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62화 (262/403)

262. 세컨드 시즌, 프리 시즌.-5-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은 까놓고 말해서 단순한 TV쇼에 불과하다.

어딘가 요리 전문 기관에서 주관한 프로그램도 아니니 출신은 나가리.

그렇다고 공신력이 생길 정도로 오랜 기간 방송해온 프로그램인 것도 아니다.

쉽게 말해 근본이 없다. 그게 이 프로그램에 대한 대중의 냉정한 평가였다.

근본. 말은 간단하고 간간이 유머로 쓰이는 말이기는 하나 그 두 음절 단어가 품은 뜻은 상상 이상으로 방대하다.

만약 누군가 길거리를 걷다 홍대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사람을 보고, "이야, 저 친구 정말 노래 잘 부른다. 저 사람은 앞으로 크게 성공할 거다."라고 말했다 치자.

그 누군가가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차트 1위를 밥 먹듯이 하는 세계적인 가수라면? 그다음 날부터 버스킹을 하던 사람은 일약 벼락스타가 되어 있겠지.

근본이라 함은 바꿔 말하자면 믿음에 대한 담보다.

'이런 담보가 있으면 이만한 신뢰를 주어도 괜찮겠지'라는 프로세스를 정립시키는 도구.

담보 없이 목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근거 없이 믿음을 주는 사람도 없다.

있다면 그건 사기꾼이다.

근본이 없다면 시청자에게 이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 힘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총괄 제작팀의 결론은 간단했다.

"돈만 있으면 세상에 안 되는 게 없습니다. 안 되는 건 전부 돈이 부족해서 그런 거예요."

그 말대로, 제작팀은 그런 근본마저 외부에서 수혈해내는 기염을 토했다.

미식이라는 부문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입지를 가진 두 회사.

'미쉐리 스타'로 유명한 연간 잡지. 미쉐리 가이드북을 출간하는 프랑스 소재의 회사 미쉐리.

'베스트 레스토랑'이라는 이름의 어워드로 세계 미식인의 사랑을 받는 아시아의 더 베스트.

'포보스 선정'이라는 밈으로 유명한 미국 최고最古의 여행 가이드. 포보스 트라벨 가이드.

일반인이라 한들 이름만 들어도 '아, 걔네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라인업.

제작팀은 그들을 정식으로 초청하여 프로그램의 심사원으로 발탁한 것이다.

"근본이 없으면 옮겨 심으면 되는 것 아니냐."라는 간단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행보에 각국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저쪽이 저렇게 나오면 우리도 준비 단단히 해야겠다."

그리고 그 준비 중 하나가 바로 참가자 선발 과정이었다.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프로나 평론가, 그 외 여러 단체의 협조로 만들어진 간이위원회는 프로그램의 제작팀과 발을 맞춰 까다로운 심사 과정을 통해 참가자를 선출했다.

이것이 시즌1 때의 이야기.

그때 만들어진 간이위원회를 전신前身 삼아 시즌2와 함께 부활한 것이 바로 현재의 심사단이다.

물론 이 심사단이 하는 업무는 그때 이상으로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변화했고, 합격 기준 또한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세계라는 무대에 나가도 꿇리지 않는 인물에게 참가자 자격을 주는 것.

그것을 위한 심사이고, 그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다.

오직 그 목적을 위해 기계처럼 냉철한 평가를 망설이지 않는 심사단. 하지만 그런 그들이라고 해도 당황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고등학생?"

"예. 지원서 1차 검토하다가 찾았는데요."

찬혁이 지원서를 제출하고 약 일주일 뒤, 시즌2의 일정이 세간에 공개되면서 엄청난 수의 셰프가 지원의사를 밝혔다.

특히 이번에 새로 알려진 조건 덕에 그 수가 시즌1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늘어난 상황.

지원자가 늘어났다는 건 곧 심사단의 일거리가 늘어났다는 말과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늘어난 참가자 중에서도 고등학생이란 나이는 분명 대단히 눈에 띄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장난으로 지원서를 넣는 사람들도 제법 있기에, 이번에도 그런 경우겠지 싶었다.

"거 진짜. 벌써 몇 번째야? 그런 거 나오면 알아서 파기하래도."

"아니 근데 이번엔 경우가 좀 달라요."

"달라? 뭐가?"

"그게, 성심고 학생이에요."

과연. 경우가 다르다는 건 분명 맞는 말이었다.

성심고등학교. 업계 종사자라면 모르는 게 더 힘든 이름이며, 심사단에게는 특히나 감회가 깊다. 이전 시즌의 최고 스타를 배출한 학교이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들은 그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성심고? 설마 안효민이야?"

"아뇨. 그건 아닌데요."

돌아온 부정에 남자의 얼굴에 실망감이 차올랐다.

"뭐야. 안효민도 아닌데 부른 거야?"

"한 번 보셔야 하긴 할 것 같아서요."

"고등학생이 볼 게 뭐가 있다고…… 응?"

심사단에서는 다양한 사항을 고려한 뒤에 예선전에 나갈 참가자를 선발하지만, 그중 가장 먼저 체크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경력과 수상 이력이다.

세계무대에서 실력을 뽐낼 수 있는 기량이 있는 요리사라면 이미 다양한 부문에서 두각을 보였을 터. 보통 그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그 두 가지였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특이하다.

경력이 적은 수준을 넘어 아예 텅텅 빈 공란.

수상 이력 또한 고작해야 네 줄로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스케일이 어마무시하다.

국내대회 세 개 우승, 해외에서 동상. 두 번은 청소년 대회지만, 다른 두 번은 성인들도 참가하는 상당한 규모의 대회다.

남자는 그것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이력서를 더욱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류찬혁? 잠깐만. 설마 그 류찬혁이야?"

근래 들어 업계인 사이에선 찬혁의 이름이 제법 널리 알려졌다. 계기는 물론 차은욱과 얽힌 사건이다.

여러모로 적이 많은 차은욱에게 한 방 시원하게 먹여준 것 덕분인지 업계인 사이에서도 찬혁의 유명세는 점차 늘어났다. 무익하게만 보였던 싸움에도 득은 있었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이에요?"

"모르는 게 이상하지. 소식통 좀 열고 살아라."

지원서를 돌려 본 두 사람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경력은 볼 게 없지만, 수상 이력이라면 충실한 지원자. 이걸 통과시켜도 괜찮을까. 괜히 특혜 같은 소리를 듣는 건 아닐까.

'그냥 묻기엔 수상 이력이 너무 빵빵하단 말이지.'

무엇보다 캐릭터가 재밌다. 이런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 방송에 나오면 얼마나 흥미로울지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방송이란 게 실력도 실력이지만 일단 보는 재미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일단 올려보자."

"괜찮을까요? 저번에도 역풍 장난 아니었잖아요."

"뭐. 떨어질 거면 실기 테스트든 예선전 본편에서든 떨어지겠지. 그냥 거르기는 아깝잖아. 이렇게 유니크한 캐릭터를. 그리고 혹시 알아? 얘가 이번 시즌의 안효민이 될지."

"에이. 신기한 것도 한두 번이지 설마 그런 고등학생이 또 있겠어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 모르냐. 일단 올려."

"옙."

찬혁의 지원서 중심에 큼지막한 도장이 찍힌다.

컴퓨터로 인쇄한 것처럼 반듯하게 박힌 문구.

붉은 인주로 찍힌 PASS라는 문자가 중심에 박힌 지원서가 그들의 책상 한쪽을 차지한 종이 다발 위에 자리했다.

***

서류 심사에 합격했다.

그 이야기에 내가 참가할 생각이란 걸 알고 있던 친구들이 날 응원해줬다.

"아이고, 그래. 부디 잘 하길 비마. 명복도 같이 빌어줄까?"

"니 거 나가가 깨지믄 우리만 망신살 뻗치는 거 아이가? 정신 단디 차리라."

"힘내."

아니, 응원이야 이거? 현주 말고는 응원이 아니지 않나?

인상을 절로 찌푸리게 만드는 응원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소리에 귀가 따가웠지만 당장은 연습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서류 심사에 합격했다는 건 남은 심사 결과에 따라 정말로 예선전에 출전할 수도 있다는 뜻이니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나보다는 내 주변이 더 난리법석이었다.

"류찬혁 학생. 오늘은 다양한 상황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파스타 반죽을 알려주죠."

"류찬혁.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와라."

"찬혁아. 혹시 자습시간 필요하지 않니? 출석은 인정해줄 테니 실기 연습하러 빠져도 괜찮은데."

괜찮습니다. 진짜 괜찮습니다. 그냥 가만히 놔둬 주세요.

내가 무슨 당장 본선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예선전을 나갈까 말까 하는 상황에 다들 관심이 너무 많다.

'아니, 대체 어디서 이야기가 샌 거야?'

서류 심사 합격 소식이 내게 온 건 기껏해야 며칠 전이었다. 그런데 온 학교의 선생님들에 더해 애들까지 전부 내가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에 나가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막말로 이러다가 예선전에 참가도 못 하고 떨어지면 무슨 꼴을 보라고. 상상하니 무서워서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다.

부담감에 질려 버린 날 보며 백예은이 지나가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봤을 때 혁이 넌 천부적인 관종의 재능이 있어."

"시끄러."

그런 거에도 재능이 있냐. 뭐 관심받길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기라도 하나?

…… 백예은 얘는 진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점이 좀 무서운데.

아무튼, 관심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아주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2학년이 되면서 좀처럼 따로 만나 뵙기 힘들어진 선생님들이나, 아니면 3학년을 돌보느라 바쁘신 선생님들도 종종 자발적으로 연습을 도와주러 찾아오셨다.

덕분에 이거저거 배운 게 많다.

현장에서 급할 때 쓰기 좋은 임기응변식 꼼수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조리법.

인젝션이나 분자요리 같은 최신조리기법 같은 고차원적 요리에 대한 경험도 했다.

'덕분에 머리는 터질 것 같지만.'

내 시대에도 분자요리는 아직 개척이 많이 진행되지 않은 실험적인 장르였기에 개인이 하는 파인다이닝이 아니면 쉽게 찾아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어떻게 된 게 더 좋은 장비가 개발되고 밝혀지는 이론이 늘어날수록 더 어려워지기만 하는 요리라니. 이렇게 불합리한 장르가 또 있을까.

"찬혁이 너 이해 엄청 빠르다! 정말 처음 배운 거야? 이만큼 하려면 석 달은 배워야 하는데!"

아니, 그거 제가 일 년 내내 독학했는데도 흉내도 못 내고 있던 거예요. 가르치시는 기술이 참 대단하십니다. 진심으로.

그 외에도 선생님 여럿이 나 혼자를 집중적으로 가르칠 때도 있었고, 몇 번은 말 그대로 밤새 연습하다가 선생님과 출근, 등교를 함께 한 적도 있었다.

"음. 이 나이에 밤샘을 하려니 슬슬 힘에 부치네요."

"…… 그냥 들어가셔도 괜찮다니까요."

그래. 그게 하필 교장 선생님만 아니었다면 더 괜찮…… 지는 않았겠네.

계속 긴장하고 있느라 피로가 아주 그냥 싹 가시는 기분이 최고였다. 아주 그냥 천연 바카스가 따로 없어.

그렇게 하루하루, 마치 시한부 인생이라도 사는 사람처럼 24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가며 알뜰살뜰 사용하다 보니, 어느새 D-Day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지점에 도달했다.

"이제 한 주 남았나."

뭐, D-Day라고 해봤자 실기 심사가 있는 날이지만.

예선전 로스터에 내 이름을 올리기 위한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하면 조금 위가 쓰라렸지만, 반대로 오히려 이게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부담감이 줄어드는…… 기분이 들 리가 있나. 똑같이 속만 쓰리다.

그쯤 되니 학교는 거의 영화관이나 음악회장 같은 분위기가 됐다. 내가 집중하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은 눈치다.

…… 솔직히 그러니까 내 쪽이 더 눈치가 보였다. 괜히 내가 다른 애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기분이라.

'제발 빨리 좀 가라.'

그 기도가 통했는지 어쨌는지, 남은 한 주의 시간은 금방 지나갔고.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

이제 막 해가 떠오르는 아침.

나는 학교에서 붙여준 선생님의 차에 타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긴장하지 말고! 연습한 대로만 하면 분명 잘 될 거야!"

진짜 슬슬 그만해주면 안 될까. 기대가 과해서 짓눌려 죽겠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야.

정말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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