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킹메이커.-1-
수능이 끝나고 벌써 2주가 지났다.
점수가 발표된 다음 날, 학교에선 여러 학생들의 만감이 교차하여 혼란스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무서웠지…….'
위층 어디선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다른 구석에서는 학교 건물이 떠나가라 웃음소리가 들리고.
꼭 용암과 빙하가 맞부딪히는 자연재해 한복판에 있는 기분이었다.
뭐, 그렇다고 흑요석이 생긴다거나 얼음반 용암반 외딴 섬 같은 게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아, 지옥 포탈은 생겼을지도 모르겠네.'
누가 부싯돌로 불만 붙이면 바로 터질 텐데.
고작해야 며칠에 불과하긴 했지만, 그런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냉랭한 공기가 학교 온 사방을 휘몰아쳤다. 그럴 만도 하지. 고작 숫자 하나 차이로 12년의 결실이 이루어지느냐 마느냐의 존망이 걸린 사업인데 신경이 날카로워지지 않는 편이 이상하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생각보다 오래 가지 않았다.
성심고 또한 명색이 특목고이기에 기본적으로 수재가 많은 편이어서 크게 사고가 난 학생이 아주 많지는 않았으며, 몇몇 예외에 들어가는 학생조차 실기 쪽으로 이미 제 살길을 금방 찾아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
그런 자잘한 논란을 단방에 잠재울만한 초특급 이슈가 요 며칠 동안 세간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번 년도 수능은 난이도가 굉장히 어려운 불수능으로 많은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재난이 되었는데요. 그런 와중에도……."
"야, 또 한다."
"거 양반은 못 되겠네."
"무슨 소리야?"
"아니, 아무것도."
봐라. 얼마나 뜨거우면 이미 몇 번을 방송한 내용이 또 뉴스에서 이야기를 타고 있다.
올해 수능은 예년보다 확연히 어려워졌다는 평가를 들었다. 우리 학교에서 시험 망쳤다며 울상을 짓던 선배들이 종종 보였던 것도 그래서였고.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거에 연연하지 않는 대단한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만점자가 탄생했습니다. 다만 올해는 요 몇 년 새 최고의 불수능이었다는 말을 듣는 만큼 그 숫자가 매우 적은데요. 약 50만 명에 가까운 수험생 중 단 한 사람만이 수능만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기숙사의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오자, 우리 둘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와, 아무리 봐도 모르겠네. 수능만점은 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너 게임하는 시간을 전부 공부로 돌리면 될지도 몰라."
"된다가 아니라 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진짜 엄두도 안 난다."
기숙사 침대에 앉아 폰게임을 돌리던 김철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 넋두리를 흘렸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할 때는 열심히 하는 녀석인데 말이야.
"오, 슬슬 그거 나오겠네. 인터뷰."
"조용히 해."
김철정의 묘한 비웃음 섞인 말을 단호히 잘라냈다.
물론 단 한 명의 수능만점자라는 건 분명 큰 뉴스긴 하지만, 고작 그거 하나뿐이라면 내가 큰 이슈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 본론은 바로 이다음 이어질 인터뷰에 있었다. 화면에 리포터와 수능만점자라는 학생의 얼굴이 비쳤다. 너무 여러 번 봐서 얼굴이 익숙해질 정도였지만, 사실 저 사람을 처음 본 건 화면 속에서가 아니었다.
짧게 과거를 회상하는 동안 리포터가 인터뷰를 시작한다.
"이번 정식 점수 발표로 유일한 수능만점자라는 사실이 명확해지셨는데요, 먼저 축하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과분한 축하를 받아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인터뷰는 짧은 단문단답 형식으로 이어졌다.
가채점으로 자신이 만점을 받았다는 건 알고 있었느냐, 알았다면 무슨 기분이었느냐, 수능 문제가 어렵지는 않았던가, 공부 비법이 있다면 그건 무엇인가, 지망 대학은 어느 곳인가.
익숙하다면 익숙할 문답이 오가고, 마지막으로 리포터가 건넨 질문은 이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픈 말씀 있으신가요?"
"아, 예. 이 자리를 빌어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픈 분들이 있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순서였다.
응원해준 가족, 가르쳐준 스승, 동고동락한 친구.
여러 사람의 이름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한 문장이 덧붙는다.
"그리고…… 이름도 모르지만, 또 하나 정말 감사한 분들이 있습니다."
"이름을 모르는? 그건 누구인가요?"
"제가 사실 수능 전날 너무 새벽까지 공부를 하느라 저도 모르게 늦잠을 자서 지각할 뻔했는데요. 덕분에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점심도 준비를 못 해서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시험장 앞에서 공짜로 간식이랑 마실 게 든 도시락을 나눠주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비몽사몽해서 어떻게든 배라도 채울 겸 챙겨서 1교시 시험 시작 전에 얼른 까먹었는데, 정말 너무 맛있었어요! 거기다 그걸 먹으니까 배도 든든해지고, 잠기운도 한방에 날아가서 굉장히 개운한 기분으로 시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만점을 맞은 건 그분들 덕이 컸다고 생각해요!"
"이야, 그거 참 대단한 우연이었네요!"
"언젠가 직접 찾아가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픈 마음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후 약 5분여 동안 이어진 인터뷰가 끝나고, 화면이 전환된다.
훈훈한 일화에 감동했다는 듯 데스크에 앉은 아나운서 두 사람이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뉴스를 마무리했다.
이쯤 되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바로 저거다. 지금 한창 학교를 휩쓸고 있는 이슈.
"야, 찬혁아."
어느새 하던 게임을 끈 김철정이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포털 통합 실시간 검색어. 1위 수능만점자, 2위 도시락, 3위가 수능만점 도시락인데, 혹시 4위 안 궁금하냐?"
"……."
"4위가 킹메이커다. 축하드립니다. 킹메이커 선생님."
저 도시락을 만든 게 누구냐고?
그게 나야. 움빠 둠빠 두비두밤.
…… 정확히는 우리지만. 젠장. 장작이 복사가 되네.
***
"으으, 골 빠개진다."
오대수는 방송국의 PD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의 총괄담당을 맡은 프로듀서다.
'총괄이라고 해도 끽해야 예선전 까지지만.'
어차피 본선쯤 가면 그보다 더 윗선의 누군가에게 돌아갈 역할.
그러나 정작 해야 할 일은 단연코 지금이 더 많다. 당연한 일이었다. 일정이 잡히고 준비를 시작한 지 반년이 다 지나서야 간신히 녹화 일정이 가까워진 프로젝트다.
촬영인력 구하기, 참가자 체크 하기, 촬영장을 따고 심사위원 섭외까지!
본사의 도움이 있다 해도 일개 프로듀서 한 사람이 책임을 떠맡기에는 그 무게가 너무 막중하다. 오죽하면 요 반년 동안은 집보다 방송국에서 밤을 보낸 날이 더 많았을 정도니까.
오늘도 결리는 어깨와 두통으로 쪼개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회의실에 앉아 있으려니, 어느새 그와 비슷한 몰골을 자랑하는 헤드 스태프 급 인선들이 하나둘 들어와 자리에 앉기 시작한다.
"우와, 형님 어제도 여기서 밤 샜어요?"
"집에도 들어가고 하세요. 몸 상해요, 선배."
그러나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몰골을 보이는 오대수에게는 이길 수 없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지만 이 경우엔 똥 묻은 개가 하수도에서 싱크로나이즈를 한탕 뛰고 온 개를 나무라는 격이었다.
"나라고 좋아서 이러고 있냐. 누구 하나는 방송 체크해야 할 거 아냐."
오대수가 하는 일은 굉장히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어려운 것은 바로 화제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시즌 2 계획이 발표되고 반년이 지났다.
고작 일주일 전 방영된 방송. 아니, 일주일이 아니라 고작 사흘만 지나도 까먹는 게 시청자다. 그런데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은 마지막 방송이 나간 지 2년도 더 지나지 않았는가. 제아무리 대단한 프로그램이어도 예전 같은 화제성을 계속 바라기는 요원한 게 사실이다.
시즌 2라는 이름을 달았으니만큼 전작의 화제성을 계속 껴안고 스타트를 끊는 게 베스트.
그 베스트를 이행하기 위해, 여태껏 오대수는 화제성을 지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요즘 하던 시즌1 올튜브 다시보기 라이브 및 클립 편집도 그것 때문.
때때로 참여자 명단 일부를 파파라치에게 고의로 흘리기도 하고, 어떨 때는 심사위원 섭외에 대한 발표도 했다.
그럴 때마다 파도처럼 널뛰는 지표를 밤새 뜬눈으로 체크한 지 수백 일. 예선전 녹화일이 코앞으로 닥친 지금, 비로소 라스트 스퍼트를 할 때가 왔다.
그러나, 하필 그 시기가 좋지 않다는 게 큰 문제였다.
"요즘 바깥은 어떠냐?"
"어우, 말도 마요. 아직도 수능만점 이야기로 시끄럽다니까요."
방송가에는 연말 시청률 국밥으로 불리는 몇 가지 컨텐츠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수능에 대한 이야기. 전국 수십만 학생과 그 배가 넘는 학부형의 모든 노력과 기대가 그러모인 한 해 최대의 관심사.
더군다나 이번 수능은 역대급이라는 말까지 듣는 불수능이었던 것에 더해 수능만점자가 전국에서 단 한 명이라는 엄청난 떡밥까지 있다.
'차라리 수능만점이 없었으면…… 아니, 아니지.'
저도 모르게 악담이 나온 것을 간신히 속으로 집어넣은 오대수가 픽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한 화제는 어지간해서 자연 진화가 될 때까지 꺼지지 않는다. 대단찮은 화제로는 그 고개를 비틀지도 못하겠지. 오대수가 또다시 한숨을 뱉는다.
"젠장. 운 한 번 지지리도 없네."
신도 무심하시지. 어차피 무신론자라 믿지도 않지만.
'신이 정말 있기는 한 거야?'
없는 것 같은데. 씁.
잠을 못 자서 그런 것일까, 계속 머리를 찌르는 잡생각을 떨쳐내고 있자니 회의실에 모인 인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막내작가였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은 또 새 떡밥이 돌더라고요."
"떡밥? 아직도 풀 게 남았대?"
"예. 이게 들어 보니까 되게 재밌던데요."
"야, 넌 이게 재미가…… 하아, 그래.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막내작가가 말을 이었다.
원래는 지각까지 할 뻔한 수능만점자.
우연히 누군가에게서 받은 도시락.
도시락 덕분에 해낸 수능만점.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을 향한 감사.
과연, 듣고 있는 오대수 또한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스토리였다.
"그래서 지금 실검 1위부터 10위까지 죄다 도시락 이야기로 깔렸어요."
"이 나라 학부모가 원래 그러잖냐. 학생한테 좋은 거면 뒤도 안 보고 달려드는 버릇."
"하루이틀 일이 아니긴 하죠. 안 그래도 지금 학부모들이 대체 도시락 만든 곳이 어디냐고 이 잡듯이 뒤지고 있대요. 킹메이커 같은 별명까지 붙었다니까요?"
"고작 도시락 갖고 무슨…… 애가 공부를 잘한 거지."
"원래 사람이 절박해지면 뭐든 매달리잖아요. 미역국 피하고, 먹지도 않을 도끼 사탕 사고. 근데 말이죠, 제가 재밌는 건수를 하나 찾았거든요?"
재밌는 건수? 일행의 시선이 막내작가에게로 쏠린다.
"사실 이 도시락을 만들어 나눠준 곳이 업체가 아니래요."
"업체가 아니라고? 그럼 뭐, 개인이 만들어서 나눠줬다는 거야?"
"아뇨. 그것도 아니고요. 제가 수능만점자 나온 곳 사는 친구한테 들은 건데, 그 도시락을 만든 곳이 성심고라고 하더라고요."
"성심고?"
"예. 수능 보는 선배들 도시락 만들어주는 게 원래 그 학교 전통이라나? 수능만점자 걔는 성심고 애들이 다 받고 남은 거 받아간 거래요."
"허, 스태프 3, 40명 먹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용케 그런 전통을 고수하는구만."
그 정도는 해야 국내 최고 요리학교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단 건가. 성심고의 행동력에 혀를 내두르던 오대수가, 그 순간 흠칫, 하고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잠깐만…… 성심고라고?"
성심고, 성심고. 익숙하다. 꼭 아침에 지갑을 깜박 집에 두고 왔단 걸 버스 정류장에서 눈치챈 것 같은 오묘한 기분. 분명 최근에 귀에 익을 정도로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찰나, 마침내 어디서 그 이름을 들었는지 기억해냈다.
'아.'
참가자! 이번 예선전에 참가하는 인원 중에 단 한 명 있던 미성년자라 눈여겨봤던!
'그 친구가 분명 성심고였지?'
설마.
더 이상 생각이 뻗어 나가기 전에, 그런 딴죽이 오대수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말도 안 된다. 설마 그런 형편 좋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마침 장안의 화제인 수능만점자를 정상으로 올려보낸 킹메이커가, 이 타이밍에,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지금 이 때에 내 방송의 참가자로 들어왔다고?
그럴 리가 없다. 그런 형편 좋은 일이 있을 리가 없다.
어느 때부턴가, 오대수의 이마에는 몇 방울의 식은땀이 매달려 있었다. 바로 귓가에서 대포라도 터진 것 마냥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고, 확대된 동공과 손은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린다.
그러나 이성이 아무리 부정해도, 머릿속에서 그 참가자의, 찬혁의 지원서가 계속해서 떠오른다. 잠깐 눈여겨 훑어본 게 전부인 자그마한 증명사진에 찍힌 생김새마저 선명하게 기억날 정도로.
"아, 그러고 보니 요즘 성심고 올튜브로 홍보채널 열었잖아요? 거기 영상 올려놨을지도…… 어라? 진짜 있네? 이거 수능 당일 영상인데요?"
"이, 이리 내놔!"
핸드폰으로 영상을 검색하던 막내작가의 손에서 우악스럽게 핸드폰을 강탈한 오대수가, 잔뜩 충혈된 눈으로 조심스레 화면을 바라봤다.
이름 모를 학교의 교문 앞. 성심고등학교라고 쓰인 어깨띠를 맨 학생 일행이 지나가는 수험생에게 도시락을 손수 안겨주는 장면이 똑똑히,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학생 일행의 중심에서, 오대수는 찾아내고야 말았다.
"허, 허읍……!"
숨이 막힌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정신이 어질어질하여 호흡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대수는 최후의 판단력을 짜내어, 막내작가에게 반쯤 던지듯 폰을 돌려주며 외쳤다.
"기, 기사……! 당장 기자 섭외해서, 기사 하나 올려……! 아니, 많이 불러! 최대한 많이!"
"예, 예?"
"불수능 킹메이커!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에 합류! 빨리……! 빨리!"
"아, 아, 알겠습니다!"
우다다다!
말 그대로 꼬랑지에 불붙은 개처럼 회의실을 뛰쳐나간 막내작가를 보며, 온몸의 힘을 전부 꺼내 쓴 오대수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 허허."
이런, 이런 우연이 있단 말인가.
신은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