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세컨드 시즌, 프리 시즌.-4-
"…… 음, 그건 힘들 것 같군요."
안영길은 방송사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 한 번만 재고해주실 수는……."
"안 되죠."
"앗, 옙."
작두처럼 단호하게 말을 끊는 안영길의 대답에 방송국의 협상가로 나선 남자, 신지역이 헛숨을 들이켰다.
너무도 단호박 그 자체인 태도. 신지역은 직감했다.
'아, 이거 안 되겠다.'
뜻이 완고하다. 그야말로 철옹성이다.
그러나 이건 안영길로서는 당연한 것이다.
애당초 본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안영길이 멋대로 참가를 결정할 수도 없는 데다가, 뭣보다 아직 찬혁은 시청자들에게 그 자질을 인정받지 못했다.
물론 찬혁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안영길 본인이 가장 잘 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안영길을 비롯한 찬혁의 주변인 몇 사람만이 아는 것일 뿐, 대다수의 시청자에겐 기대할 수 없는 이야기다.
손녀인 안효민 또한 그 때문에 어마어마한 욕을 들어먹지 않았던가. 나중에 제대로 실력을 드러낸 뒤에야 그것이 그대로 인기로 반전됐으나, 안영길은 한창 욕을 듣던 시절의 안효민이 sns 따위의 매체를 역겨워하는 수준으로 싫어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이다. 똑같은 일을 반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미성년자 요리사를 대표로 내세웠다간…….'
안효민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찬혁은 유명세가 나름 알려진 편이기도 했고, 시청자들 또한 시즌1 때 배운 것을 바탕으로 조금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좋겠지만, 본래 기대가 크면 그만큼 실망 또한 커지는 법이다.
막무가내로 그를 대표단에 꽂아 넣기에는 애로사항이 너무 많다.
"그 대신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방송사의 요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의 이야기.
방식을 다르게 한다면 찬혁의 참가를 종용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
대답 대신 제안이 되돌아오자 깜짝 놀란 고양이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신지역은 이어지는 안영길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나서는 자리지 않습니까. 이미 국가대표나 다름없는 자리지요."
"아, 예. 그렇죠."
맞는 말이다. 신지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안효민이 욕을 먹은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가 실력이 채 검증되지도 않은 어린 학생을 국가대표로 내세웠다는 것이지 않았나. 공식적인 자리라고 보기는 애매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한없이 공식적인 국가대항전에 가까운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이들은 말하자면 국가대표 셰프인 셈이다.
"자고로 국가를 대표하려면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씀은 설마……."
"대표 선발전을 열어봅시다. 공개적으로. 시즌 2 본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내보낼 프리 시즌 방송으로 말입니다."
신지역이 속으로 기함을 터트렸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아니, 오히려 정말 좋은 아이디어일지도 모른다.
예선전을 방송하는 겸 본방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자연스레 참가자들에 대한 드라마를 조성할 수 있다.
방송이란 곧 몰입이다. 시청자가 얼마나 몰입할 수 있느냐에 따라 성적이 좌지우지되며, 이 예선전은 시청자가 참가자에게 몰입할 수 있는 여건과 시간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겠지.
놓치고 싶지 않은 제안. 직감이 반드시 붙잡으라며 경종을 울린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 큰 문제가 있다.
'어, 어떻게 하지……!?'
신지역에게는 이 자리에서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만, 고작? 출연자 몇 명 섭외하러 와서 편수를 늘릴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을까.
방송사에도 스케줄이라는 것이 있다. 갑자기 애먼 프로그램이 끼어들면 시간을 맞추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닐 것이다.
'거기다 편수가 늘어나면 그걸 촬영할 비용이 땅에서 솟는 것도 아니잖아.'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문제다.
잠시 후, 신지역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저어 거부의 의사를 표시했다.
"그건 제가 정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해당 사안에 대해선 본사에서 협의 후에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네요."
"그래요. 그렇겠죠. 이해합니다."
그 답변을 예상했다는 듯 안영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잘 전달해주셨으면 하네요. 좋은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예에……."
신지역은 순순히 자신을 보내주는 안영길의 태도에 기쁨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아마 이 제안이 통과될 확률은 매우 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영길이 말을 덧붙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 하나만 더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이번에 드린 제안 말입니다만, 혹시 그쪽에서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면 재단 차원의 투자와 촬영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을 아주 싼 값에 소개해드리는 걸 긍정적으로 고려하도록 하겠습니다."
"…… 예?"
파격, 파격, 파격. 그런 단어가 신지역의 머리를 무수히 메아리친다.
지금 뭐라고 했지? 투자? 로케 협조? 제일 골치 아픈 문제 두 개가 이렇게 간단하게 된다고?
'이, 이건……!'
차려진 밥상이다. 못 먹으면 병신이다.
"제, 제가! 제가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상부에서 허가를 받아오겠습니다! 부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어떻게든!"
회사에 입사해 머리털 빠지고 처음 만난 최고의 기회. 신지역의 눈이 형형히 빛났다.
지금으로부터 약 반년 전의 일이다.
***
결과적으로, 안영길의 제안은 그가 당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큰 반항을 몰고 왔다.
국내의 방송국에서 해당 사항을 진지하게 검토하여 받아들인 것은 물론이요, 해외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뭐? 한국에선 아예 예선전부터 시작할 거라고?"
"자기네 셰프 중에 고르고 골라서 진짜만 내보낼 거라는 소리잖아."
"우리도 좀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번에도 우승 뺏기면 나라 망신이다. 세계 최고의 요리대국이란 이름이 아까워!"
"예선 기획해! 홍보도 되고 개인분량도 챙길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어디서 돈 냄새를 맡은 건지, 줄곧 침묵을 고수하던 웹플릭스가 갑자기 판에 뛰어들어 생뚱맞은 주장을 펼쳤다.
"아, 그럼 우리 예선전 판권만 좀 주면 안 됩니까? 어차피 자국 예선전은 자국에서만 방송할 건데, 기왕 홍보하는 거 우리가 도와줄게. 응? 자막처리 같은 귀찮은 것도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요컨대 거의 생방송 스케줄로 진행될 본선은 포기하고 귀찮은 일을 도맡는 겸 홍보도 철저하게 해줄 테니 싼값에 예선전 수출 판권을 넘겨달라는 뜻이었다.
사실, 각국 입장에서는 크게 언짢은 제안도 아니었다. 어차피 내수용 방송으로 끝났을 예선전으로 부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된 거로구만."
찬혁이 질렸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에, 여기까지 이해관계가 배배 꼬인 방송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각국의 방송국, 셰프, 웹플릭스.
이 정도면 거의 접시가 수십 쌍이 달린 저울이다. 어디 한 곳에만 조금 더 무게가 쏠려도 단박에 난장판이 되든가, 아니면 뒤집어 엎어지든가. 그 2택 밖에 없는 상황에서 용케 균형을 잡은 작금의 상황에 골이 아플 지경이었다.
예선전의 녹화 시작은 대략 10월 후반으로 잡혔다던 안영길의 말을 되새긴 찬혁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녹화는 그때 시작한다지만…….'
참가등록은 적어도 시작 한 달 이전에 해야 한다.
참가자는 1차 서류 심사, 2차 인적 검사, 3차 실전 측정이란 세 단계를 거쳐 비로소 녹화장에 얼굴이나마 비출 권리를 가질 수 있다던가.
상상 이상으로 빡센 절차에 찬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할 수 있을까."
단순한 우승상금만 수천만. 정말 우승했을 시 부산물 격으로 들어올 것에 비하면 그마저도 적다.
그야말로 세계적인 관심이 쏠린 자리. 심사를 앞둔 참가요청은 말 그대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을 것이다. 전국팔도에 소재한 조금이라도 이름 있는 요리사란 요리사는 전부 몰리겠지.
최종 선발되는 인원은 대략 여섯.
못해도 수백 단위의 셰프 틈바구니에서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살아남아 선발 명단에 제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
많고 많은 의구심 사이에서 그런 불안감이 여름철 장마 구름 몰려오듯 찬혁의 마음을 뒤덮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찬혁이 게슴츠레한 시선을 내리깐다.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한다."
그렇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언젠가 자신을 보며 저도 그리 될 수 있을까 묻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찬혁의 뇌리를 스쳤다.
지금이다. 지금이 바로 행동할 때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살짝 풀린 다리에 피가 돌고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기회는 왔고, 마음은 확고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다.
찬혁은 예선전 지원서를 제출했다. 아직 같은 대회반 아이들에게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은 시점이었으나. 그 결정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끝끝내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
"일단 신청서를 넣은 건 좋은데 말이야……."
당장 할 게 없다. 아니, 연습을 하라면 하는 거겠지만 그 공백을 메울 무언가가 없다는 뜻이다.
제작진 측에서 신청서를 검토하고 1차 지원 합격 여부를 알려주는 데에 약 한 달. 2차, 3차 면접으로 대충 방송 분량을 뽑으면 아마 거기서 또 한 달은 지난 다음이겠지.
녹화 예정일이 약 두 달 뒤인 걸 생각하면 굉장히 빠듯한 일정이다.
'근데 그것도 제작진 입장에서나 빠듯한 거지.'
나한테 대입하면 그런 것도 없지 않은가. 정작 내가 하는 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뿐이다. 뭐, 요즘에야 핸드폰이라는 놈이 지구 어디에 있든 인터넷만 통하면 소식을 알려주니 나야 내 할 일을 하면서 기다리면 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행인 게 있다면 나는 할 일이 없어서 곤란한 사람은 아니라는 거지.
"…… 아니, 잠깐. 이거 다행인 건가?"
일이 많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고딩이 있다? 뿌슝빠슝?
부장이 된 지 이제 약 2주가 지난 무렵이지만 속으로는 간단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부장 역할도 의외로 귀찮은 부분이 많았다.
특히 대회에 참가하는 대회반 부원들의 스케줄 관리나 신고 같은 걸 이래저래 도와주다 보니 은근히 신경 쓸 게 많다.
그 대신 부원들과의 거리감은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었기에 마냥 귀찮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능 및 졸업 작품 준비를 위해 반쯤 대회반을 떠난 3학년을 제외한 1, 2학년 아홉 사람의 뒷수발은 피곤한 부분이 있다.
그런 식으로 대회반 관리며 내 개인적인 학업과 시합에 대비한 연습에도 열중하다 보니,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시간이 흘러 약 한 달.
오늘도 밤늦게까지 연습하는 부원들을 위해 부실을 관리하는 겸, 내 개인적인 연습을 마치고 저녁 늦게 기숙사로 돌아오니 김철정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부른다.
"어, 왔다. 야, 너 편지 왔더라."
"편지?"
요즘 시대에 편지가 온대 봐야 대부분은 공문서다.
학생한테 올 공문서가 뭐가 있겠냐 싶었지만, 보면 알겠지 싶어 녀석이 건네준 봉투를 받아들어 살핀 나는 이윽고 살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 지원자 통보서.
근래 들어 바빴던 탓에 잠깐 깜빡했던 소식이, 한 달의 시간을 넘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