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토사구생.-1-
설거지와 기물 정리, 쓰레기 처리 따위를 비롯한 심사의 뒷마무리가 얼추 끝난 시점, 스태프 측에서 우리에게 전달사항을 전파했다.
"점심시간을 겸해서 세 시간가량 자유 시간을 드릴 예정입니다. 참가자 여러분께서는 시간을 활용하여 식사 및 팀 구성을 마쳐주시기 바랍니다. 식사는 현장 밥차를 이용하셔도 좋고, 인당 2만 원의 식대가 지원되오니 근처 식당을 이용하시고 영수증을 제출해주셔도 괜찮습니다. 혹시 직접 만들어 드실 분이 계신다면 식자재 창고의 재료를 사용해주세요. 다만 사용하실 때엔 담당 스태프에게 자재 반출 확인 후 적당량만 사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기가 편한 방법으로 식사하란 배려는 고마웠다. 그 뒤에 덧붙은 말만 빼면.
"또한 촬영은 계속 진행될 예정입니다. 식사에 영향이 가지 않는 선에서 인터뷰 요청을 드릴 수도 있으니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들 싫은 기색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첨언에 거리낌을 느끼는 건 나밖에 없어 보였다. 애당초 다들 어떤 방식으로든 얼굴 팔리는 게 이득일 테니까.
나도 TV에 얼굴 몇 번 더 비출 수 있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쪽이 팔리는 것도 상황 나름이잖아? 이건 딱 봐도 나한테 너무 관심이 쏠리는 형국이다.
'아, 역시. 저 봐 저 봐.'
식사, 팀 구성, 촬영, 인터뷰 같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나를 힐끔대는 시선이 늘어난다.
"하아……."
이거, 밥이나 제대로 먹을 수 있을까 모르겠네.
***
밥차, 외식, 아니면 직접 만들어 먹기.
세 가지 선택지 중 내가 고른 건 첫 번째였다.
외식을 하기에는 차가 없다. 애당초 이 풍운정 자체가 제법 외진 곳에 있기 때문에 자차가 없이는 외식을 하기 힘든 구조다. 그렇다고 배달을 시키기도 애매한 노릇이고. 식대가 지원된다곤 하지만 굳이 시켜서 먹고 싶을 만큼 끌리는 게 없기도 했고.
만들어 먹기? 배달도 귀찮아서 안 시키는 와중에 잘도 만들 생각이 들겠다. 누누이 말한 건데, 난 기본적으로 요리사가 직접 만든 음식을 먹을 때는 간 볼 때나 레시피 개발 때만 해도 충분하다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농담이 아니라 연회 주방 시절에는 음식 간만 봐도 하루 권장 칼로리 같은 건 가뿐하게 넘긴 적이 수두룩하고.
뭐, 아무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밥차만큼 편하고, 적당한 선택지가 없었다는 뜻이다.
"여기 있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이 추운 날, 그것도 주말에 컨테이너 차량을 직접 끌고 출근하신 출장 단체급식 회사 사장님의 덕담을 들으며 식판을 받았다. 그나저나 풍운정은 신기한 곳이구나. 급식실까지 따로 있을 줄이야.
한때는 정말 근방 주민들이 학교로 이용한 적도 있는 건물이라니까 그런가보다 싶긴 하지만.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앉은 자리를 피해 조금 구석진 자리에 식판을 놓고 앉았다.
'뭔가 끼어들기 힘든 분위기네.'
나만 붕 뜬 느낌이라고 할까?
스태프는 스태프대로 모여 먹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요리사들은 또 요상하게 서로 친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분명 전국에서 모인 거 아닌가. 여기 올 정도 실력이 되면 이래저래 안면을 통하게 된다는 걸지도 모른다.
꼭 외국 요리학교에 다닐 시절이 떠오르게 만드는 상황 속에서 혼자 얌전히 밥을 집어먹고 있자니 한 칸 옆자리에서 떠드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 애들이 몇 명 안 보인다? 카메라 로테이션 돌리는 애들 말고 자리에 없는 애들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아, 걔네 인터뷰 따러 갔어."
"인터뷰? 이제 막 점심시간 시작했는데? 밥 먹고 있는 거 아냐?"
"직접 만들어서 먹는 참가자 몇 분 계시잖아. 심사하는 것도 아니니까 요리하는 동안 간단한 인터뷰 정도는 딸 수 있을 거라고 하던데."
"그래? 하긴 요리하면서 인터뷰하는 장면이면 때깔 나쁘지 않게 나오겠다. 좀 쿡방 느낌 인터뷰도 될 것 같고."
"인터뷰용으로 따로 방 몇 개 빼서 크로마키 쳐놨는데. 거기서 촬영한 거랑 느낌 확 다를 것 같아. 아, 근데 편집 빡세겠다……."
오호라. 그런 거구만.
솔직히 식대도 지원해줘, 밥차도 쓸 수 있는 상황에 굳이 직접 밥을 만들어 먹는 사람이 왜 나오는 건가 싶었는데, 따로 인터뷰를 먼저 찍을 정도면 그 정도 수고는 얼마든 무릅쓸 사람도 있겠지.
물론 나야 해당사항이 아니다. 왜냐고? 뭐, 아마 이유는 조만간 알게 되지 않을까.
"잠깐 실례. 여기 빈자리 맞지?"
"옆에 자리 비었나요?"
"자리가 없어서 그런데, 합석 좀 하겠습니다."
거 봐라.
내가 미처 긍정이든 부정이든 어떠한 답변을 하기도 전에 미리 의자부터 빼는 사람들. 하기야 뭐 내가 그 자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긴 하다.
분명 나는 사람을 피해서 빈자리에 앉았다지만 빈자리는 여기 말고도 제법 많다. 그런데 빈자리를 찾아다니던 사람이 굳이 내 옆자리에 엉덩일 붙인다?
'속내가 좀 너무 뻔한 거 아닌가…….'
그래 뭐, 팀원을 구하고 싶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다만 밥 먹을 때만큼은 얌전히, 그리고 조용히 먹고 싶을 뿐이다.
형식상으로라도 나아 보이기 위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시라고 답한 뒤, 그다음부턴 말도 없이 식판에 고개를 박았다.
밥은 출장 밥차인 걸 감안하지 않더라도 제법 괜찮다고 느낄 만큼 맛이 좋았다. 양도 많고, 메뉴도 다양하고. 후식용 과자와 뜨거운 캔커피도 제법 센스가 좋다.
'아, 근데 에스프레소가 없네.'
이 부분은 아쉽다. 아무튼, 학교 급식만큼은 아니어도 아주 괜찮은 식사에 만족하며 식사에 열중할 무렵, 자리에 합석한 참가자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밥 먹고 팀까지 짜야 된다고 그랬죠?"
"아, 예. 그러니까……."
"곽영우라고 합니다. 세종 쪽에서 가게 하나 운영 중이죠."
"곽 셰프는 사정 좀 어떠십니까? 팀 짤 참가자 있으신가요?"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처럼 친한 셰프가 없다 보니 영 시원찮네요. 박 셰프는요?"
"저도 비슷합니다."
왜 하필 내 옆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거냐.
'아니, 그것보다 티 너무 나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게 완전 국어책 읽기인 건 그렇다 쳐도, 한 사람은 이름을 모르는 척했으면서 왜 다른 한쪽은 이름을 알고 있는 건데.
딱 봐도 각이 나온다. 지금 이 테이블에 합석한 사람은 날 빼고 셋.
서로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동시에 올 수가 있겠는가? 미리 자기네끼리 말을 맞춰두고 내 옆에 앉은 거겠지.
아마 다음 레퍼토리도 뻔하다.
다들 팀 구하는 게 어려운 것 같네요. 학생도 그렇죠? 저희 이렇게 같이 식사한 것도 인연인데 저희끼리 팀을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와! 그거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퍽도 좋은 생각이겠다.
"다들 팀 구하시느라 고생하시네요. 학생은 어때요?"
얼씨구 세상에. 그래, 토씨 정도는 바꾸고 들이대서 아주 감사합니다.
그래 뭐, 너무 티나서 웃음이 나오는 꼬드김이긴 해도 마냥 나쁘게 받아들일 건 없다고 생각하긴 한다.
팀 구하는 게 힘든 일인 건 사실이고, 편하게 아무 팀에나 소속되어 가는 것도 방법이지.
'근데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
당장 어떤 심사가 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1개 이상의 팀, 최소 4명 이상이 탈락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막무가내로 아무 팀에나 들어가는 건 하책이다.
그래, 김선옥 셰프 식 산출법으로 계산해서, 내가 3점 분량을 할 수 있다고 쳐도 다른 팀원이 전부 1점 수준이면 해봐야 6점.
2점 분량을 할 수 있는 사람 네 명이 모인 팀에게는 질 수도 있다는 거다.
뭐, 요리라는 게 이런 산술적인 계산이 항상 맞는 분야는 아니라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어느 정도는 맞을 수도 있다는 거 아닌가.
그래, 맞다. 이 사람들 이름은 잘 모르고 있지만 얼굴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거든.
김선옥 셰프가 드물게 한 입 먹고 인상을 찡그린 사람들.
고객 얼굴 기억하는 게 소양인 직업을 했으니 틀림없다.
아마 자기네도 그 탓에 서로를 기억하고 끼리끼리 뭉친 거 아닐까? 어차피 기다리고 있어봤자 가망이 없을 테니까, 그럴 바에 먼저 행동한 걸 수도.
'아무래도 상관없나.'
이 사람들 사정이나 내막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지금 문제는 괜히 이 양반들이 내게 말을 거느라 내 식사 시간이 불편해졌다는 것이다.
아예 무시하고 밥이나 먹자니 카메라 돌아가는 곳에선 너무 눈치 보이는 짓이고.
작게 속으로 한숨을 토한 뒤, 나는 수저를 놓고는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감사히 먹었습니다. 먼저 일어나볼게요."
"어어, 벌써 가게요? 식사 덜 한 거 아니었어요?"
"아뇨. 심사 중에 너무 긴장해서 그런가 식욕이 별로 안 나네요. 이만 먹으려고요. 셰프님들도 식사 맛있게 하세요."
"아, 네……."
대어를 놓친 낚시꾼 같은 표정을 지은 그들이 날 배웅한다. 근데 어쩌나. 대어는 처음부터 낚싯바늘을 문 적이 없는데.
저들이 안타까운 만큼 나도 안타깝다. 주로 이 맛있는 식사를 잔반으로 버려야 한다는 점에서.
이런 사건은 한 차례로 끝나지 않았다.
밥을 먹다 말아서 살짝 출출한 겸, 하는 수 없이 직접 뭐라도 만들어 먹을까 싶어 간단히 파스타를 삶고 있을 때에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주방까지 찾아온 사람도 있었고, 그걸 식사 후에 보자고 하니 그다음에는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이상의 사건을 보고 잘 알았으리라 생각하지만, 내가 딱히 얼굴 비추는 데에 욕심을 안 부린 이유가 있다.
다만, 문제는 이거다.
나와 팀이 되지 않겠냐며 접근하는 양반들은 여럿 있었지만, 그중에 내가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참가자는 없었다.
대충 말하자면 내가 일종의 양날의 검이 된 탓이다.
내가 팀에 소속되면 다음 심사에 큰 도움이 되리란 건 분명하다.
그러나 당장 다음 심사가 끝난 뒤에는?
당장은 팀이 되더라도, 결국 우리 56명의 참가자는 한정된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경쟁자다. 조금 더 시야를 넓게 본다면, 여기서 무조건 잘 하는 사람을 팀으로 데리고 가는 게 최선책은 아니다.
비슷한 수준의 참가자와 팀을 짜더라도 다음 심사 정도는 무난하다는 판단이 든다면, 결국 난 계륵이 된다.
사냥을 끝내고 개를 삶을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이 과연 너무 세서 당해낼 수 없을 만한 개를 사냥에 쓸까? 내 생각은…… 글쎄. 지금 상황으로 얼추 대답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그런 개를 쓰는 사람은 제 힘으로 사냥감을 잡을 자신이 없어서 개에게 의존해서라도 사냥감을 잡고 싶은 사람밖에 없겠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개 또한 제 배는 두둑하게 불려줄 수 있을 법한 주인을 고르고픈 법이다.
내 앞에는 크게 두 갈래의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그냥 적당히 날 꼬드기는 팀에 들어가 불안한 상황에도 최대한 능력을 살리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이쪽은 그다지 끌리는 선택지가 아니다. 당장 다음에 어떤 과제로 심사를 볼지도 모르는 노릇이지 않은가.
팀 대항전을 해서 팀 멤버의 승수로 합격, 탈락을 정하는 심사라도 나오는 경우엔 예선전 겉만 핥고 나가리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미 저들끼리 잘 뭉친 팀한테 '나 여기 들어갈 테니 한 자리 비워두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남은 선택지는, 바로 이거다.
"스카우트나 해볼까."
팀이 되면 방송 출연 100% 약속드립니다. 같은 프레이즈라도 달면 안 넘어올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치?
저 옛날 아무것도 모르는 호텔 신입을 연회주방이라는 지옥의 모래 늪으로 밀어 넣던 실력을 발휘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