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스윗 쿡남.-4-
아직 채 불씨가 남은 모닥불을 뒤로하고 자릴 비우는 것 같은 의미심장한 불안감 속에서 나를 비롯한 크루는 억지로 그것을 잊으려는 것 마냥 업무에 몰두했다.
본래 무언가에서 도피하기 위해 다른 것에 집착하는 건 보통 끝이 좋지 않을 때가 많긴 하지만, 피와 살을 넘어 골수까지 요리의 프로세스가 정립된 프로들에게는 그렇지만도 않은 이야기였다.
나는 물론이요 다른 크루도 이제 와서 심적 부담감이 요리로 표출되는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방금 유민하 셰프가 말했듯이, 그저 평소처럼 최선을 다해 각자가 맡은 업무에 임할 뿐이다. 나도 마찬가지고.
'나는 그나마 쉬운 편이지.'
당장 레시피가 바뀐 전채, 메인, 식사 담당은 정말 죽을 맛일 거다. 요 며칠 일하다 안 건데, 유민하 셰프의 미각은 거의 탈인간 수준이다. 어떻게 염도계 기준 0.1차이 짠맛을 구분하지? 내가 봤을 땐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걸 어떻게든 따라 하는 저 녀석도…….'
섹션을 종횡무진하며 소스니 생선의 준비상태 따위를 체크하고 있는 백예은을 보고 내심 고개를 저었다. 참, 쟤도 만만한 녀석은 아니야.
아무튼, 이래저래 준비를 하다 보니 순식간에 전채가 완성됐다는 목소리가 주방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정회수 쿡이 나를 닦달한다.
"좋아. 전채가 지금 나갔으니까 우리는 못해도 30분 뒤쯤에 나갈 수 있게 준비해 두자고."
"예."
"아이스크림 재고는 확인했어?"
"옙. 냉동고에 넣어둔 것도 상태 좋아요. 당장에라도 나갈 수 있습니다."
"좋아. 자, 주문 들어온 거 얼른 처리하자. 일 밀려서 조급해지면 괜히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나쁘지 않다. 어디서 실수를 하는 것 같은 낌새도 안 보이고, 제법 일이 잘 돌아가는 분위기가 감돈다.
'그런데…….'
그런데 뭘까, 이 묘한 불안함은.
신발 속 자갈을 미처 털어낼 시간도 없이, 나는 전채가 홀로 서빙 되는 모습을 바라봤다.
***
'과연 온새미로. 초일류 레스토랑이란 건 허명이 아니야.'
식탁에 앉은 차은욱이 내심 감탄을 삼켰다.
평론가라는 직업은 자신의 잣대를 남에게 들이대는 것. 그렇기에 제 나름 프로를 자처하는 이라면 무릇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이 있다.
차은욱이 식당을 평가하는 기준은 이러했다.
그럭저럭 먹을 만한 음식을 내놓는 식당. 삼류다. 논할 가치가 없다. 전국팔도에 그런 음식점을 찾으면 4열 종대. 아니, 8열 종대로 늘어놓는대도 연병장을 서너 바퀴쯤 돌리고도 남는다.
하루 끼니를 때우는 수준의 식당이라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굳이 찾아가서 감투 노릇까지 할 필요는 없다.
평론가라는 직업은 환상을 파는 것. 연예인이나 마찬가지다. 너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을 환상이라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차은욱이 주로 먹잇감으로 노리는 것은 보다 상격의 상대.
다른 곳을 찾아 헤매도 쉽게 먹을 수 없는 진미를 파는 식당. 이류다. 식당이 맛있는 건 당연한 것. 이런 곳은 차은욱의 입맛대로 기사를 요리하는 것도 편하다.
어떨 때는 우연찮게 찾아낸 대단한 가게로, 어떨 때는 거품만 잔뜩 낀 허울 좋은 가게로.
이런 것은 독자들 사이의 설전舌戰을 유도하기 좋다. 사람 입맛이란 게 워낙 주관적이기 때문에 네가 옳다, 내가 옳다 하는 싸움엔 끝이 없는 탓이다.
이 정도 수준의 식당이라면 수고를 좀 들일만 한 가치가 있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서 얻을 게 많으니까.
완벽한 미식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당. 이쯤 되면 슬슬 일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미식이란 경험이다. 그 어떤 풍경으로도 따라가기 힘든, 오감에 남는 경험.
시각, 후각, 촉각, 미각, 청각. 그리고 그 오감을 넘어 감동이라는 감정마저 선사할 수 있는 가게라면 분명 일류라는 딱지를 붙이는 게 아깝지 않다.
그렇다면 초일류는?
'자기 색이 확고한 곳.'
그래, 바로 이 온새미로처럼.
일류까지의 식당은 고객에게 자신을 어필하려 애쓴다. 우리가 이렇게 잘한다. 우리가 이렇게 가성비가 좋다.
삐끼가 지나가는 행인을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것처럼 그들은 이 판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사적이다.
하지만 초일류 레스토랑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저 제자리를 지킬 뿐이다. 권유하지도 않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존재 자체에 매료되어 그곳을 찾는다.
사막 한복판에 홀로 자리한 오아시스에 온 사막의 동식물이 모여들듯이.
신기루, 오로라를 두 눈에 담은 인간이 자연의 경이에 시선을 빼앗기듯이.
차은욱이 느낀 감정은 딱 그와 같았다.
식당에 불과한 장소지만, 이 공간 자체가 주는 압박감이 가슴을 조여드는 듯하다. 하지만 불편하다거나 불쾌한 감각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그렇다. 롤러코스터나 바이킹, 자이로드롭 같은 격한 놀이기구가 움직이기 직전 내려온 안전바가 몸을 꽉 붙들어 매는 느낌이다.
앞으로 생길 즐거움에 너무 놀라지 않게끔 몸이 먼저 나서서 안전벨트를 채워주는 것만 같다.
"뭐, 뭔가 긴장되네요. 식당이 너무 쨍해서 그런가."
아직도 보는 눈을 키우지 못한 정찬국은 그마저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듯했지만 차은욱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초일류라 정의한 레스토랑을 간 경험이 몇 번이고 있으니까.
'하지만…….'
온새미로. 과연, 첫인상만이라면 그가 여태껏 경험한 초일류 레스토랑 중에서도 특출나다. 이 정도면 분명 본편인 식사도 기대해볼 만하겠지.
이미 테이블에 앉은 면면만 보아도 기대감이 만연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재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쉽게 찾지 못하는 식당이지 않은가. 차은욱은 그 기류에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몸을 실었다.
"두 협회장님들 덕분에 과분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르지만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올리고 싶네요."
"아, 아니 뭘. 우리가 남남인가. 그간 정을 생각하면 형님 아우 아니야."
"맞지. 너무 그럴 것 없이 그냥 편하게, 맛있게 식사하세."
"하하, 영광입니다."
말과는 달리 식은땀을 흘리는 두 노인을 보며 차은욱이 남몰래 냉소했다. 이미 업계에 퍼진 자신의 이미지가 어떤지 그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체면과 위신을 위해 자신의 청을 거부하지 못한 두 노인의 모습이 그저 우스울 뿐이다. 물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일행이 잠시 수다를 떠는 사이, 비로소 준비를 끝냈는지 그들을 찾아온 웨이터가 각자의 자리에 식전주가 담긴 고풍스런 도자기 잔을 내려놓는다.
옅은 갈색빛이 감도는 투명한 액체.
그 위로 풍기는 상큼한 향에 그들이 미소를 지을 때, 차은욱이 입을 열었다.
"향만 맡아도 정말 좋은 술인 걸 알겠습니다. 혹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웨이터를 향한 질문이었다.
보통 여타 식당에서 일하느라 바쁜 웨이터를 붙잡아놓고 있는 건 매너 없는 행동이겠으나, 초고가 레스토랑쯤 되면 음식에 대한 설명 또한 그들의 역할이 된다.
요리를 모르더라도 설명을 위한 간단한 교육 정도는 반드시 받아야 하는 이유이며, 그들의 대응을 통해 가게의 서비스 수준을 엿볼 기회도 된다. 차은욱의 경우 본 목적은 후자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돌아올 웨이터의 대답을 기다리던 차은욱의 귀에 들려온 목소리는 처음 들었던 웨이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민하. 온새미로의 오너이자 주방장인 그녀가 직접 홀까지 나온 것이다.
"유, 유민하 셰프?"
"처음 뵙겠습니다. 온새미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차은욱 평론가님."
깊게 고개를 숙여 차은욱을 비롯한 일행 전부에게 인사를 돌린 그녀가 말을 잇는다.
"이건 강원도에 거주하시는 명인 고학도 선생님께서 직접 담그신 매실주에 얼음을 띄웠습니다. 물론 얼음을 만들 때 사용한 물은 술을 빚을 때 사용된 것과 같은 샘물입니다. 조금씩 얼음을 녹여가며 맛의 변화를 음미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서, 설마. 고학도 선생님이시면 무형문화재이신 그분 말씀이십니까?"
"예. 맞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한 번 맛볼 수 있다면 기적이라고 하는 장인의 수제 담금주라니! 늘그막에 이런 귀중한 경험을 다 해봅니다!"
"…… 설명,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고객 여러분이 가장 맛있게 드실 수 있도록 힘쓰는 게 제 일인걸요."
'왜 이 여자가 여기에 있지?'
차은욱은 겉으로는 감사를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낭패감을 느꼈다.
유민하는 어지간한 일이 없으면 주방 바깥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요리도 아니고 고작해야 식전주 차례에 모습을 보일 줄이야.
'설마 날 견제하러 온 건가?'
그렇다면 곤란하다. 이렇게 메뉴가 나올 때마다 바깥에 나온다면 마음 놓고 찔러볼 수도 없을 것 아닌가.
옅은 미소로 자리를 지키고 선 그녀를 힐끗 바라본 차은욱은 하는 수 없이 식전주가 담긴 잔을 들어 입술을 살짝 적시는 수준으로 잔을 기울였다.
"……!"
음식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자연스레 술에도 어느 정도 그 수준이 미친다. 그건 차은욱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렇기에 이 술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입술을 살짝 적셨을 뿐인데 입안을 가득 채우는 매실의 향. 너무 쓰지 않은 쌉사름한 맛과 옅은 단맛. 군침을 돋우는 산미. 소믈리에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술을 마셔본 차은욱조차 쉬이 접한 적 없는 고급품이었다.
"곧 전채가 나올 예정이니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작해야 식전주로 이 수준.
그렇다면 대체 뒤이을 본편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차은욱의 눈가가 파리하게 떨렸다.
***
'대단하다.'
그 이외의 수식어가 감히 필요치 않았다.
식사 메뉴까지 먹기를 마친 차은욱은 참으로 오랜만에 음식을 먹고 감동, 감탄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시작인 전채요리는 잘게 다진 쇠고기에 파와 마늘, 생강과 배, 계란 노른자 따위를 섞어 만든 육회. 다만 그 모양새는 한국 사람에게 익숙한 육회보다는 프랑스식 요리, 타르타르와 더욱 비슷했다.
숯불에 직화로 구워 바삭바삭하게 만든 밀전병에 육회를 올려 씹으니, 마치 입속에서 한국과 프랑스, 멕시코가 하나로 합쳐진 것 같은 오묘하면서도 쉬이 표현하기 힘든 맛이 넘쳐흘렀다.
"생강은 일식 기법으로 만든 생강초절임을 넣어 시고 단맛을 살렸습니다. 고기의 비린 맛을 잡아줌과 동시에 감칠맛을 높이며, 뒷맛을 개운하게 해주죠. 밀전병에 싸서 드시면 더욱 맛있게 드실 수 있습니다."
거기다 평소엔 얼굴 보기도 힘들다는 유민하가 메뉴가 나올 때마다 자리하여 먹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주니, 대우를 받는다는 느낌에 사람들은 더욱 흥을 올리며 미식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정작 차은욱은 그것이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말이다.
"메인은 자연산 돌돔을 중심으로 한 모듬 숙회와 뱃살을 돌판에 구워 달큰한 양념을 뿌리고 파래로 풍미를 더한 뱃살 스테이크입니다. 같이 준비한 고추냉이나 고춧가루, 소금, 후추, 볶은 참깨 등을 함께 갈아 만든 양념을 살짝 뿌려서 드시면 맛의 변화가 극명하여 더 다양하게 즐기실 수 있습니다."
"돌돔의 뼈와 지느러미, 무, 고추 등으로 우린 국물을 차게 식혀 만든 국밥입니다. 밥 위에 올라간 돌돔 등살은 껍질째 바삭하게 구웠습니다. 일부는 국물에 적시지 말고 그대로, 일부는 밥과 함께 국물에 말아 드시면 좋습니다. 잘게 썬 김을 조금씩 넣어 드시거나, 달래간장을 조금씩 넣으시며 직접 간을 맞춰 드셔보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분하지만 최고의 맛이었다.
메뉴의 중심축이 된 돌돔의 품질은 그야말로 최고 중의 최고. 전국 팔도 바다마을이라면 안 가본 곳이 없는 차은욱조차 이만한 물건은 10년 중 한 번 볼까 말까 하다.
그야말로 작심을 했다는 것이 훤히 보이는 음식의 퀄리티.
솔직히,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런 것으로 흠을 잡아봐야 자신의 인터넷 사전에 있는 사건/사고 페이지에 항목을 더하는 수준 밖에 안 될 것이다.
지금은 물러날 때다. 차은욱의 이성은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몇 년에 걸친 요청에도 쉬이 문을 열어주지 않던 온새미로에 편법으로나마 간신히 발을 들였는데, 이대로 아무 수확도 없이 가는 건 차은욱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뭔가 더 없나?'
이제 남은 거라곤 디저트와 티. 두 개가 전부.
그 사이에 뭔가 그럴듯한 거리를 잡을 수 있을까?
아마 평범한 평론가라면 무리였겠지. 하지만 그는 없던 분쟁도 만들어내는 남자였다. 억지를 부리면 가능하다. 아마 제법 큰 역풍을 맞을 테지만, 차은욱은 그마저도 자신의 배가 앞으로 나아갈 순풍으로 만들어낼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디저트.
흑임자 아이스크림 위에 작게 재단한 튀일과 모나카 따위의 과자가 장식된 그릇을 보았을 때, 차은욱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거다.'
포식자가 남긴 잔해를 찾은 승냥이가 두 눈을 빛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