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동장군이 온다.-1-
─올해는 시베리아 기단의 이른 하강으로…….
─예년보다 조금 더 빨리 한파가 오리라 예상되며…….
─환절기 질병에 유의해야 한다는 연구진의 당부가…….
겨울이었다. 그것도 아주 완연한 겨울.
숨을 뱉고 다시 들이쉴 때마다 콧구멍부터 시작해서 기도를 따라 폐까지 살얼음이 자자작! 하고 끼는 것 같은 이 느낌. 은근히 나쁘지 않다.
"…… 아픈 게 좋아? 변태?"
"아니, 말이 너무 심하시네."
평범하게 신선한 아침 공기가 좋을 뿐이다. 난방 돌리느라 빈틈 하나 없이 꽉 닫힌 실내에 있다 보면 먼지 때문에 숨구멍이 막히는 기분이라고.
오늘도 아침 조깅 파트너가 되어준 나현주는 평소처럼 맹한 시선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공기 청정기, 없어?"
"…… 없는데."
기숙사에 공기 청정기가 있어?
"우리 방엔 있어. 나랑 희연이랑 돈 모아서 산 거."
"그러냐……."
우리라고 딱히 못 살 건 없다만, 룸메나 나나 딱히 그런 거에 신경 쓰고 사는 타입이 아니었다.
철정이 그놈은 돈만 모이면 제 기숙사 방에 있는 책장에 게임기며 거기 넣은 패키지 같은 것만 늘리는 데 바쁘고, 나는 굳이 창문 열고 에어컨 좀 틀면 될 거에 돈 쓰기 싫어서 저축 중이니까.
기숙사 살면 좋은 점이 몰컴, 몰겜을 안 해도 되는 거라며 히죽대던 녀석을 떠올리니 괜히 머리만 아파져서 이윽고 생각을 관뒀다.
"달릴 만큼 달린 것 같은데, 난 슬슬 들어가련다. 넌 어쩔래?"
"난 조금만 더 뛰다 갈게."
"…… 아직도 뛸 게 남았냐."
"이번에는 인터벌."
가뜩이나 추워진 날씨 탓에 머리 위로 증기가 피어오를 정돈데, 참 체력도 좋다.
"그럼 나 먼저 간다."
"응."
"…… 적당히 뛰고 들어가."
가로수가 뻗은 보도 위에서 팔다리를 굽혔다 피며 스트레칭에 열중하는 나현주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평소 같으면 얼른 들어가서 씻어야 뭐라도 대충 챙겨 먹고 아슬아슬하게 등교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오늘만큼은 딱히 서두를 필요가 없다.
주말이냐고? 아니. 그렇지 않다. 평일이다.
다만, 평일은 평일이어도 조금 특별한 평일이지.
"뭐니뭐니해도, 오늘은 나라가 멈추는 날이니까."
오늘은 11월 셋째 주.
그렇다.
수능 날이다.
***
기본적으로 수능 날은 당사자가 아닌 학생들에겐 그냥 다른 날과 똑같은 빨간 날에 불과하다. 뭐, 나처럼 당장 내년 같은 날에 저 자리에 설 고등학교 2학년은 그렇게 여유롭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당사자들만 할까.
그러니 선배들이 12년의 학업의 결실을 맺기 위해 죽어라 머리를 쥐어짜는 동안, 그보다 어린 학생들은 집에서 푹 쉬는 모양새가 된다.
그게 평범한 일이겠지만…….
'이게 또, 평범하지 않은 집단에 소속됐다 보니.'
이전에 누누이 말했다시피 대회반은 학교의 얼굴이다.
조금 말을 바꾸면 '유보수 전일 근무는 안 되지만 내키면 불러 쓸 수 있는 값비싼 일꾼' 정도의 위치에 있다.
학교의 공식적인 일꾼이니만큼, 우리 대회반은 이런 쉬는 날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왜, 수능 시험 볼 때면 선배가 시험장에 들어가는 걸 후배들이 박수치며 환영하는 문화가 있지 않은가.
성심고에도 그 엇비슷한 게 있다. 명색이 조리고인만큼 조금 특이한 면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성심고 선배님들! 시험장 들어가시기 전에 들러서 하나씩 받아가세요!"
"어, 고생한다. 이거 가져가면 돼?"
"예! 수능 힘내세요, 선배님. 파이팅입니다!"
"그래. 고마워."
이 추운 날씨에 외투도 없이 교복만 입고 성심고라고 적힌 어깨띠를 착용한 대회반 1, 2학년 일동은 현재 성심고 3학년의 수능시험장으로 채택된 학교 교문에 서서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선배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눠주는 건 엊그제부터 열심히 준비한 간식거리와 음료 등이 담긴 도시락 가방.
이게 바로 성심고의 전통 중 하나인 수능생을 위한 대회반의 도시락 조공이다.
뭐, 도시락 안에 있는 건 밥이 아니라 간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차피 점심 정도야 집에서 도시락을 챙겨주든, 아니면 한 끼 든든히 챙겨 먹으라고 용돈을 두둑하게 챙겨주든 했겠지.
그러니 우리는 후식, 혹은 쉬는 시간 사이사이 간단하게 입을 달래줄 간식거리를 만들어 수험생에게 나눠준다.
간단한 간식거리라고 얕보면 안 된다. 이거 준비하겠다고 당장 일손이 빈 실기 담당 선생님들 대부분과 대회반이 일주일 내내 메뉴를 짜고, 엊그제부터 준비해서 제작한 물건이니까.
어제만 해도 이거 만들겠다고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해서 준비했다.
시간을 들인 만큼 충실한 구성으로 준비된 도시락. 대단한 힘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수능이라는 격전으로 향하는 선배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으면 싶은 마음이다.
"와…… 성심고는 저런 것도 준비해주나?"
"돈 많은 학교가 좋긴 하구나. 진짜 개 부럽다."
"일찍 나오려고 아침도 대충 빵으로 때우고 왔는데. 혹시 돈 받고 안 파려나……."
안 판다.
박스를 잔뜩 쌓아놓고 교문 앞에서 농성 중인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다른 학교 학생들, 그리고 재수생들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흘리지만, 어림도 없지. 적어도 등록된 학생 수만큼 카운트 끝내기 전에는 아무한테도 못 준다.
"성심고 선배님들! 들어가시기 전에 들리셔서 하나씩 받아가 주세요!"
"따뜻한 음료랑 손난로, 필기구도 있어요! 오셔서 받아가세요!"
마치 봉사활동이라도 나온 것처럼 대회반끼리 로테이션을 돌려가며 쉬고, 소리치고, 쉬고, 소리치고를 몇 번인가 반복하던 그때. 입장 시간이 아직 30분쯤 남았을 무렵에 또 다른 3학년 한 명이 우리를 찾아왔다.
"어이! 누구 맘대로 여기서 장사를 하는 거야?"
"딱히 돈 받고 파는 건 아닌데요."
평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그리고 요근래엔 통 듣지 못한 목소리.
그 특유의 활기참과 장난스러움이 섞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굳이 얼굴을 안 봐도 알 수 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배."
"오냐. 좋은 아침이다. 동생아."
그러니까 선배 동생은 저기 있대도요.
"걔는 어제도 인사했고 오늘 아침에도 했으니까."
"하아. 거, 선배는 긴장도 안 돼요? 어떻게 얼굴 보는 게 두 달 만인데 변한 게 없으십니다."
"에이, 어차피 난 앞길 창창해서 괜찮아! 잭팟만 안 나오면 됐지 뭐!"
"…… 아, 예."
꼴받네 이거. 넌 지금 수십만 수험생을 적으로 돌렸어. 어? 알아? 전쟁선포다.
…… 앞길 창창한 건 사실이니까 뭐라고 딴죽도 못 걸겠다마는.
안 그래도 오똑 선 콧날을 피노키오마냥 높게 치켜든 안효민 선배가 뒤늦게 잘난 척을 끝내고 말한다.
"아무튼, 슬슬 들어가야겠다. 나도 하나 줄래?"
"옙, 여기요."
"오, 꽤 묵직하네. 뭐뭐 준비했어?"
도시락 가방을 받아들고 아령을 든 것처럼 팔이 늘어지는 행세를 한 선배가 물었다.
"별거 없어요. 건조한 채소가루 넣은 야채 크래커랑 슬라이스 치즈 4종. 갓 만든 오렌지 잼하고 모둠견과, 모둠과일 약간씩. 거기다가 꿀에 절인 레몬이랑 배정과. 마지막으로 시나몬 파우더 약간요. 아, 음료는 커피랑 홍차 중에 고르실 수 있는데, 어느 거로 하실래요?"
"오, 적당하네. 그럼 난 홍차. 커피는 별로 취향이 안 맞아."
"알겠습니다."
별거 없어?! 적당해?! 그런 단말마가 다른 수험생 사이에서 들려온 것 같은 기분이지만, 이 정도야 뭐 정말로 별거 아니다.
'…… 아니, 내 상식이 좀 틀어진 건가.'
이 정도면 디저트 카페를 가도 몇 만 원 정도는 받을 구성이긴 하지. 거기다 우리는 재료가 죄다 최고급에 전부 수제니까 작정하고 받으려면 얼마든 받을 수 있을 거고.
묘하게 비틀려 버린 내 상식에 작게 한숨을 뱉으며 도시락 가방 옆주머니에 딱 넣을 수 있는 사이즈로 준비된 보온병을 선배에게 건넸다.
"더 필요하신 건요? 필기구나 손난로 같은 것도 있는데."
"에이, 그런 건 다 챙겼지."
"혹시 수험표 두고 오신 건 아니죠?"
"설마! 내가 그 정돈 아니다."
그거 참 다행이다. 내 눈엔 딱 그 수준으로 보일 때가 너무 많았거든.
"그럼 잘 먹을게."
"예. 부디 비싸게 드신 만큼 결과도 잘 내주세요. 대회반 아닙니까. 망치면 교장 선생님한테 한소리 들을 걸요."
"알아, 알아."
길게 늘어진 도시락 가방의 끈을 어깨에 걸쳐 멘 선배가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이따 보자."
"이따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난 이거 끝나면 기숙사 들어가서 쉴 건데.
"뭐? 그럼 설마 수능 끝낸 수험생 뒤풀이에 안 어울려줄 생각이었어? 와,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못됐다 너."
"제가 거기 가서 뭐하게요…… 친구 없어요?"
"어!"
"당당하지 말라고!"
있잖아! 친구 있잖아! 아침 댓바람부터 사람 정신을 나가게 만드는 것이 목적인가.
그렇다면 아주 효율적이고도 철두철미한 행동거지라 내심 감탄하며 난 선배를 닦달했다.
"됐으니까 얼른 들어가요. 길 잃고 헤매다가 시간 모자라서 퇴실이라도 당하면 답도 없잖아요."
"알겠어, 참. 그렇게 날 쫓아내고 싶다 이거지?"
"선배를 위한 겁니다."
그제야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쉰 선배가 고개를 젓는다.
무엇이지? 지금 누구 앞에서 한숨을 쉬는 거지? 정말 한숨을 쉬고 싶은 건 내 쪽인데?
"아무튼 끝나면 애들한테 말해둬야 한다? 대회반 모여서 뒤풀이야!"
"아니, 그게 어떻게 제 맘대로……."
"내가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 쏠 테니까! 저녁부터 소로 박고 갈까?"
"정말 존경합니다, 선배님."
아.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이 감정은 뭐지? 이게…… 존경심?
나란 남자, 돈 앞에선 한없이 약해지는 사나이였다.
***
선배가 떠난 뒤에도 우리는 그 자리에 남아 도시락 조공을 계속해나갔다.
안효민 선배가 거의 마지막 타자에 가까웠기에 남은 명단도 금방 체크가 끝났지만 말이다.
일부러 살짝 많이 만든 도시락은 불의의 사고로 거의 입장 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온 사람들에게 무료로 배부했다. 도시락 통이나 가방이 일회용은 아니지만 이것도 전부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거라는 교장 선생님의 당부다.
거기다 수험을 지각할 정도면 정말 생각이 없거나, 아니면 운이 없어서 사고를 당한 걸 텐데 그런 액운을 시험장까지 가지고 들어가면 얼마나 입맛이 씁쓸하겠는가.
부디 공부한 성과를 무사히 선보일 수 있도록, 우리의 도시락이 자그마한 행운이 되어 그런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뭐, 어쨌든 잠시 이야기를 돌려서.
수능이란 거대 이벤트는 어느 의미 한 해 학사 일정의 마무리 단계를 긋는 행사다.
이때쯤을 기점으로 빡빡하게 조여졌던 수업 일정도 조금은 여유가 생기게 되고, 긴장감이 감돌던 학교도 쌓인 눈이 햇볕에 녹는 것처럼 점차 풀리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런데 나는 조금 사정이 다르다.
중간고사도, 기말고사도 끝나 다른 애들은 방학식 때까지 놀자판을 벌일 여유가 있겠으나, 그런 학교 시험보다도 더욱 중요한 과업이 아직 내 앞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후……."
기숙사로 돌아와 펼친 달력을 쭉 훑던 내 손이 11월이라 적힌 페이지를 잡고는 뒤로 넘긴다.
12월. 1년의 마지막.
이제부터 약 2주 후. 12월 첫째 주 주말.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의 예선전 녹화가 비로소 시작된다.
"…… 좋아, 긴장 놓지 말고. 힘내자."
남들보다 조금 더 이른 시기지만, 내 2년의 결실을 선보일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