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스윗 쿡남.-2-
내가 알고 있던 대로.
그리고 내가 예상한 대로, 디저트 섹션의 업무는 정말 곡소리가 절로 튀어나올 만큼 빡셌다.
한반도의 기후는 이제 막 한여름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내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아침에 호텔을 나설 때 로비에서 얼핏 들었던 뉴스에 따르면, 오늘 최고기온은 무려 30도에 육박한다. 여름 중 가장 더운 날이라고 보기엔 애매하나 사람 하나 쪄 죽이기엔 충분한 날씨.
이런 날의 주방은 말 그대로 살인적이다.
불 때문이냐고? 틀리지는 않았다. 불이란 건 요리의 기본. 불이 켜지지 않은 주방 같은 건 손님 없이 파리만 날리는 주방뿐이다.
다만, 점수를 매기자면 50점 정도일까. 요리사의 주적은 불뿐만이 아니니까.
모터를 돌려 돌아가는 기계에서 나오는 발열, 빼곡하게 모인 사람의 체온 같은 것도 주방의 기온을 올리는 주범이니까.
거기다 접시나 냄비 따위에 묻은 기름은 찬물로 잘 닦이지 않으니 사시사철 뜨거운 물로 팔을 삶아가며 일해야 하고, 거기에 더해 수온이 90도에 육박하는 식기세척기를 열었을 때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온 수증기가 전신을 뒤덮을 때면 진심으로 자살이 마려워진다.
와, 진짜 나 용케 여태껏 살아 있구나.
……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편한 곳이라곤 눈을 오조오억 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주방에서 디저트 섹션은 특히나 힘든 곳이었다. 격투기 체급으로 치면 헤비급이라고 할까. 진짜, 더럽게 무겁다.
─부글부글부글
"스읍! 하아……."
숨을 꾹 참고 뚜껑을 연 뒤, 팥을 몇 차례 저어주고 간신히 숨을 내뱉는다.
다른 건 그럭저럭 버티지 못할 것도 없는데, 팥소 만들기. 이건 진짜 지옥이다.
바닥이 타지 않도록 저어주기 위해 뚜껑을 열 때마다 냄비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수증기가 날 덮치려드는 걸 어떻게든 피하고 있지만, 솔직히 빡세다. 수증기의 열기가 내 뺨을 스칠 때마다 마이크 타이슨의 살인적인 스윙 훅이 같은 곳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랄까.
이 수증기. 아마 얼굴에 맞으면 반 죽겠지. 그런 느낌이 절로 피어오를 정도의 환경이었다.
그러나 수증기의 불꽃 속에서도 모히칸…… 이 아니라, 요리사는 죽지 않았다!
…… 아니, 뭐, 정말 그 말대로다.
힘든 환경이라는 건 사실이다. 아마 이런 환경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얼마 못 가서 탈진하겠지 싶을 정도로.
허나 나는 그런 환경에 나 자신도 놀랄 만큼 금방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야 물론 물리적인 한계야 있다. 나라도 이런 날씨에 불 앞에서 몇 시간이고 서 있을 수 있을 리 없지.
익숙해졌다는 건 정확히 말하자면 몸이 아닌 요령 쪽이다.
재능과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연륜과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
어떻게 그런 걸 아느냐 묻는다면, 그야 뭐. 당연히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과 비슷한, 어느 의미로는 이곳보다도 더 빡센 곳에서 년 단위로 일한 경험이 말이다.
'거기는 잊고 싶어도 못 잊지.'
미국. 텍사스.
어딜 가든 황무지가 넘쳐나는 거친 자연의 땅.
이곳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래저래 말해주고픈 게 아주 많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바로 이거다. 바비큐 식당.
한국에서 골목 하나마다 치킨집이 있는 것처럼 텍사스에는 바비큐 식당이 정말 많다. 괜히 제주 감귤, 횡성 한우처럼 텍사스 바비큐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라고 선전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유학 시절에 학비를 벌겠다고 일한 곳도 그런 흔해 빠진 텍사스 바비큐 식당 중 하나였다.
근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텍사스의 기후와, 그곳에 있는 바비큐 식당의 영업 방식이다.
미국에서도 멕시코와 딱 붙은 텍사스, 그중에서도 적도에 가까운 남부 지역은 연평균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정신 나간 날씨를 자랑한다.
가장 더운 지역은 종종 50도 정도를 찍는 날도 있었더랬지.
덥기만 하면 문제가 안 된다. 사람이야 어떻게든 살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앞서 말한 대로 식당일이었다.
내가 일하던 지역에선 각 가게마다 자가 훈연기와 직화 바비큐 그릴 따위가 설치되어있는 게 일반적인 광경이었다. 어딜 가나 길이가 못해도 10미터는 될 것 같은 훈연기와 그릴이 있었고, 작은 가게라 해도 훈연기와 그릴의 길이는 최소 가게의 직경만 한 길이였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
내가 과연 그런 식당에 가서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불 앞에서 고기를 굽는 일? 음. 처음엔 그런 걸 할 줄 알고 들어간 거였는데, 아쉽게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서빙인가?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그거였음 편했겠지.
장작 관리.
그게 바로 내가 맡은 업무였다.
장작 관리라고 해도 딱히 내가 나무를 패서 장작거리를 만들었던 건 아니다. 그런 거야 기계와 업자가 패고 창고에 넣는 것까지 도맡아서 해주니까.
내가 한 건 정확히 말하자면 불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바비큐라는 놈은 엄청난 슬로우 푸드다. 조리시간이 길고, 그만큼 숯과 장작이 많이 필요하다.
그 와중에 장사를 하려면 그런 연료를 언제든 투입해서 100%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는 컨디션으로 만들어 놓아야 하고, 그렇기에 나는 텍사스에서 매일 12시간씩 집채만 한 화덕 앞에 서서 숯쟁이라도 된 것처럼 하루 종일 불을 지폈다.
제대로 불이 붙으면 1000도는 가볍게 넘어가는 거대 화덕 앞에서 그토록 오래 일하다 보면 싫어도 요령을 피우게 된다.
내 몸이 편하기 위한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생존을 위해서.
'거 참, 뭐든 경험이라더니.'
나라고 좋아서 그런 일을 한 게 아니다. 만리타향에서 돈은 벌어야 했고, 백인 우월주의가 팽배한 텍사스에서 동양계 외노자가 구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런 일밖에 없었으니 했을 뿐이지.
그런데 그런 경험이 이럴 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인생사 참 새옹지마다.
출근 3일 차에 새로이 배정받은 직책이었으나, 나는 내 나름대로 눈앞에 닥친 고난을 어떻게든 헤쳐 나가고 있었다.
"백예은은…… 괜찮아 보이는데."
저 녀석도 중요한 손님이라는 중압감에 눌리지 않고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제 역할을 다분히 잘 해내는 모습이었다.
상황은 괜찮다.
괜찮지만, 이상하게 무언가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일도 잘 풀리고 있고, 1차 방어선 뒤에서 최후의 마지노선을 맡고 계신 유민하 셰프 덕에 크루의 실수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묘하게 아까부터 싱숭생숭한 기분이 든다.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꼭 추적 스릴러 영화를 보는데 중요한 단서를 넘겨짚은 기분이라고 할까, 신발 밑창에 자갈이 하나 들어간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이 든 건 처음이 아니다.
회귀 전, 여름방학을 앞두고 몇 주나 연락이 없던 사장님과의 통화이력을 봤을 때도, 미국에서 퇴근길에 강도를 만났을 때도, 그리고 호텔에서 다른 파트의 실수를 내가 떠안고 승진이 좌절된 날에도 이런 느낌이 들었다.
'……조심해야겠는데.'
오늘은 어째 일진이 사나울 것 같다는 느낌이 풀풀 풍겼다.
뭐, 이미 사나워질 대로 사나워진 일진이긴 했지만.
***
중요한 손님. 백예은은 자신의 어머니가 한 말을 되새겼다.
'……이상해.'
지시를 내리면서도, 머릿속 한구석에선 그런 의심이 몇 번이고 되풀이됐다.
'중요한 손님이 온다고 메뉴를 바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마가?'
백예은은 평소 유민하가 자신에게 하는 충고를 똑똑히 기억한다.
모든 손님은 특별하다. 설령 누가 온새미로에 찾아오든, 모든 손님은 평등한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던 어머니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않을 리 없는 사람이다.
아마 대통령이 온새미로를 찾아온다 할지라도 정성은 들일지언정 다른 메뉴를 준비하진 않았겠지.
그런데 요식업지부 회장 정도를 상대로 메뉴를 바꿀 정도의 친절을 보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강남구와 서초구의 요식업지부 회장 정도라면 백예은도 가끔 얼굴을 보았던 사람들이다. 대단한 사람들이냐 묻는다면 분명 범상한 인물들은 아니다.
각자가 맡은 구역에 있는 식당조합 가입자들과 정부 부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실권은 없더라도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 하나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유민하가 굳이 특별메뉴를 준비하여 대접할 이유는 없었다.
백예은의 의심은 바로 그러한 점에서 기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백예은의 의심은 예상 이상으로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
뒤에서 한창 날카로운 눈으로 주방을 둘러보던 유민하가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요식업지부 회장. 높은 사람들은 맞다.
모르는 사람들은 실권이 없단 말에 저도 모르게 얕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정부와 식당 사이의 유일한 대단위 소통창구라는 명함은 상상 이상의 권력을 가진 자리다.
예를 들어 그들의 눈에 잘 들면 식당의 사신이라 불리는 식품위생과의 불시 감찰 따위를 예고 받아 대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처리하기 까다로운 정부 공문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쉽게 해결할 수도 있다.
어중간한 수준의 가게라면 그들의 입김 한 번에 흥망성쇠의 가로에 놓일 수도 있다는 것.
물론 그렇다고 유민하는 그들을 특별대우 할 생각은 없다.
그건 온새미로가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도, 훌륭히 자리 잡아 그 이름을 강남 땅 위에 널리 알린 지금도 변하지 않는 심정이다.
애당초 그런 편의 따위, 진정으로 가게를 성장시키는 데에는 필요 없다는 고집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홀대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는 그녀의 자존심일 뿐이다. '언제 어느 때든 온새미로의 대접은 최선이자 최고'라는 자존심.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도 결국 그 자존심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유민하가 굳이 인맥까지 동원해가며 평소보다 급하게 메인메뉴에 손을 댄 이유는 다름 아닌 두 요식업지부 회장들의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은욱……."
고개를 내리깐 그녀의 입에서 낯선 이름 세 글자가 흘러나왔다.
그 이름의 주인이야말로 두 회장이 경고한 것.
업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은 누군지 모를 평범한 어느 사람 이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가 누군지 안다면, 그리고 그게 업계 사람. 특히 자신의 가게를 가진 사람이라면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욕을 하거나, 혹은 경기를 일으키거나.
"……쯧, 하필 물려도."
몇 년 전의 일이다.
유민하와 사적으로 친분이 있던 쿡 하나가 호텔을 나와 자신의 가게를 차렸다.
젊은이들의 입맛을 겨냥한 트렌디한 식당으로, 유민하 또한 들려보고 나름 괜찮은 평가를 내린 바 있었다.
물론 알고 있다시피, 유민하의 입에서 괜찮다는 소리가 나왔다는 건 솜씨가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것이고, 그 솜씨가 고객에게도 큰 인정을 받으며 업계인의 주목을 받을 만큼 빠른 속도로 승승장구 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가게가 폐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식당이 폐업하는 건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이 좁은 한국 땅에서는 하루에만 해도 적게는 수십, 많게는 백 단위의 식당이 개업하고, 또 폐업한다.
그러나 유민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껏 들어온 가게의 소식이나 이전 갔을 때 본 주방장의 솜씨를 생각하면 그토록 갑작스런 폐업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으니까.
거기서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유민하는 당시에 일어난 사건의 경위를 대강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 쿡이 영업을 그만둔 이유는, 어느 평론가의 지독한 비판 탓이었다.
쓸데없이 눈을 절로 잡아끄는 필력으로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 쓴 비난의 가까운 비판. 유민하는 그 비판의 반의반도 인정할 수 없었으나, 현실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그 평론가가 만약 이름 없는 사람이었다면 어중간한 어그로로 끝났을 그 비판은 그가 가진 배경 탓에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평소 '거침없는 말솜씨와 물불 가리지 않는 평가를 내리는 참된 평론가'라는 이미지로 수많은 충성 팔로워를 보유한 인플루언서.
그리고 그에 선동당한 민중이 결국 멀쩡한 가게를 '값어치도 못하고 권위적인 맛밖에 연출하지 못하는 엉터리 식당'으로 만든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망하게 만든 식당이 한둘이 아니라는 풍문까지 있는 남자.
그렇다.
그 평론가의 이름이 바로 차은욱.
어찌 된 영문인지, 두 회장과 함께 오늘 저녁 가게로 오기로 한 일행 중 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