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프라이드 혁명.-1-
사람이 장소에 모이기만 했다고 바로 녹화를 시작할 수도 없는 일.
명찰을 받은 뒤에도 나와 여타 참가자들은 이것저것 잡다한 준비를 마저 마무리해야 했다.
본인이 챙겨온 조리복이나 안전화 같은 준비물이 규정에 어긋나지 않았는지, 지참한 조리도구 중 과하게 위험한 물건은 없는지.
번잡하고 까다로운 과정이지만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말이 고풍스러운 건물이지, 다르게 말하면 오래된 건물이니 불의의 사고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사설 소방차나 구급차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다지만 사고가 생기고 대처하는 것보다 생기지 않게끔 대처하는 게 가장 올바른 방법이지 않은가.
"아니, 이게 왜 안 된다는 건데요!"
"저기, 그…… 저희가 방송에 상품 로고가 그대로 들어가면 곤란하거든요. 이대로 출연하시면 후편집으로 가릴 때 너무 수고가 많이 들고, 참가자님 분량도 줄어들 수가 있으니 협조 부탁드릴게요. 상표만 여기 스티커 중에 맞는 색상 고르셔서 붙여주시기만 하면 그대로 입으셔도 돼요."
"부, 분량이 줄어요?…… 알겠습니다."
…… 뭐, 잡음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지만.
모든 검사가 끝난 뒤에야 간신히 개인적인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옷을 조리복으로 갈아입고, 조리도구가 담긴 가방을 챙겨 드디어 조리장에 입장.
"후우……."
나보다 먼저 들어온 참가자, 늦게 들어온 참가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인 국내 최고의 기재들.
형형하게 날 선 분위기가 모공 하나하나를 전부 쑤시듯 찔러온다.
'긴장감이 장난 아닌데.'
하긴, 이곳은 사람 한 명의 운명을 바꾸기엔 충분한 자리다.
누구나 체감하고 있겠지, 이곳이 바로 인생의 갈림길이라는 걸.
여기서 어떤 결과를 내놓느냐에 따라, 그리고 그걸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천차만별로 바뀔 것을 뻔히 아는데 긴장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나 또한 그렇다.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은 긴장감에 발끝에서부터 개미 떼가 기어 올라오는 것처럼 소름이 돋는다.
회귀한 뒤로 수없이 갈림길을 지나왔지만, 이만큼 긴장된 건 처음이다.
"후……."
그래도, 그 경험이 허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발은 멀쩡히 내디딜 수 있고, 손가락은 평소처럼 매끄럽게 움직인다.
'할 수 있다.'
그래. 할 수 있다.
마음의 각오는 됐다. 그렇다면 이젠 오로지 행동으로 보일 뿐이다.
***
"예선전을 시작하겠습니다."
풍운정에 세워진 가설 조리장. 모든 준비를 끝마친 참가자들을 앞에서 심사단이 외쳤다.
압도적일 정도의 고요함. 장대 높이 걸린 외줄 위를 걷는 것 같은 긴장감이 조리장에 감도는 가운데, 심사단이 뒤이어 과제를 발표했다.
"1차 심사 과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선 것은, 이번 예선전 심사위원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이자, 한국 요리계의 거장 중 한 사람.
'…… 나온다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김선옥 셰프. 70세를 넘는 나이에도 현역을 유지하고 있는 여걸이자, 한국의 1세대 프렌치 셰프.
6.25 때 프랑스로 입양되어 성장하며 본토에서 요리를 공부하고, 본인의 레스토랑까지 열어 2000년도에 조국으로 돌아오며 문을 닫기 이전까지 미쉐리 3성을 10년이 넘도록 유지한 엄청난 업적을 가진 사람이다.
아시아인 여성이 홀로 유럽 본토에서 그토록 대성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잘 안다.
체력저하를 이유로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곤 하나, 예선이고 뭐고 본인이 직접 선수로 참여한다 해도 누구나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셰프.
'그런 사람이 심사위원이란 말이지…….'
어찌 보면 이것도 인연인가.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과거엔 성심고에서 교편을 잡았던 적도 있다고 들었다. 당장 담임인 박예휘 선생님이 그 제자였다던가. 스승에게 배워서 스승의 스승에게 심사를 맡는다니, 무슨 무협지도 아니고.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상황에 한숨을 짓던 그때, 김선옥 셰프가 첫 심사 과제를 발표했다.
"제한시간 한 시간 이내에 한 가지 메뉴를 만드세요. 어떤 것이든 됩니다."
첫 심사부터,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 나오긴 했지만.
"무엇이든 자유롭게 만들되, 제한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그 즉시 탈락입니다. 10분 후 조리를 시작합니다. 준비하세요."
…… 하, 시작부터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여태껏 쥐 죽은 듯 고요하던 조리장에 조금씩 웅성거림이 섞이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다. 심사 과제가 자유요리라니. 곤란할 만도 하지.
'어려운데.'
보통 '오늘 뭐 먹을래?'라고 물어봤을 때 가장 곤란한 대답은 비싼 걸 먹고 싶다거나, 평소 먹기 힘든 걸 먹고 싶다는 것이 아니다. 가장 곤란한 건 바로 '아무거나'라는 대답.
적어도 선택에 틀은 만들어주어야 뭘 골라도 고르지 않겠는가.
요리사도 마찬가지다. 식당에는 메뉴가 있고, 배고플 때엔 자기가 먹고 싶은 게 있다.
그러나 심사를 받을 때엔 그렇지 않다. 안 그래도 이 자리에 모인 참가자는 전원이 한 가닥 하는 요리사들. 만들 수 있는 요리는 수백 가지도 넘을 터.
그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건 적잖게 머리가 아픈 주문이다.
'그래도 아예 고를 게 없는 건 아니야.'
한 시간 이내에 요리를 완성하라. 이 점이 포인트다.
한 시간 안에 요리 하나를 만들라는 건 언뜻 보면 굉장히 널널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건 생각보다 굉장히 빡빡한 조건이다.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모를까, 준비가 아무것도 안 된 상태에서 요리를 만든다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와중에 제한시간이 한 시간이면…….
'만들 수 있는 게 많지 않은데.'
일단 당연하게도 양념에 먼저 재우는 요리는 불가능하다.
졸이거나 오븐에서 굽는 등의 익히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요리도 못 한다고 봐야겠지.
"이거……."
…… 대충 느낌이 온다.
이 심사. 주의해야 할 건 '얼마나 뛰어난 요리를 만드느냐'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가장 주목해야 하는 점은 다른 것이다.
'얼마나 욕심을 버리느냐. 그 선을 정하는 심사다.'
앞서 말했다시피, 힘겹게 이 자리에 선 이상 누구든 가장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간단하며 준비가 적은 대신 맛의 편차는 크지 않은 요리보다, 해야 할 일이 많고 시간과 공을 많이 들여야 하는 요리를 만들고 싶을 터.
심지어 이건 첫 심사다. 사람을 보는 데에 가장 많은 점수를 차지하는 게 첫인상이라는 말도 있다시피, 참가자는 대부분 이 첫 기회를 허투루 낭비할 생각이 없겠지.
제한시간 이내에 가능한 한 가장 뛰어난 요리를 만들고 싶다.
그러나 제한시간을 단 1초라도 넘기면 그 즉시 탈락한다.
어디까지 욕심을 챙기고, 어디서 욕심을 버릴 것이냐.
이건 요리 솜씨만이 아니라, 참가자의 판단력과 결단력까지 함께 시험하기 위한 테스트.
'그렇다면…….'
나는 바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과연 합리적인 선택은 무엇인가.
주목을 끌기 위한 가장 빨리 완성할 수 있는 요리? 기각이다. 요리에서 시간은 퀄리티로 직결된다. 시간이 적게 드는 요리는 결국 그 퀄리티에 한계가 있다.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퀄리티까지 챙길 수 있는 요리는 어떨까? 아니. 분명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이것도 별로야.'
합리적인 선택이기에 오히려 끌리지 않는다.
합리적이라는 건 다르게 말하자면 가장 특색 없는 선택지라는 뜻도 된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주목을 끌기가 어렵다.
어차피 첫 심사. 그것도 고작해야 한 시간밖에 쓰지 않는 심사라면 제한시간만 어기지 않는 이상 바로 탈락하진 않겠지.
그러나 무려 첫 심사인 거다. 첫인상은 수많은 것을 좌우할 수 있다. 여기서 확실하게 내 인상을 박아놓을 수 있다면,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건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 좋아."
설령, 그 선택에 높은 리스크가 수반된다고 하여도.
결정했다. 내가 뭘 만들지.
만드는 데에 굉장히 많은 시간과 수고가 필요한 요리.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온 힘을 쏟아도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를 메뉴. 그것도…….
"기왕 하기로 한 거, 할 때 제대로 해야지."
저 심사위원 중, 가장 잘나신 분을 저격하기 위한 메뉴를.
프렌치로 간다.
한국 최고의 프렌치 셰프에게, 내 한평생보다 긴 세월을 프렌치에 매진한 김선옥 셰프에게, 류찬혁의 프렌치는 과연 얼마나 먹힐 것인가.
다른 참가자가 뿜어내는 날 선 기세에도 미동조차 않던 손이, 지금은 작게 떨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양쪽 입가는,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제 몸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시간이 됐습니다. 참가자 여러분. 더 이상 안내해드릴 말은 없습니다. 지금부터, 조리를 시작하세요!"
김선옥 셰프가, 드디어 이 대난투의 공을 울렸다.
***
드디어 예선전 첫 심사의 막이 올랐다.
아무리 넓은 건물이라고 한들 쉰에 달하는 인원이 동시에 움직이면 난잡해 보일 수밖에 없는 법.
한창 시험을 앞은 고시생이 가득한 도서실처럼 적막하던 조리장이 순식간에 도떼기시장 저리가라 할 정도로 시끄럽게 변화한다.
재료와 기물을 챙기기 위해 꽁지 빠지게 뛰는 참가자들의 달음박질 소리.
조리기구가 부딪히며 나는 쇳소리와, 가끔 몇몇 참가자가 저도 모르게 떨어트린 접시 따위가 깨지는 소리도 섞인다.
도대체 뭐가 뭔지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로 번잡한 광경이었으나, 그런 와중에도 심사단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리는 있었다.
"벌써 자리로 돌아간 참가자가 있군요."
"보통 저런 건 두 가지 경우죠. 서두르겠답시고 당장 필요한 것들만 급하게 챙겨서 자리로 돌아온 거거나, 아니면 이미 머릿속으로 구상을 전부 끝내고 필요한 게 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것이거나."
나이를 먹으며 조금 줄어들긴 했으나, 여전히 십 년은 젊어 보일 정도로 건장한 체구를 가진 김선옥의 말에 심사단이 귀를 기울인다.
70세가 넘는 나이임에도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그녀를 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름이 잡힌 얼굴, 하얗게 센 머리.
그러나 그 눈은 평범한 늙은이의 눈이 아니다.
한 무리의 왕좌를 차지하여 여전히 그 위에서 군림하는, 늙었으나 지혜를 갖춘 맹수의 눈빛이다.
자신에게 향하는 것도 아닌데 절로 오금이 저리게 만드는 눈빛에 다른 심사단이 황급히 말을 이으며 화제를 돌렸다.
"확실히, 앞서 자리로 돌아온 참가자는 분명 앞서 본 명단에서 주목을 받은 셰프들이군요."
"청담동 아리의 셰프인 이명건 셰프, 부산 호텔 고져스의 김동래 셰프도 있어요."
"확실히, 참가 신청서를 내기 전부터 이미 유명세를 가진 셰프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그런데…… 저기 저 참가자는 누구죠?"
한 사람의 질문에 심사단의 시선이 돌아간다. 물론 김선옥의 고개도 함께.
"상당히 젊은…… 아니, 어린 참가자네요."
"그러고 보니 예선 참가자 중 미성년자가 한 사람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게 저……."
저토록 어린 나이에 이 자리에 섰다는 게 신기한 듯, 심사단은 저마다 찬혁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씩 꺼내 들었다.
세계적인 대회에서도 수상이력을 가진 신예라든가, 인터넷이나 방송 등지에서는 이미 높은 유명세를 구가하는 떠오르는 샛별이라는 둥.
아마 본인이 그 이야길 들으면 얼굴을 붉힐 정도의 칭찬세례.
그러나 정작 김선옥의 관심은 그들의 대화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저 애…….'
그녀의 시선이 찬혁에게, 정확히는 찬혁의 조리대를 향한다.
조리대 위에 쌓인 수많은 재료 더미.
야채와 고기, 밀가루나 조미료 따위의 어느 요리에서나 쓸 수 있을 재료였으나, 그중에서도 그녀의 시선을 가장 크게 잡아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와인과 꼬냑.
전 세계의 요리를 전부 뒤져도, 쓰이는 방향이 명확한 두 가지의 재료는, 재밌게도 그녀가 가장 특기로 하는 분야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재료.
김선옥의 눈에 흥미가 담긴다.
'호, 설마…….'
프렌치를 하겠다는 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앞에서.
늙은 우두머리의 눈빛이, 젊은 도전자를 향한 맹렬한 기세로 뒤덮인다.
심사 시작 후 3분이 경과한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