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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63화 (263/403)

263. 세컨드 시즌, 프리 시즌.-6-

끝나면 데리러 올 테니 꼭 연락하라고 당부하던 선생님의 말을 정중히 거절한 나는 심사장으로 들어섰다.

심사장으로 내정된 건물에는 벌써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여긴 조리사 자격증 시험 때 사용하는 건물이다. 듣기로는 방송사 쪽에서 대관했다나 뭐라나. 아무튼, 하루에만 수백 명의 응시자를 상대로 시험을 치러야 하는 장소이니만큼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이다.

그런 건물의 대기실을 가득 채울 만큼의 인파. 대략 세어서 마흔 정도인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

'설마 이게 다 지원자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었다.

자리에 모인 인원 중 절반가량은 지원자. 나머지 절반은 방송국에서 나온 촬영팀, 그리고 심사위원단에서 각 자리에 배치한 안내원들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대기실을 주시하는 그들의 모습에 묘한 예감을 느낀 것도 잠시.

심사장에 막 도착해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던 나와 눈이 마주친 안내원이 날 향해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지원자신가요?"

"예."

"접수 도와드릴게요. 지원서랑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어요?"

"여기요."

"실례하겠습니다. 어라, 학생증?"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민짜라.

나름 키와 덩치가 있는 편이기에 날 보고 그냥 동안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학생증을 건네자마자 눈에 띄게 놀란 안내원이 간단한 대조 확인 후 지원서와 학생증을 내게 돌려주었다.

"확인 감사드립니다. 심사 과정에 대해 설명이 필요하신가요?"

해주면 나야 땡큐다. 고개를 끄덕이자 안내원이 말을 이었다.

오늘 심사는 2차와 3차를 동시에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오전, 오후. 하루 두 타임으로 나누어 여러 날 동안 심사가 진행된다는데, 어차피 지원자 입장에서는 한 타임에 심사가 끝나기 때문에 딱히 알아도 별 쓸모 있는 정보는 아니다.

'하긴 지원자가 한두 명은 아닐 테니까.'

그거 심사하다가 배 터져 죽을지도 몰라. 지금 편제만 하더라도 아마 심사단은 요 며칠 소화제를 끼고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될 터다.

'뭐, 그건 됐다 치고.'

심사시작 시간을 알려주는 것을 끝으로 자리를 뜬 안내원을 떠나보낸 뒤, 나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이 자리에 모인 요리사들은 전부 1차 서류 심사는 통과한 사람들이다.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경쟁상대라는 뜻.

심지어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만 경쟁상대인 게 아니니 경계해야 할 상대가 말 그대로 차고 넘친다. 골이 아파지는 상황일세 이거.

그래도 뭐 어쩌겠나. 이건 정말 천재일우의 기회다. 회귀 이전에는 없었던 초대형 광고판.

거기에 얼굴 한 번 실을 수 있다면 막말로 목숨 걸린 일만 아니면 뭐든 할 수 있다. 저기서 제대로 활약하느냐 마느냐는 별개로 치더라도, 일단 얼굴은 확실히 알려질 거 아닌가?

현대 사회에서 유명함이란 곧 권력이다.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삶이 편해지거든. 아 근데 악질적으로는 좀 제외하고 말이다. 그건 그것대로 수요가 있긴 하지만, 난 사양이야.

'다른 요리사들도 생각은 다 비슷하겠지.'

뭐, 정말 극한의 확률로 요리 솜씨를 시험해보고 싶다느니 하는 순수한 의도를 가진 참가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TO가 한정된 곳에 같은 목적으로 모인 불특정다수의 사람들.

상황이 이러면 결론은 뭐다? 뭐긴 뭐야 무한경쟁이지.

오늘도 힘겨운 하루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빡세게 든다. 정말, 온 기회를 잡는 것도 못 해먹을 짓이다. 한숨이 입술 사이를 타고 흘러나왔다.

***

심사가 시작할 시간. 안내원이 준 종이 팔찌를 손목에 걸고 필기 시험장으로 쓰이는 공간에 들어섰다. 다를 때 같았으면 다닥다닥 붙은 책상 위에 시험을 보기 위한 컴퓨터가 거슬리는 팬 돌아가는 소음을 내며 후끈한 열기를 뿜고 있었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언제 다 치워놨는지 컴퓨터는커녕 테이블조차 없다. 사무적인 느낌이 강한 실내에 가구마저 의자 말곤 보이지 않으니 사무적인 걸 넘어 무슨 경찰서 취조실 같아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 자리한 다섯 명의 심사관들. 그에 비해 지원자의 수는 열 명. 동시 면접도 정도가 있지 스무 명을 같이 봤다간 사람 얼굴 기억하기도 힘들 거다. 반으로 자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수밖에.

나를 비롯한 참가자가 다 함께 번호대로 자리에 앉았다. 나는 가장 우측. 10번이다.

"심사 전에 자기소개 간단하게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심사관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당연히 시작은 1번인 왼쪽부터. 마치 파도타기를 하는 것 마냥 순서대로 일어서서 자기소개를 하다가, 마침내 내 차례가 됐다.

자리에서 일어서니 내게 쏠리는 시선들. 심사관뿐만 아니라 같은 지원자들의 시선까지 느껴졌다. 어찌나 뚫어져라 보는지 얼굴 가죽이 푹푹 찔리는 느낌이 들 정도. 내가 비교적 철면피인 사람이 아니었다면 좀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하긴…….'

이제 와서 말하기도 뭐하지만, 고등학생이 이런 자리에 있는 게 신기하긴 하지.

덩치가 있어도 어린 티가 안 나는 게 아니니까. 나는 시선을 외면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류찬혁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18세. 성심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습니다. 주 종목은 가리는 것 없이 합니다만, 특기는 프렌치, 이탈리안, 그리고 한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 구겨진다 구겨져.

내가 자기소개를 끝내고 자리에 앉자마자 옆에 있던 지원자들의 매서운 시선이 느껴졌다.

힐끔 눈동자를 굴리니 하나같이 인상이 구겨진 게 살짝 섬뜩하다.

음. 나도 이해는 한다.

18살이라는 말에 놀란 것도 있겠지만, 정작 신경 쓰인 건 그게 아니라 다른 거겠지.

이 상황은 말하자면 아직 고등학교 졸업도 안 한 고교야구 투수가 "전 타자, 투수 안 가리고 둘 다 잘 해요. 아, 근데 특기는 패스트볼이랑 커브, 싱커에요."라고 자기소개를 한 느낌일 것이다.

무슨 뜻이냐고? 참 뭣도 아닌 게 깝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거지.

살짝 시간이 지나니 지원자 중 누군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고, 또 누군가는 가소롭다는 표정이다. 솔직히 내가 저 입장이더라도 반응이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보통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현장직 같은 경우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현장 10년 차 작업반장과 알바 한 달 차 휴학생. 누가 더 믿음직할까? 그래, 말 안 해도 정답이 보인다.

틀딱이니 꼰대니 나이 먹었다고 놀릴진 몰라도 짬이 내는 바이브라는 건 결코 무시할 수가 없거든. 우리 같은 사람은 반 합법적으로 "라떼는 말이야." 같은 소리도 할 수 있다. 과하면 안 되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난 거의 이단이지.'

제대로 현장 업무를 잡아본 적도 없으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나왔을까. 아마 딱 이 생각이지 않을까? 안 봐도 뻔하지 뭐.

내가 저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심사단이 내게 질문을 건넨다.

"굉장히 어리군요. 혹시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예, 물론이죠."

큼큼.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정돈하고 말을 이었다.

"사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계기는 반쯤 우연입니다."

"우연이요?"

"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성심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그런데 저희 학교에 특이한 제도가 하나 있거든요. 대회반이라고."

"대회반! 예. 알죠. 성심고 대회반 하면 엘리트 집합소라고 부르는 곳 아닙니까."

"아하하……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이 대회반에 계속 적을 두고 있으려면 못해도 학기에 한 번은 외부 대회에서 수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2학기 때 참가할 대회를 찾던 중에 이 프로그램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호오. 그럼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유는 수상이력이 목적인가요?"

"물론 아닙니다. 수상하는 것도 제 목표 중 하나지만, 많은 대회 중에서 이 프로그램을 고른 이유는 이력서에 문장 하나 채워 넣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그럼 뭐가 목적인가요."

턱에 손을 얹은 채 묻는 심사관의 눈을 곧게 마주 보며 답했다.

"증명하고 싶습니다."

"증명이요?"

"예. 제가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 어디가 제 한계인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남들보다는 나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어요.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은 전 세계 최고의 셰프들이 자웅을 겨루러 오는 곳인 만큼 이런 기회는 다신 없을 것 같단 생각에 지원했습니다."

뭐, 반쯤은 구라지만, 반대로 말하면 반은 진심이다.

사람이 무슨 바보도 아니고, 홍보를 할 거면 잘 하는 모습을 홍보해야지 못한 걸 홍보하면 안 되지 않겠는가.

거기다가 어설프게 잘하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러니 이 선택지를 고른 거다. 내가 정말 온 힘을 다해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상대와 최선을 다해 접전을 펼치는 모습을 가장 많은 사람한테 보여줄 이 기회를.

"그렇다는 건, 어지간한 국내대회 수준은 자신한테 맞지 않는다는 건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사실이 그런걸.

애당초 대회라는 것 자체가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요리사의 전유물 취급을 받는 일이 많다. 수상하면 경력이 되니까. 자기 업장 잘 차려서 장사 잘 하는 사람이 대회 나오는 거 봤나? 그런 셰프는 홍보 때문에 방송을 나갈지언정 대회 같은 곳은 잘 나가지 않는다.

내가 그런 탑티어 셰프 수준이라는 건 아니지만, 대회라는 걸 딱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자리를 잡을만한 실력이 있단 건 사실이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회귀 전 내 커리어도 정상은 아니었지 않은가.

타 참가자와 경험의 차이, 실력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는 경기에 나가봐야 재미도 별로 없고, 이득도 크지 않다.

적어도 푸드 엑스포처럼 세계적인 요리인의 축제 수준은 되어야 긴장감이라는 게 좀 생기지.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이 녀석은 분명 푸드 엑스포 이상의 반항을 몰고 폭풍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난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이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잘 들었습니다. 부디 실전에서도 그 생각이 틀린 게 아니었단 걸 보여주셨으면 하네요."

아무렴. 당연하지.

나는 걱정 말라는 듯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다른 지원자들의 매서운 시선은 여전히 날 향해 뚫어져라 날아오고 있었다.

***

'뭐? 한계를 증명해? 국내대회는 자기 수준에 안 맞는다고?'

건방진 새끼.

선발로 인적 심사를 본 열 명의 지원자 중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던 곽지우는 바깥으로 차마 꺼내지 못할 욕설을 속으로 삭였다.

적당한 대학의 호텔조리과를 졸업하고 약 10년. 30대가 꺾인 그는 현재 호텔의 주방에서 나름 수셰프로 통하는 인재였다.

그렇다고 해봐야 이름이 많이 알려진 것도 아닌 이류 호텔이긴 했지만, 자가 주방을 가진 호텔이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나잇대에 찾아보기 힘든 수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 생애를 이류호텔의 수셰프 따위로 끝마칠 생각은 없었다.

조금 더 나은 호텔로, 조금 더 높은 지위로.

그에게도 그런 야망이 있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일에 치이느라 사회 초년생들보다는 훨씬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내세울 것이 없는 곽지우를 받아주겠다는 일류 호텔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받아주겠다는 곳은 현재의 지위를 포기하고 거의 막내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고자, 한 계단이라도 더 성공하고자 힘든 몸을 이끌고 연이어 국내대회에 참여했고. 가끔은 수상도 하고, 어떨 땐 패배의 고배도 마시며 높은 경사를 기어 올라가는 기분으로 간신히 지금의 위치에 왔다.

그렇기에 찬혁의 말에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나이의 반도 먹지 않은 꼬마가 세상 물정도 모르고 까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후, 진정하자."

그래봤자 결국 꼬마의 헛소리.

요리사의 가치란 결국 실무에서 정해지는 것.

아무리 대단한 학교를 다니든, 어떤 연습을 했든 세월의 차이는 이길 수 없다.

실무 경력만 10년을 넘는 자신보다 뛰어날 리 없다.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울상을 지을 찬혁의 몰골을 상상하며, 곽지우는 이를 갈았다.

실기 심사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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