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65화 (265/403)

265. 스타트 대쉬.-2-

"뭘 해볼까."

제한시간은 세 시간. 장르는 자유. 메뉴 가짓수도 자유. 핵심 재료는 감자.

레시피 구상을 할 수 있는 10분이란 여유가 있긴 하지만, 위의 조건에 걸맞은 레시피를 뽑아내기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다.

다른 게 아니라 가장 큰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아.'

감자는 이른바 말하는 맛없는 주식 작물 중 하나다.

오해하진 마라. 나 감자 좋아한다. 잘 쪄서 소금 뿌리고 설탕 쳐서 먹으면 개꿀맛이지.

근데 그것도 며칠에 한 번이지 매일 그렇게 먹는다고 생각해봐라. 아무 반찬 없이 맨밥만 꾸역꾸역 먹고 사는 거랑 크게 다를 게 없다.

감자가 몇몇 나라의 주식으로 떠오른 지 수백 년이 넘게 지났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설마 맨밥만 먹고 살진 않았겠지? 그렇다. 그래서 감자를 중심으로 개발된 요리가 많은 거다.

구이에도 들어가고, 볶음에도 들어가고, 스튜에도 들어가고, 빵에도 들어가고…….

뭐 아무튼.

요컨대 감자라는 것 자체가 달걀처럼 워낙 요리법이 다양해서 뭘 고르기가 힘들다는 거지.

'꼭 할 줄 아는 게 너무 많은 게임 캐릭터 같네.'

AOS 게임인데 다른 캐릭은 Q, W, E, R에 점멸, 점화 붙여서 스킬 여섯 개 쓸 동안 혼자 스킬 칸이 한 스무 개쯤 되는 캐릭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손 꼬여서 뭣도 못한다.

'아니면…….'

정말 유용하고 내가 자주 쓰는 스킬만 딱 골라서 사용하던가.

'역시 이게 정답인가.'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뚫렸다면 그곳으로 가지 않을 이유는 없다. 아니, 가야만 한다.

"설렁설렁해서 이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으로 레시피 정리를 마무리 지을 때쯤,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지 심사단이 우리를 향해 외쳤다.

"10분 지났습니다! 참가자 여러분은 앞줄부터 나와 재료를 가져가세요!"

좋아. 어디 한 번 제대로 달려보자.

***

─다다다다다닥!

─보글보글보글보글

─치이이익!

아주 난리가 따로 없다. 심사단의 알림이 역할을 맡는 김예일 작가의 감상이었다.

그 말대로, 주방은 그야말로 난리 북새통이었다.

각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 물이 끓는 소리, 압력솥 종소리, 프라이팬에 지지는 소리.

어지간한 대형 식당의 주방을 압도하는 소음의 파도에 절로 아파지는 귀를 매만지던 그때, 옆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심사위원 한 사람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김 작가님은 누구 눈여겨보는 사람 있으세요?"

"저요?"

흰머리가 듬성듬성 엿보이는 초로의 남성. 이래 봬도 청와대에서 주방을 맡다가 정년으로 은퇴했다는 대단한 경력을 가진 박일건 셰프의 물음에 김예일 작가가 잠시 생각을 가다듬곤 말을 이었다.

"이번 참가자 중에서는 한 사람 있긴 한데요."

"그거 참 우연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두 사람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그것이 누군지 알 것 같다며 서로 웃음을 짓는다.

"역시 저 친구네요."

"그렇죠?"

김예일의 눈짓에 박일건이 호응했다.

그녀의 눈짓이 향하는 곳에는 다름 아닌 찬혁의 자리가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두 사람은 서로를 위로한다.

'진짜, 어쩔 수 없는 거라니까.'

안 그래도 현재 등록된 참가자 중 최연소인 것에 더해 이 자리에 모인 참가자 중에선 공적인 유명세가 가장 높은 사람이 제일 앞자리 중앙에서 요리를 하고 있으면 시선이 안 쏠릴래야 쏠리지 않을 수가 없다.

최고, 가장, 제일. 그런 타이틀을 세 개나 붙여놓고 시선을 끌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거야말로 너무한 소리겠지.

물론 썩어도 심사위원인 만큼 그 외에 다른 참가자에게도 시선을 향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혁이 요리하는 모습에는 무언가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저런 걸 저희 업계에선 태가 좋다고 합니다. 왜, 생활의 장인 보시죠? 거기 나오는 사람들 일하는 거 보면 저절로 눈이 가잖아요. 그게 다 머리는 몰라도 눈은 '이야, 저 사람 잘한다.'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깨달아서 그렇죠. 꼭 마음 편안해지는 동영상처럼요."

"…… 용케 그런 걸 다 알고 계시네요."

"요리사가 원래 세상 돌아가는 걸 잘 알아야 하는 직업이라서 말입니다."

늙었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며 짓궂은 웃음을 짓는 박일건에게 그런 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은 김예일이 묻는다.

"그런데 지금 류찬혁 참가자는 뭘 만들고 있는 건가요?"

"글쎄요……."

박일건은 턱을 어루만지며 그 질문에 대한 고찰을 시작했다.

심사가 시작되고 어언 30분이 지났다.

재료를 챙겨가기 무섭게 찬혁은 물에 우유와 소금을 넣고 껍질 벗긴 감자를 삶았다. 여기까지는 크게 대단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다 시작은 비슷했으니까.

"감자를 삶을 때 우유를 넣는 건 왜 그런 건가요?"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감자는 특유의 풋내나 비린내 같은 게 있어요. 삶을 때 우유를 넣어주면 이런 잡내를 아주 간단하고 효과적으로 잡을 수 있죠."

교과서적인 방법이고, 그렇기 때문에 참가자 중 대부분이 그런 방식을 쓴다. 삶아 익히는 방법을 택한 사람이라면 전부 사용했다고 봐도 좋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다음이겠죠."

감자를 끓는 물에 넣어 익히는 동안, 찬혁은 밀가루를 비롯한 온갖 재료를 계량하기 시작했다.

밀가루, 우유, 계란, 버터, 소금, 설탕 등등.

이 정도면 어지간히 문외한인 사람이 아니라면 금방 눈치챌 수 있겠지. 찬혁이 준비하던 것은 바로 베이킹이었다.

"베이킹? 빵을 만든다는 이야긴가요?"

"예. 아마 그럴 겁니다."

'꼭 한식이 아니어도 된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제빵으로 핸들을 꺾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적어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단 한 사람을 빼면 말이다.

스무 명의 참가자들 중, 유일하게 찬혁만이 빵을 준비했다.

'발상의 전환이 빨라.'

그리고 그만큼 손도 빨랐다.

감자를 삶은 찬혁은 지체 없이 잘 익은 감자를 으깬 뒤, 채 식지도 않은 그것을 미리 잘 섞어 반죽한 재료에 넣고 반죽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익은 감자가 뜨겁지도 않다는 듯 묵묵히 반죽을 이어나가는 찬혁. 놀라운 근성이지만, 그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자세다.

도구 없이 빵을 반죽하는 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중노동이다. 가루를 이리저리 뒤섞으며 늘리고, 접고, 누르는 작업의 반복. 그러나 충분한 글루텐이 형성될 때까지 쉬지 않고 반죽을 이어나가는 근성과, 점점 끈기가 늘어나는 반죽을 제멋대로 주무르기 위한 근력은 하루이틀 연습해선 기를 수 없는 것.

그럼에도 찬혁은 마치 모래장난을 하는 아이들 마냥, 오히려 반죽이 너무 재밌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반죽을 이어나갈 뿐이다.

그 모습을 본 박일권이 감탄하듯 외쳤다.

"빵 아라 뽐드테르Pain de pommes de terre! 그걸 만들고 있군요!"

"빠, 빵 아라……?"

생소한 이름이 낯설다는 듯 말을 더듬는 김예일에게 박일권이 설명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감자 빵입니다. 각 나라마다 만드는 방법이 다양한 물건이지만, 그냥 밀가루와 으깬 감자, 거기다 발효 시간을 갖는 걸 보면 미국식 감자 빵이네요. 기존 빵에 비해 아주 부드럽고 은은한 단맛이 일품인 빵입니다."

"오호라."

심사단이 그 선택에 감탄하는 동안, 반죽이 담긴 볼을 통째로 랩으로 감싸 발효를 시작한 찬혁은 바로 다음 행동에 나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찬혁은 이번에도 밀가루와 감자로 다시금 반죽을 시작했다.

"또 반죽?"

"어라라?"

그것에 의문을 품는 심사단이었으나, 찬혁은 지체 없이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다.

마치 엿가락을 뽑는 듯 엄지손가락 정도의 굵기로 반죽을 길게 늘리고는, 그것을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굵기로 썰고는 포크를 사용해 홈을 만드는 찬혁.

"뇨끼! 이번에는 뇨끼를 만드는 거네요!"

파스타 중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식감을 자랑하는 뇨끼는 빵 아라 뽐드테르와 마찬가지로 반죽에 감자를 넣어 만드는 파스타.

"그러고 보니 류찬혁 참가자의 특기는 프렌치와 이탈리안이라고 했었죠?"

"예, 맞습니다. 그 특기를 정면으로 살릴 생각인 것 같네요."

과연 빵 아라 뽐드테르와 뇨끼를 어떤 식으로 사용할 것인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찬혁을 바라보는 박일권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시선을 보내던 김예일은, 언제부턴가 찬혁의 화구에 못 보던 프라이팬 하나가 올라가 있는 것을 눈치챘다.

"어라?"

저건 뭐지? 대체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는지. 아지랑이와 비슷한 기류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아 그만큼 오랜 시간 불 위에서 열을 받았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는 이어서 그 내용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잠시 후, 김예일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내지르고 말았다.

"거, 거품!?"

그녀의 말대로. 프라이팬 속에서는 마치 세제라도 끓이는 것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거품이 쉴 새 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대체 어떤 재료를 어떻게 익혀야 저렇게 거품이 나는 걸까. 그러나 그 수수께끼는 좀처럼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수수께끼를 계속 풀고 있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슬슬 다른 곳도 좀 살펴보는 게 어때요?"

"아, 아. 예. 그래야죠."

너무 찬혁에게만 시선을 쏟고 있던 탓일까. 다른 심사위원에게 빈축을 산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많은 부분에서 궁금한 게 너무나도 많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장담할 수 있을 듯했다.

'기대된다.'

류찬혁. 그가 입만 산 참가자는 아니라는 것. 절로 흐르는 침을 간신히 삼킨 그녀가 아쉬움이 담긴 한숨을 내뱉었다.

***

한 시간, 두 시간. 시침은 속절없이 움직인다.

어느덧 완성품을 낸 사람이 부지기수.

아직도 완성품을 내지 않은 사람은 기껏해야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고, 그중에는 찬혁 또한 껴 있었다.

"좋아. 슬슬 끝내보자."

찬혁이 비로소 끝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1차, 2차 발효를 거쳐 보기 좋은 타원형으로 부푼 반죽을 오븐에서 딱 알맞은 온도로 구운 감자 빵. 빵 아라 뽐드테르를 반으로 갈라 약간의 버터로 코팅한 팬에 토스트.

그리고 감자를 사용한 오믈렛. 스페니쉬 오믈렛을 빵에 딱 알맞을 크기로 자른다.

감자 오믈렛을 사이에 끼운 감자 빵 토스트!

'정도로 끝나면 재미가 없지.'

속으로 씨익 웃음을 지은 찬혁이 앞서 준비한 비장의 재료를 바삭하게 구워진 표면 위로 듬뿍 펴 바른다.

마치 나무껍질처럼 진한 갈색빛이 도는 되직한 소스 위로 스페니쉬 오믈렛을 올린 뒤 감자 빵 뚜껑을 덮어주면, 감자와 감자 사이에 감자가 낀 감자 샌드위치의 완성.

'…… 뭔가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한데.'

핫, 하고 헛웃음을 뱉은 찬혁이 뒤이어 다음 메뉴를 준비한다.

메뉴의 가짓수가 자유라고 한 만큼, 찬혁은 또 다른 메뉴를 고안하고 있었으니까.

시간을 딱 맞춰 삶은 뒤, 표면만 바삭하게 구운 뇨끼 위로 붉은색의 소스를 붓는다.

'나 고춧가루 들어갔어요!'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듯이 맹렬한 붉은색을 자랑하는 소스. 사이사이로 조그마한 감자조각과 모종의 채소, 고기 조각 따위가 엿보이는 소스 위로 파슬리를 살짝 뿌려 색조를 맞춰주면, 매콤한 맛이 일품인 수수께끼 소스로 만든 뇨끼.

두 메뉴를 정갈하게 플레이팅하여 심사단 앞으로 나선 찬혁이 마침내 테이블 위에 그것을 내려놓는다.

"빵 아라 뽐드테르 에그 포테이토 샌드위치와 K-칠리 뇨끼입니다. 한 번 드셔보시죠."

─꿀꺽

그 폭력적일만치 압도적인 '맛있음'을 자부하는 향기에, 심사위원단이 절로 군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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