그 정도만 되더라도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했으니까.
"나가기 전에 어떻게 할지 조금은 정해놔야지."
"예. 일단 현장을 직접 봐야 알겠지만, 제가 김선엽 쿡 자리를 맡아볼게요. 차윤구 셰프 자리 맡아주실 수 있으세요?"
"얼마든지. 너는? 할 수 있겠어?"
유동건의 걱정스런 물음에 찬혁이 웃었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 이래 봬도, 저희 학교에서 제일 잘 가르치는 수업이 한식이거든요."
뭣보다.
찬혁이 그렇게 뒷말을 덧붙인다.
"제 수상경력 중에 태반이 한식으로 딴 거니까, 믿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제일 잘 하는 건 프렌치라며 농담조로 말하는 찬혁을 보며, 유동구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