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킹메이커.-2-
오대수의 노림수는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안 그래도 한창 '킹메이커'의 정체를 추측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한 무분별한 루머와 뜬소문이 확장되고 있던 차에,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정보 소스인 공중파 방송사에서 시청자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준 것이다.
"근데 그거 아냐?"
"뭘요?"
"원래 가려운 곳은 덜 긁어줘야 한다는 거."
오대수의 행동은 치밀했다.
킹메이커가 정말 예선전에 참가한다는 것만 알린 채, 정작 그 정체를 추리할 수 있는 정보는 거의 공개하지 않은 것이다.
꼭 모기가 문 곳을 긁어준다 하여 몸을 맡겼는데 물린 곳은 놔두고 그 근처만 살짝살짝 긁어준 것 같은 느낌. 당연히 시청자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으나, 그런 반응을 보며 호들갑을 떠는 후배들 앞에서 오대수는 태연히 금연초를 질겅일 뿐이었다.
"이게 다 포석을 쌓는 과정이다. 잘 배워둬. 어그로는 이렇게 끄는 거야."
과연 연차를 쌓아온 값은 한다는 것인지, 오대수의 말은 허언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청자는 제 손으로 긁어서라도 가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두 손을 거둬 붙이고 나섰다. 물론 그 관심이 끝끝내 도착한 곳은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이라는 키워드였음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루, 이틀. 조금씩, 조금씩.
사냥꾼이 티가 나지 않게끔 미끼를 뿌려 사냥감을 꼬아내듯이, 오대수와 그 휘하 작가진은 입맛을 다실만 한 수준의 정보만을 뿌려 '수능'이라는 키워드에 잔뜩 몰린 사람들의 이목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끌고 오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뉴스에서 독점보도를 내걸고 킹메이커의 정체를 밝혀낼 무렵,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 예선전은 수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
"참, 이런 일은 제가 교장 자리에 앉은 뒤로 처음이네요."
오랜만에 또다시 불려간 교장실에서 나온 선생님의 첫 말씀이었다.
"역사…… 라고는 해도, 고작해야 반세기 남짓하지만, 학교 역사상 여기까지 여론의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죠. 재작년에 효민이가 TV에 나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예요."
피로가 섞인 미소를 지은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어찌 대답해야 할지 말을 찾지 못한 나는 그저 얌전히 마주 웃을 뿐이었다.
요즈음 성심고에는 이상할 정도로 방문객이 많다.
'전부 수능 때문이겠지…….'
정확히는 수능만점자 인터뷰 때문이겠지만.
얼마 전, 어느 아침방송 프로그램에서 '킹메이커의 비밀을 파헤친다!'라는 제목으로 방영한 화에 결국 우리 학교의 이름이 드러나고 말았다.
언젠가 밝혀질 거라고 생각은 했다. 오히려 조금 늦은 편이라고 느낀다.
따로 우리 학교에서 나서서 그게 우리라고 밝힌 적은 없지만, 애당초 성심고의 수험생 조공은 이 근방에서 오래 산 사람이라면 얼추 알고 있는 전통이다.
알아낼 방법이 영 없진 않다는 거지.
문제는 우리 학교 이름이 나간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수능만점자를 만든 킹메이커의 도시락 정체가 대체 무어냐는 질문이 학교 상담창구를 통해 수도 없이 들어온 것이다.
예비 수험생을 둔 학부모들에게 어찌나 전화가 많이 왔는지 상담실은 얼마 전부터 정말 필요할 때를 빼면 전화선을 빼둔다고 한다.
'그래 놓으니까 그다음에는 직접 학교로 찾아왔었지…….'
인정해줄 수밖에 없는 집념이다. 하긴, 부모에게 자기 아이 수능이 얼마나 큰 관심사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니 이해가 가긴 한다만.
그 집념을 끝내 이기지 못한 우리였고, 이 사건은 처음 보도를 탄 방송에 교장 선생님이 직접 나가셔서 도시락에 대한 모든 비밀을 풀어내는 것으로 얼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가장 고생하신 교장 선생님은 그때가 기억에 깊게 남은 듯 묘한 웃음을 지으셨다.
"그래요. 이 이야기는 이만 끝내고 찬혁 학생 이야기를 좀 해봅시다. 어디…… 드디어 한 주 앞까지 다가왔군요."
"네. 다음 주 주말부터요."
어느새 예선전이 바로 눈앞이다.
합격통지를 받고 약 한 달.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닌데 그사이 또 사건이 일어날 줄은 정말 예상도 못 했다.
"준비는 잘 했나요? 바깥이 시끄러워서 방해가 되진 않았고요?"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다…… 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선생님들이 많이 신경 써주셔서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감사합니다."
"학생을 지원하는 게 학교의 역할이니까요."
손사래를 친 교장 선생님이 이어서 말씀하셨다.
"찬혁 학생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쉬운 길은 아닐 거예요. 세계라는 게 그리 만만하진 않더군요. 저도 나름 실력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몇 번이나 고배를 마셨는지."
재작년 있던 시즌 1 때 한국팀은 마냥 승승장구만 하진 않았다.
한 라운드에서 패패승승승 같은 역전극을 펼친 적도 있고, 한 번은 아예 탈락 후 패자부활전으로 간신히 올라오기도 했다.
그때 겪은 고생이 생각났는지 교장 선생님이 쓴웃음을 머금는다.
"찬혁 학생이 직접 선택한 일이고, 저도 그걸 바람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많이 힘겨울 겁니다. 부디,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길 바라요."
"예."
"그리고 또 하나. 당부해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
고개를 갸웃하는 날 보며 교장 선생님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가장 힘겨운 상대는 다른 팀이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죠. 찬혁 학생을 응원해주는 사람들. 평소엔 힘이 되어주겠지만, 정말 힘들 때엔 그 사람들이 오히려 부담이라는 짐이 될지도 모릅니다."
"……."
"그걸 버텨내야만 하는 순간이 분명 찬혁 학생에게도 찾아오겠죠. 아마 누구도 찬혁 학생을 도와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만일 그때가 온다면 꼭 이것만큼은 기억해주세요."
교장 선생님이 숨을 고르곤 말을 잇는다.
"어떤 결과를 내놓던, 우리 학교는 언제나 찬혁 학생이 돌아올 곳으로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러니 중압감에 눌리지 말고, 찬혁 학생의 최선을 보여주도록 하세요."
그 담담한 응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
교장 선생님과의 짧은 면담을 나눈 뒤, 예선전 당일이 올 때까지. 정말 죽어라 연습했다. 이전까지 열심히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보다도 더욱 열심히. 이미 굳은살이 두텁게 밴 손가락 살갗이 벗겨지고 다시 굳어질 정도로.
너무 오버페이스로 연습하는 게 아니냐 걱정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줄 순 없잖아.'
그런 응원을 들었는데, 최고의 모습을 보여줘야만 하지 않겠는가.
이미 습관을 넘어 각인되다시피 한 기본적인 동작을 다시 살피고, 잘못된 점을 찾아 고치고, 나은 점을 더더욱 발달시켜, 보다 완벽한 모습으로 거듭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은 분명 굉장히 힘든 일이었지만, 힘든 만큼의 값어치는 했다.
"원래 못 하는 걸 잘 하게 되는 것보다 잘 하는 걸 더욱 잘 하는 게 어려운 거다. 네 기본기는 굉장히 탄탄해. 기초가 튼튼한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건 힘들지만, 그만큼 청사진을 확고하게 그릴 수 있지. 방법은 하나다. 연습, 또 연습."
…… 너무 스파르타식 교육이라 도중에 내가 먼저 쓰러지는 거 아닐까 싶긴 했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연습에 몰두하니 시간은 쏜살처럼 흘러갔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리고 일주일.
비로소 예선전이 시작되는 날.
녹화 일자는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 이틀뿐이지만. 일일 촬영 시간이 12시간에 가까운 강행군이 예정되어 있다.
'할 수 없지 뭐…….'
전국팔도에서 몰려드는 셰프를 한 자리에 초청하는 것이다. 당장 휴가를 받아 온 사람도 있을 거고, 가게 문을 닫고 온 사람도 있을 터.
그러니 기왕 힘들게 모인 김에 뽕을 뽑자는 거겠지.
이틀간 고생할 생각을 하면 벌써 지끈지끈 두통이 생기는 것 같지만, 지방에서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에 걸리는 수고를 생각하면 차라리 이렇게라도 부담을 줄이는 게 낫다.
"그나저나……."
이번 예선전이 시행되는 장소는 뜻밖에도 제법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뭐, 나야 직접 와본 적도 없는 곳이긴 하지만, 경기도와 강원도 사이, 넓은 목초지에 홀로 선 목조 건물이 하나.
마치 목초지라는 이름의 바다 위에 홀로 우뚝 솟은 외딴 섬 같은 분위기다. 정작 몰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 분위기도 금세 사라졌지만 말이다.
"여기에 직접 와볼 줄은 몰랐는데."
겉모습만 보면 이곳은 마치 시골에 있는 자그마한 초등학교처럼 생겼다.
천장이 높은 단층. 넓은 마당. 횡으로 길게 늘어서서 다시 디귿자로 꺾인 모양새.
건물을 둘러싼 낮은 돌담의 중심에 자리한 커다란 대문과, 그 위에 글자 그대로 대문짝만하게 박힌 간판에 쓰인 달필 한자가 눈에 띈다.
풍운정風韻亭.
이 건물의 정체는, 사실 내가 처음 느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이곳은 성심고의 원류. 안효민, 안창민 남매의 증조부께서 제자들에게 요리를 전수한 요리학교였으니까.
"학교에서 출발해서 학교로 돌아왔네."
사진 따위로나 몇 번 본 게 전부인 이 풍경에 나는 영문 모를 향수를 느꼈다.
느껴질 리 없는 그리움에 멍하니 건물의 전경을 바라보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가."
정문 앞에선 이미 십수 명의 촬영팀이 언뜻 보아도 반백 명은 넘어갈 셰프 군단을 상대로 명단 체크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 또한 서둘러 행렬에 따라붙자, 주변에서 갖가지 목소리가 내 귀를 찔러왔다.
"뭐야? 어린애?"
"학생 아니야? 설마 쟤도 예선 합격잔가?"
"설마 그럴 리가……."
신기해하는 목소리가 반, 미심쩍어하는 목소리가 반. 아예 반응이 없는 것이 일부.
어차피 예상했던 반응이기에 딱히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이미 저 사람들과 같은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던 적이 있으니 안다. 젊음은 분명 좋은 것이지만, 어릴수록 얕보이기 쉽단 것 또한 사실.
하지만…….
'오히려 얕보이는 게 마냥 나쁜 건 아냐.'
이 자리에 있는 셰프는 모두가 경쟁자.
경쟁자가 멋대로 날 과소평가해준다면, 나는 그 여유를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면 될 일이다.
모처럼 생긴 이점을 내 손으로 내팽개칠 이유는 없지.
내게 쏟아지는 다양한 시선을 그저 묵묵히 감내하며, 겉으로는 살짝 위축된 척 고개를 푹 숙였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날 뚫어져라 바라보던 시선들이 하나둘 떨어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걸까. 뭐, 아무려면 뭔 상관이야.
촬영팀의 인원체크가 어느새 내 순서까지 도착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잠시 리스트 체크 먼저 할게요. 그러니까…… 어? 류찬혁 참가자 맞으시죠?"
리스트를 보느라 고개를 푹 수그린 남성이 펜으로 무언가를 적고는 다시 고개를 들더니,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뭐지? 리스트 확인도 안 하고 바로 알아본 것 같은데?
"예. 맞습니다."
"역시. 요즘 저희 사이에서 유명하시거든요. 체크 완료했습니다. 여기, 번호표 받아가세요. 이따 조리복으로 갈아입으시고 왼쪽 가슴팍에 달아주시면 됩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아, 예……."
유명하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 발언에 대한 진의를 묻기도 전에 남자는 무어가 그리 급한지 그새 떠난 뒤였다. 다음 참가자를 확인하러 간 걸까.
"…… 뭐야, 대체."
왠지 모르게 묘한 기분이 몸을 감싸오는 것 같아, 살짝 소름이 돋았다.
뭔가 이 예선전,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