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59화 (259/403)

259. 세컨드 시즌, 프리 시즌.-2-

신학기가 돌아왔다.

꽤 길게 느껴진 방학 덕분에 나도 모르게 깜빡 잊고 있었지만, 신학기라는 건 기본적으로 만민에게 바쁜 시기다.

선생님들은 애들 과제 검사하랴 재무 표 검사하랴 학습계획서 작성하랴 업무가 산더미고, 학생 같은 경우도 교사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할 일이 많다.

멀리서 찾아볼 거 없이 나만 봐도 알 수 있지.

개학하고 첫 주, 내가 한 일을 대략 리스트로 만들면 아래와 같다.

방학 동안 먼지가 쌓인 기숙사 대청소.

1학기 수강 과목 과제 제출 및 성적 이의 신청.

2학기 과목 수강신청.

그나마도 특히 힘들거나 숨 가쁘게 뛰어다녀야 했던 것만 얼추 고른 거지 실제로 한 일은 저거보다 조금 더 많았다.

교실 청소라거나, 실습실 청소라거나, 부실 청소라거나. 그 외에도 기타 등등…….

'뭐, 사실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니긴 한데.'

어차피 우리 학교의 청소 대부분은 자체적으로 계약한 청소 업체가 주기적으로 맡아서 해준다. 애당초 수백 명의 학생이 매일같이 하루 종일 써대는 주방을 위생검열에 걸리지 않을 수준으로 청소하려면 수업 후에 남는 자투리 시간만 갖고는 시간이 너무 모자라니까.

돈이 왜 좋은지 아는가? 사람의 편의라는 건 돈의 절대량에 비례하는 법이거든.

돈이 많으면 편리하다. 그러므로 수많은 요리학교 중에서도 악랄한 학비를 자랑하는 이 부유한 성심고 또한 학생에게는 편리한 공간이다. 부모님 등골이 엄청 휜다는 것만 빼면.

뭐? 난 장학금 받고 다니지 않냐고?

아 꼬우면 요리를 잘하시던가요.

"…… 으흠흠."

이런 이야기는 속으로만 하자, 속으로만.

뭐, 아무튼.

개학 후 첫 일주일을 그렇게 꼬랑지에 불붙은 말처럼 정신없이 달리고 나니, 방학 동안 쉰 게 무색하게도 우리는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2학년은 다른 두 학년에 비해 가장 나은 상황이라는 게 유머라면 유멀까.

1학년은 아마 입학 후 첫 번째 고비가 될 지옥주가 슬슬 시작될 참이고, 3학년은 당장 코앞까지 다가왔다고 봐도 무방한 수능을 대비하여 자체적인 크런치 모드에 들어갔다.

하교해서 기숙사로 들어가 씻고 저녁 먹고 청소하러 잠깐 나왔을 때였나, 어쩌다 기숙사에서 엿본 학교에는 여전히 불이 훤했다. 주로 3학년과 교사가 사용하는 층이 말이다.

내가 안 오는 게 이상했는지 베란다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김철정이 나를 부른다.

"야! 뭐해? 아직 분리수거 덜 끝났어? 벌써 아홉 시 다 됐어. 얼른 들어와."

"어, 지금 가."

묘하게 기시감이 드는 상황 속, 나는 제 몸을 불살라 야경으로 승화한 선생님들과 선배들의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봤다.

"내년엔 저기에 내가 있다 그거지."

거 참. 미묘하게 뒤숭숭한 기분이다. 시간의 흐름이 체감됐다고 할까.

영문을 모를 이유로 시간을 거스른 지 어언 1년하고도 반이 지났다.

이전과 비교하면 많은 것이 변했다.

사장님, 가족, 외가, 친구, 동료, 스승.

그리고 나 자신.

"……."

가만히 손을 내려다봤다. 처음 기숙사에서 눈을 뜨고 기절한 뒤, 보건실에서 정신을 차린 뒤에야 보았던 내 손은 제법 매끈매끈했다.

뭐, 당연히 물 한 방울 안 묻힌 고운 손은 아니었지만, 굳은살 가득한 중년의 흉터 가득한 손과 비교하면 아기 피부나 마찬가지다. 그다지 고생다운 고생은 하지 않은 몸이었다는 뜻이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회귀 전의 그때와 비교해도 결코 꿇리지 않는다. 요 400일 남짓한 시간의 밀도가 이전 삶에 뒤지지 않는다는, 그런 얕은 자신감이 솟았다.

아니, 자신감이라기보다는 확신이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운동선수가 어제보다 빠르게 달리고, 어제보다 멀리 뛸 수 있게 됐단 걸 체감하는 것처럼, 나도 이전보다 더욱 정교하고도 재빠른 손기술과 폭넓은 지식을 익혔다.

객관적인 수치를 굳이 비교하자면 지금의 난 신의 탑에 올라가 초신수를 빨고 내려온 상태와도 같다. 학도사 수준은 간단하게 컷 할 수 있다 이 말…….

"…… 하아, 그만두자."

나 태어나기도 전에 완결 난 만화 이야기를 해서 뭣하나. 그런 것치곤 아직도 외전이 연재되고 있지만.

늦여름, 초가을의 저녁 9시. 사람이 센티멘탈하게 변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그래, 전부 그것 때문이다.

그렇게 자조하며, 나는 쓰레기통을 들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섰다.

***

2학기가 되어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일어난 학교생활. 변화의 바람은 평범한 교사와 학생을 넘어 이곳, 대회반까지 그 숨결을 불어넣었다.

"첫날 빼고 코빼기도 안 비치시네, 너네 누나."

"그러게."

"아니, 그러게가 뭐야. 신경 좀 써주지 그러냐."

"엄마가 알아서 챙겨주고 있어."

안효민 선배도 3학년인 만큼, 아니, 3학년이면서 또한 대회반의 주축 중 한 사람이기에 여타 학생들보다 바깥으로 드러나는 비중이 많다.

요리로도, 면학으로도 우수한 면모를 보여줘야만 하는 책임이 있기에 평범한 학생들보다야 훨씬 바쁜 게 당연하다.

거기다 단순한 점수 외에도 진학 등을 생각하면 면학에 가장 힘써야 할 시기는 바로 지금.

효민 선배나 다른 3학년들이 쉬이 부실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그래서 나도 정식으로 부장으로 승급한 거고.'

당연한 일이지. 수능을 앞둔 고3한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많지 않다. 아무리 대회반이라 해도 부 활동을 관리하는 데에 쓸 만큼 시간이 남아돌지 않으니, 자연스레 관리 책임은 나에게 돌아온다.

'귀찮긴 한데…….'

뭐, 어쩌겠어. 내가 대회반에서 뽑아먹은 게 한두 푼도 아니고.

어차피 내가 하는 일이 그렇게 대단한 일인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여태껏 해왔던 일에 +α로 몇 가지 사소한 잔업이 추가되는 정도?

이 정도야 호텔에서 일할 때 애들 관리하던 걸 생각하면 크게 힘들 것도 없었다.

그런 나의 첫 업무가 바로 이것.

"출장 대회 목록이라."

2학기 때 참가 가능한 대회를 알아보고 부원들에게 공지해주는 것.

기본적으로 대회반은 몇몇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부원이 어느 대회에 참가하든 지원은 해줘도 터치는 하지 않는다. 연습 정도야 어느 선생님을 찾아가든 시간만 남으면 잘 봐주시고, 출석 부분도 서류 보고만 잘 올라가면 알아서 처리해주시니 우리는 정말 요리만 잘하면 장땡이라는 거다.

하지만 아무리 대회 참가가 개인 재량이라도 어디서 언제 무슨 대회가 열리는지를 알아야 참가를 하든 말든 할 거 아닌가. 거기서 바로 내 차례가 온다.

선생님을 통해 받은 자료를 꼽아 전달하는 게 전부긴 해도, 각 아이들의 수준이나 특기에 맞춰 대회를 추천할 수 있는 재량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전에 정말 괜찮을지 선생님들하고 먼저 상의를 하긴 해야 하지만.

내가 지금 교장실을 찾은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저번 학폭 연루 사건 이후 처음으로 들어오는 교장실. 새삼스레 긴장감을 느끼며 문을 열고 들어가니 교장선생님이 응접용 소파에서 일어나 나를 반기신다.

"아, 왔군요. 어서 와요."

"실례하겠습니다."

미리 준비하고 계셨던 건지, 내가 앉을 자리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을 내려두신 교장선생님이 소파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자, 앉아요."

"예."

털썩. 소파의 고급스러운 푹신함과 안락감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가구 좋은 것 봐. 혹시 쓰레기로 버려주지 않으려나. 그럼 용달차를 불러와서라도 집어갈 텐데.

그런 쓰잘데기없는 상상을 하며 교장선생님이 권한 홍차를 한 모금 머금은 그때, 교장선생님이 입을 여셨다.

"방학 때엔 또 제법 큰 사고를 쳤네요."

"풉!"

무, 뭐라고 하셨습니까?

시작부터 튀어나온 예상하지 못한 화제에 사래가 들린 나머지 홍차를 뿜어내고 격하게 기침하는 나를 보며 교장선생님은 영문 모를 미소를 지으시더니, 휴지를 뽑아 내게 건네주셨다.

"받아요."

"가, 감사합니다."

그 와중에 어떻게든 고개를 틀어 다른 방향으로 분수를 뿜긴 했지만, 덕분에 응접용 테이블이 엉망이다.

휴지로 입과 테이블을 닦고 있으려니 교장선생님이 이어서 말씀하셨다.

"반응을 보니 잘못을 했단 인식은 잡힌 것 같네요."

"아, 예……."

"다행이에요. 난 또 찬혁 학생이 좋아하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아니, 당시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걸 굳이 입 바깥으로 꺼낼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저, 그게……."

"찬혁 학생이라면 요리사가, 아니 그 이전에 서비스업 종사자로서 가장 해선 안 되는 일이 뭔지는 알고 있겠죠? 예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넵. 손님과 다퉈선 안 된다, 입니다."

"맞아요. 그런데 그걸 잘 아는 찬혁 학생이 학기가 돌아올 때마다 물의를 일으키니, 저는 또 찬혁 학생이 잊어먹고 있는 건 아닌가 했죠."

"하, 하하. 그, 그럴 리가요. 항상 염두하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정말 머릿속에 꽉꽉 박고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나를 얌전한 류찬혁으로 살게 놔두지 않는다. 내 안의 흑염룡이 전투민족으로 살아가라며 귓속말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 아니 뭐, 반쯤은 자기 책임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마는.

뻘쭘하게 시선을 돌리는 나를 보며 교장선생님이 헛숨을 뱉는다.

"하."

그, 비웃음이십니까? 아니면 기가 차신 겁니까.

안 그래도 말년에 계속 사고를 쳐서 죄송하단 생각은 항상 하고 있습니다. 제발 지원만은 끊지 말아 주세요……!

"그래요. 농담은 여기까지만 합시다."

"에, 아, 예."

농담이었어? 아니, 방금 시선이 굉장히 날카로웠는데. 예리함으로 치면 라텍스 장갑을 뚫고 손가락을 찌르는 새우 뿔 수준이었는데.

내가 허망한 시선을 보내는 걸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교장선생님은 아까부터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프린트 뭉치를 내게 건네주셨다.

"확인해 봐요. 이번 하반기에 열리는 대회 목록이에요."

"알겠습니다."

좀 폰트가 작긴 하지만 정리는 깔끔하다.

열리는 일자, 대회명, 주최, 스폰서. 깔끔하게 네 종류의 칸으로 나뉜 표 아래로 우수수 달린 글자의 무리.

여기서 대회명은 굳이 하나하나 읽으면서 확인하는 건 하수다.

기본적으로 이 체크리스트에서 1순위로 확인해야 하는 건 주최자와 스폰서.

그것만 딱 보면 대회의 수준 같은 건 적당히 알 수 있는 법이니까.

대회 규모부터 따지고 들어가는 건 너무 속물적인 관점 아니냐고?

잘 들어보면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성심고는 말은 고등학교지만 실질적인 규모나 교육수준을 따지면 이미 어지간한 성인이 교습하는 전문 요리 강습소의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는다. 대부분의 학생이 프로 목젖에 닿아 있고, 그중에서도 탑티어에 속한 학생은 경험이 부족하여 장사하는 재주만 없다 뿐이지 어지간한 프로 이상의 실력을 자랑한다.

그런 탑티어 중의 탑티어인 대회반이 아무 대회나 막 나가서 상을 쓸어 담았단 봐라. 이런 대회로 경력을 쌓으려던 사람들이 사다리 걷어차기냐고 온갖 항의가 들어올 것이다.

사람이 수준에 맞게 놀아야지. 메이저리거가 사회인 야구대회에 나가 상금을 챙기면 어느 누구 입에서도 좋은 말이 나오진 않을 거다. 우리야 아직 유스긴 하지만.

아무튼, 우리 입장에서도 충분히 적수가 있을 만한 대회를 골라 나갈 필요성이 있다는 소리다.

'어디 보자…….'

음, 대부분은 시청이나 구청에서 개최하는 대회다. 해외 대회도 몇 개 보인다.

아마 인사팀에서 한 번 걸러진 목록일 테니, 이만한 규모의 대회가 남는 건 이상하지 않지.

프린트를 위에서부터 쭉 훑으며 쓰인 이름을 대충 살폈다.

서울, 부산, 뉴욕, 방콕, 경기, 도쿄, 강원, 상하이, 홍콩, 웹플릭스, 세종, 교토, 전라…….

"…… 어?"

잠깐만. 지금 뭔가 혼자 이상한 거 있지 않았나?

스쳐 지나간 이름을 찾아 나는 시선을 위로 되돌렸다.

그리고, 발견하고야 말았다.

"웹…… 플릭스?"

뭐야? 형이 왜 거기서 나와?

끽해야 전국구가 노는 판에, 갑자기 월클이 뛰어들었다.

뭐냐,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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