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56화 (256/403)

256. 푸드 트랩.-2-

이틀의 시간이 지났다.

차은욱에게 요 이틀의 시간은 말 그대로 인고의 시간이었다.

어린이날을 앞둔 어린아이의 심정이라고 할까. 크리스마스 파티를 앞둔 연인의 심정이라고 할까.

어찌 되었건 차은욱은 자신이 다시 온새미로에 갈 그날이 생일선물과도 같은 기쁨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조금의 심적인 스트레스도 받지 않기 위해 거슬려도 편리한 정찬국마저 놔두고 홀몸으로 오지 않았던가. 그 자체만으로 차은욱이 오늘 행사에 얼마나 기대를 걸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얼마 전 보았던 현관을 지나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대기하고 있던 웨이터가 그를 맞이한다.

"어서 오세요. 온새미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차은욱 님 맞으십니까?"

"예, 맞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웨이터가 얼굴을 기억하는 건지, 아니면 유민하가 언질을 주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웨이터는 단박에 차은욱을 알아보고 깍듯한 자세로 그를 모셨다.

여전히…… 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이전 방문과의 텀이 그리 길지 않았지만, 온새미로에 올 때마다 느껴지는 단정한 양복을 와이셔츠, 베스트, 저지까지 풀세트로 갖춰 입은 것 같은 갑갑함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웨이터는 그를 건물의 최상층으로 안내했다.

사람이 혼자 앉기에는 과분하리만치 넓은 자리에 차은욱이 자리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유민하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차은욱 평론가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 유민하 셰프님. 오늘은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리가 나오기도 전에 등장한 그녀를 차은욱이 짐짓 놀란 척 반긴다.

"저희야말로 바쁜 와중에 발걸음을 옮겨주셔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요리를 내어드리기 전에, 이전에 저지른 실례에 대해 먼저 사과를 드리고 싶네요."

사실 실례라고 하면 당연히 차은욱이 먼저 저질렀다고 봄이 맞겠으나, 차은욱은 아랑곳없이 관대한 행세를 하며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머리 안 숙이셔도 됩니다. 어린애가 원래 사고도 좀 치면서 크는 거죠. 저기, 그런데……."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없는 건 아니다.

"류찬혁 학생은 혹시?"

"류찬혁 쿡이라면 현재 주방에서 업무 중입니다. 물론 찾으시는 마음은 압니다. 식사를 끝내신 뒤에 제가 데리고 함께 찾아뵙도록 하죠."

"아, 예. 알겠습니다."

징계까지 줬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한 차은욱이었으나, 그것은 식후의 즐거움으로 남겨두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류찬혁 '쿡'이라.

'저 까다롭기로는 업계에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유민하가 어엿한 요리사로 인정한다는 건가.'

대단한 일이다. 어지간히 경력을 쌓은 요리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을 그 어린 학생이 해내다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봐도 좋다.

'하지만 바로 그게 네 한계지.'

요리사란 것이 원체 그렇다. 아무리 내게 쓴소리를 하는 사람이라도, 마음에 안 들어도, 결국 제 정성을 다한 작품을 그런 사람을 위해 만들어야 한다. 차은욱은 그것이 너무도 마음에 안 들었기에 요리를 그만두었다.

고객과 요리사는 철저한 갑을관계. 결국 갑질에 놀아나는 게 을의 숙명이라는 것이겠지.

그 사실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차은욱은 묘한 만족감이 피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식사 먼저 하도록 할까요."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직원들이 심혈을 다해 준비했으니, 부디 맛있게 드셔주세요."

"아무렴요! 하하, 평론도 제가 끝내주게 뽑아드리겠습니다!"

나한테 좋은 방향으로 말이지. 고개를 숙이고 주방으로 돌아가는 유민하를 보며 차은욱은 뒷말을 삼켰다.

***

내가 준비한 레시피는 온새미로의 코스 메뉴 전체를 커버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뭐, 아무리 내가 잘났어도 고작 하룻밤 새 크게 나누어 네 가지,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열 가지에 가까운 창작 레시피를 혼자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내게도 비장의 수단은 있는 법. 아주 송구스럽게도 회귀 전, 그러니까 미래에 내가 일하던 갖가지 업장에서 쓰인 레시피는 아직 쓰이지 않은 것이기에 거기서 살짝 착안하고, 또 살을 덧붙여서 몇 가지의 레시피를 창작했다.

그중 첫 번째로 나갈 메뉴는 스프와 식전 빵. 보통은 식전주와 간단한 안주식 전채겠지만 차를 가져왔다는 말에 준비한 놈이다.

최고급 노계老鷄의 뼈를 오븐에 갈색빛이 돌도록 바싹 구운 뒤, 닭발과 함께 끓여 만든 육수에 이런저런 맛을 가미한 콩소메 스프. 너무 진한 맛을 담백하게 잡아줄 밀빵.

스프는 위에 벽을 만들어 과식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다. 다량의 메뉴가 나가는 코스 요리의 시작으로는 알맞다.

전채는 살짝 덜 익어 새콤한 맛이 강한 사과를 졸이고 그 위로 다진 연어와 견과류, 염장 햄 등을 올린 안티파스토. 조합과 부재료를 바꿔 전혀 색다른 맛을 즐길 수 있게 세 종류가 올라간다.

그다음은 숯불에 직화로 구운 관자에 레몬즙과 소금, 후추, 허브로 만든 담백한 소스와 캐비어를 뿌려먹는 사치스런 메뉴.

어디까지나 전채인 만큼 재료 본연의 담백한 맛을 살린 메뉴다.

이어서 메인.

속을 깨끗이 비운 메추리 속에 으깬 과일과 견과류를 가득 채우고 고급 와인에 하룻밤 동안 재운 뒤, 속에 들어찬 과일을 다시 꺼내 그 자리에 대신 닭 육수와 다리 살을 넣어 만든 치킨 리조또를 채워 넣는다.

노계의 깊은 맛이 듬뿍 밴 쌀알을 속이 터지도록 품은 메추리. 그 위를 다시 베이컨과 닭 껍질로 감싼 뒤 숯불 위에서 전기통닭처럼 굴려 가며 구워주면, 닭과 돼지, 거기에 와인과 과일 따위의 풍미가 듬뿍 밴 메추라기 통구이가 완성.

값비싼 수제 베이컨과 발라내기 귀찮은 닭 껍질을 오로지 풍미를 더하기 위하는 용도로만 사용한 사치스런 요리.

맛은 두말할 것도 없이 끝내준다. 이건 내가 장담할 수 있다.

'만드는 건 내가 아니긴 하지만…….'

뭐, 제대로 레시피를 따라 만든다면 결과도 같겠지.

레시피를 내가 준비하긴 했어도, 결국 온새미로에서 일하는 류찬혁 쿡의 직위는 디저트 섹션 담당 요리사다. 손을 댈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디저트뿐이라는 뜻.

식전 빵과 전채를 지나, 비로소 메인이 바깥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슬슬 박차를 가할 준비를 했다.

"자, 이게 과연 통할지 어떨지."

아마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이상의 레시피를 보고 무언가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준비한 레시피에 담긴 함정.

엄청나게 공들인 플레이팅으로 보이지 않게 감춘 비수.

이걸 차은욱이 눈치채느냐, 혹은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겠지.

근데 그거 아는가? 나는 이미 판돈을 걸었다. 그것도 당연히 후자에다가 말이다.

이게 진짜 도박판이라면 못 할 짓이리라.

'원래 도박판에서는 판을 짠 놈이 돈을 걸면 안 되거든.'

제 돈이 걸린 놈이 꼼수를 안 쓰고는 못 배길 테니까.

그럼 여기서 문제.

과연 나는 꼼수를 썼을까, 안 썼을까? 아니면 '아직' 안 쓴 걸까.

그거야, 결과를 보면 알 일이겠지. 나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디저트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

"……."

식사 메뉴까지 먹는 것을 마치고 식기를 내려놓은 차은욱이 식은땀을 흘렸다.

맛이 없어서? 아니, 그렇지 않다. 온새미로에서 설마 맛없는 요리가 나올까. 그럴 이유도, 명분도 없다.

그가 먹은 것들은 전부 하나같이 뛰어난 요리였다.

어찌나 뛰어났는지, 천하의 차은욱이 할 말을 잃었을 정도로.

'이 정도라고?'

지난번 이곳에서 먹은 요리도 한국 땅에선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뛰어난 요리였다.

그러나 오늘의 메뉴는 그야말로 격이 다르다. 대체 온새미로가 얼마나 칼을 갈았는지, 수준 높은 미식에 황홀경을 헤매다가도 이걸 준비한 요리사의 각오에 솜털이 삐죽 솟으며 번뜩 제정신이 들만큼, 접시 하나하나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백이 있다.

"거기다……."

묘하게, 먹어본 적 없는 맛이 혀끝을 감돈다. 그도 나름 세계 이곳저곳을 돌며 많은 경험을 했고, 그만큼 다양한 나라에 다양한 맛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먹는 이 요리는 뭐라고 해야 할까, 분명 겉보기에는 고급스럽게 치장한, 한식의 특징적인 모습이 돋보이는 요리인데 그 속에는 차은욱이 알지 못하는 맛이 느껴진다.

꼭 길을 걷다가 길 한복판에 떨어진 외계인 로봇이라도 본 것 같은 기분. 미지의 미식이 차은욱의 판단을 흐트러트린다.

30년 전 사람이 스마트폰을 보고 이게 뭔지 어떻게 알겠는가? 어지간한 지식인은 되어야 '와, 대단한 기계다.'라는 감탄이나마 할 수 있겠지.

차은욱의 심정이 딱 그러했다. 맛있고 대단한 요리라는 건 알겠으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렇게 된 이상 그의 판단을 도울 수 있는 건 시각적인 요소뿐이었고, 끝끝내 나온 디저트는 그 생각에 쐐기를 박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호오."

디저트는 얕고 넓은 접시 하나를 통째로 채우고 있었다.

마치 푸딩처럼 점성과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새하얀 액체. 살짝 맛을 보니 옅은 단맛과 진한 고소함이 느껴졌다. 그 속에 감도는 은은한 우유의 향미로 보건대 우유에 젤라틴과 설탕 따위를 넣어 굳힌 것임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더해 그 아래에는 새콤한 과일 맛이 강하게 감도는 잼처럼 진한 농도의 시럽이 깔렸다. 시럽과 푸딩의 2층 구조.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보다는 다른 것이다.

"꼭 그림 같은데."

우유 푸딩 도화지 위로 먹물처럼 새까만 고체가 3D펜으로 그린 그림마냥 입체감 있는 형상을 이뤘다.

그 형상이 무엇인지 차은욱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난과 대나무. 매난국죽이라 불리는 사군자의 일부.

이 디저트는 접시를 화판삼고 우유 푸딩을 도화지삼아 그린 사군자화였다.

먹물의 정체는 설탕이 거의 섞이지 않은 카카오 99% 이상의 다크 초콜릿. 거기에 홀로 새빨갛게 물든 산딸기로 표현한 난꽃이 그야말로 화룡점정이 아닐 수 없다.

'머리 좀 썼구나.'

과연, 차은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군자화라 하면 한국의 전통을 꼽을 때 결코 빠지지 않는 요소 중 하나. 그 디자인을 이토록 대놓고 표현한 요리를 보여주고 '여기선 한식의 정취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맛 또한 놀랍도록 뛰어나다. 고소한 우유 푸딩과 혀가 아리도록 새콤달콤한 시럽의 너무도 강한 단맛을 씁쓸한 초콜릿이 단번에 휘어잡는다.

혹여나 너무 강한 맛에 입에 남은 텁텁한 맛은 산딸기의 산뜻함으로 다시 한번 씻겨나간다.

맛으로도, 모양으로도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한 메뉴였다.

전채부터 디저트까지, 이전과 비교해도 확실히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낸 차은욱이 차로 기분 좋게 입가심을 하고 있을 때, 마침내 그가 그토록 얼굴을 보고 싶어 하던 인물이 그의 앞에 나섰다.

"실례하겠습니다, 차은욱 평론가님."

"……."

류찬혁.

식사가 너무 만족스러워 잠시나마 존재를 잊고 있던 그가 제 눈앞에 나타났을 때, 차은욱은 분노도, 짜증도 아닌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 실례하겠습니다."

마치 군대 선임에게 조인트부터 시작해서 온갖 쌍욕을 들은 신병처럼, 죄송스러움과 짜증, 억울함이 절묘하게 섞인 표정을 지은 찬혁의 얼굴이 퍽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네가 류찬혁이구나. 나는 차은욱이다. 서로 자기소개는 필요 없겠지?"

"…… 예."

그토록 다퉈놓고 서로를 모른다고 말하기엔 이미 너무 때가 늦었다.

차은욱은 지금 이 모습이 서로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껏 배부르게 먹고 미소를 짓는 자신.

그런 자신을 먹이기 위해 죽어라 일하다 끌려와서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짓는 찬혁.

그야말로 백과 흑, 청과 적, 아니, 그 이상의 대비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만족감을 뼛속 깊이 느끼며 차은욱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말한 대로 와줬다만. 내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던 거 아니냐?"

그의 물음에 찬혁이 답이 없자, 유민하가 그를 닦달했다.

"…… 류찬혁 쿡."

"…… 예, 셰프."

하는 수 없다는 듯, 정말 싫다는 듯 뻣뻣하게 굳은 동작으로 조금씩 허리를 굽히는 찬혁을 보며 차은욱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저께에는, 실례가 정말 많았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결국, 찬혁의 허리가 90도로 꺾였다.

크으, 이거다! 이 약자의 굴복을 볼 때의 쾌감은 그 어떤 미식보다도 나은 만족감을 그에게 선사했다.

"괜찮다. 고개 들어라."

여기서 더 괴롭히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때때로 약자에게 강자의 관용은 억압보다 더욱 강한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차은욱은 알고 있다. 특히 자존심이 강한 부류의 사람에게는 더더욱.

아마 이 사건은 찬혁이 몇 살이고 더 나이를 먹더라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겠지.

유민하의 보는 눈도 있었기에, 차은욱은 그 지점에서 슬슬 발을 떼기로 마음먹었다.

"네 덕분에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다 받았구나. 오히려 내가 다 고마울 지경이야. 이렇게 트레디셔널하면서 새로운 느낌의 한식은 처음이다. 내 시야를 넓혀줘서 고맙다."

이 정도로 끝냈다면 온새미로와의 관계도 슬슬 재정립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차은욱은 방금 그 문구가 나쁘지 않았다고 자화자찬하며 이번 평론에 넣을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이 순간. 여태껏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묵묵히 바닥에 시선을 향하고 있던 찬혁의 얼굴로 소리 없는 진한 웃음이 맺혔다.

그러나 차은욱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찬혁이 판 함정에 제 발로 몸을 담고 말았다는 것을 말이다.

다음날. 차은욱이 호평일색의 평론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

그가 자주 이용하는 사이트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차은욱이 실력 없는 양반이라는 증거

라는 제목의 글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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