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스윗 쿡남.-1-
반차 기간이 끝난 백예은이 비로소 온새미로로 돌아왔을 때, 솔직히 나는 너무 기뻐서 환호의 함성이라도 지르고픈 심정이었다.
"정말?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아니, 구라지."
"……."
"……농담이야.
농담 두 번하면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 절로 겁이 나서 한숨이 나온다. 내가 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뭐, 앞에 한 말은 그냥 빈말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거짓말인 건 또 아니다. 애당초 이 주방에서 내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업무적으로야 오래 일했고, 능력적으로도 모난 곳이 없으니만큼 크루 사람들도 나를 좋게 봐주시긴 하지만 딱 그 정도다.
요컨대 혼자 있으면 어색하고 심심하다 그거지.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재밌게 하는 일과 심심하게 하는 일은 효율이 다르다 이거야.
…… 그래, 헛소리는 이쯤 할까.
아무튼 브레이크 타임이 시작될 쯤 출근한 백예은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오전 장사는 막을 내렸다.
"와, 출근시간 실화냐. 시간계산에 가슴이 웅장해진다."
"반차가 원래 그런 거잖아."
"그건 맞지."
사실 나도 그냥 놀리려고 해본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까 아까 아침에 셰프랑 둘이서만 주방에 있던 거 아냐."
"와……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다칠 일이 뭐가 있다고 다치겠냐."
"마음이라던가."
오, 그건 제법 신빙성이 있는 소린데.
하지만 그런 녀석에겐 아쉽게도 딱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재료 손질 좀 했어. 생선 가져오셨더라."
"……생선?"
"어. 돌돔 큰놈으로 세 마리. 합치면 100만은 넘을 것 같던데?"
"생선 손질을 너한테 맡기셨어?"
"어. 뭐 해체 정도만 하고 나머지 숙성 작업은 직접 하시더라."
"……원랜 해체도 남한테 잘 안 맡기셔."
"그러냐?"
그런 것치곤 해체하는 내내 보고만 계시던데. 뭐, 해체하는 게 적당히 마음에 드셨다는 거겠지.
"보통 그게 성에 안 차시니까 직접 하시는 거란 말이야……."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백예은이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이미 맡은 건 별수 없지 않은가.
내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녀석은 뺨을 부풀리며 날 째려봤지만, 그러기도 잠시. 이윽고 백예은은 의아하단 표정이 되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돌돔이라고? 그 정도면 우리 가게에서도 쉽게 안 나가는 건데……."
"그게 쉽게 나가는 물건이면 가게가 파산하지."
"그러니까. 저녁에 쓴다고 하신 거 보면 중요한 손님이 오실지도 모른다는 소리잖아."
백예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녀석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
잠깐만, 정리해보자.
셰프가 갑자기 비싼 식재료를 사 왔다.
이따 오후에 중요한 손님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아직 고려를 안 한 사항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유민하 셰프가 최근 매일같이 백예은에게 주방장 대리 업무를 최소 한 타임은 맡기고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오늘, 백예은은 반차를 냈기 때문에 아직 대리 업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상의 정보를 조합하면, 정답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는다.
"설마…… 아니겠지? 중요한 손님이 오는데 엄마가 그러실 리가……."
아, 아닌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앞길은 이미 정해진 것 같네요.
나는 그저 또 한 번 갈려 나갈 녀석의 안식을 빌어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하, 쌤통이다.
브레이크 타임 내내 넋두리를 읊는 녀석을 질질 끌고 다니며 대충 휴식을 취하기도 잠시, 언제 이렇게 빨리 시간이 지났는지 벌써 후반 영업을 시작할 때가 됐다.
"오후 늦저녁 쯤에 강남구, 서초구 요식업지부 회장님들이 올 예정입니다. 일행 숫자가 좀 많은 데다, 손님도 손님인 만큼 실수 없도록 합시다."
영업 개시에 앞서 크루를 모은 유민하 셰프의 말씀이었다. 역시 예상이 맞았다.
하지만 이걸 예상이 맞았다고 좋아해야 할까, 아님 슬퍼해야 할까. 적어도 백예은은 후자인 듯 보였다. 조리복으로 갈아입은 녀석의 얼굴이 벌써 죽상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못한 녀석의 심장에 유민하 셰프가 최후의 비수를 꽂았다.
"예은아. 준비하렴."
무엇을 준비하라는 뜻일까? 당연히 주방장 대리 업무다.
다른 크루도 중요한 손님이 오실 때까지 대리를 맡길 줄은 몰랐던 건지 조금 동요하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금방 진정됐다.
'뭐, 어차피 셰프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니까.'
말하자면 고스트 요리왕…… 아니, 잠깐. 이렇게 말하면 패드립인가?
그래, 대리기사 요리왕 정도로 이름을 바꾸자. 아무튼 뒤에서 봐주는 사람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으니 백예은도 아주 못 할 일을 하는 건 아니다.
간단히 명복이나 빌어주자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갑자기 유민하 셰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그리고 하나 더."
"?"
뭐지?
원래 유민하 셰프는 말할 것만 빨리 말하고 일로 넘어가는 스타일이라 보통 이쯤 말하면 해산이었는데, 웬일로 아직 하실 말씀이 남은 것 같았다.
잠시 좌중을 훑던 유민하 셰프의 눈이, 나를 직시한 채 멈췄다.
"류찬혁 쿡."
"예, 셰프."
"지금부터 디저트 섹션으로 옮기도록 하세요."
"……예?"
아니, 예? 잠깐, 잘못 들은 건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의심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이런 소리를 들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내 귀는 젊은 나이답게 굉장히 정상이었고, 내 정신 또한 아무 이상 없었다.
"왜요. 못 하겠나요?"
"……아닙니다."
하는 수 없었다. 주방에서 셰프가 가진 권력은 절대적이니까.
나는 거스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 지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아래로 깐 그 순간, 바로 옆에서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려온 기분이 들었다.
"……헤."
"……."
백예은이, 마치 제 저승 길동무를 찾은 물귀신처럼 해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점심나가서먹을것같애!
결과적으로, 정신은 나가지 않았고, 내 자리는 디저트 섹션으로 바뀌었다.
***
"어…… 그, 그래. 어서 와. 디저트 섹션은 처음이지?"
회사에서 좌천당한 회사원의 기분으로 개인 조리도구를 들고 디저트 섹션으로 온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디저트 섹션의 파트장이라고 할 수 있는 정회수 쿡이었다.
아니 근데 왜 하필 첫인사가…… 무슨 클럽에 처음 들어온 초짜를 받는 퇴폐미 가득한 클럽 죽돌이 같은 대사 아닌가.
나도 모르게 '저 그냥 나갈게요'하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니 뭐, 나갈 땐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들어올 때도 내 마음대로 들어온 건 아니지만.
"그, 미안. 나도 이렇게 갑자기 기수가 들어온 게 처음이라 뭐부터 가르쳐줘야 할지 감이 안 잡히네."
그러게요. 저도 뭐부터 배워야 할지 감이 안 잡히네요.
어느 의미 같은 피해자로서 그런 정회수 쿡의 당황스러움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저, 일단 레시피는 전부 기억하고 있는데요."
"어? 정말?"
"예. 계량 수치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럼 내가 가르칠 게 없겠는데? 그냥 일하면 되겠어."
말로만 들으면 '나는 널 가르치는 업무를 방폐할 테니 알아서 일해라'라고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이게 또 디저트 파트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제과제빵 계열의 스킬은 일단 정확한 계량과 조리 순서만 기억하면 적어도 8할은 먹고 들어가는 부류고, 나머지 2할은 플레이팅이 차지한다.
요컨대 레시피 잘 지키고 모양 예쁘게 만들 스킬만 있으면 디저트 섹션에서 일하는 건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조금 폭언처럼 들리는 건 이해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대신 그 레시피를 지켜서 만들 수 있는 스킬이란 게, 굉장히, 아주 많이, 매우 어렵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계량만 해도 들어가는 재료의 무게를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 일이며, 그날의 습도나 기후 따위에 맞춰서 반죽의 농도를 조절하는 건 또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제과제빵 계열이 남들이 보기엔 머리로 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질적으로는 요리사의 감각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은 장르다.
그건 가르쳐주고 싶어도 쉽게 가르쳐줄 수 있는 장르가 아니기에, 그 과정을 건너뛸 수 있겠다는 소식을 접한 정회수 쿡의 안색은 크게 안심한 듯 상기되어 있었다.
"그럼 우리 메뉴가 뭔지는 알고 있지?"
"예."
온새미로의 디저트 메뉴는 크게 두 가지다.
장년층을 위한 조금 올드스쿨 타입의 모듬 떡.
그리고 온새미로 특유의 퓨전 스타일에서 창안한 메뉴, 수제 아이스크림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계약한 방앗간에서 제품을 받아오지만, 후자의 경우는 우리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수제로 만든 흑임자 아이스크림에 튀일이나 모나카 같은 과자를 곁들여서 나가. 튀일이 뭔지는 알지?"
"예. 알고 있어요."
튀일은 쉽게 설명하자면 프랑스 식 쌀전병이다. 계란과 버터, 아몬드 가루, 쌀가루를 넣고 얇은 틀에 채워 오븐에 굽는 과자.
모양과 색감은 우리나라 쌀전병과 아주 비슷하지만, 맛은 천차만별이다.
"아이스크림이나 플레이팅은 내가 맡고 있으니까, 찬혁이 넌 팥소나 과자가 떨어지지 않게끔 보면서 굽고 채워주면 돼. 여름이라 조금 힘들 건데, 물 자주 마셔. 안 그럼 탈수로 쓰러진다."
"예."
그 살벌한 경고가 무색하지 않게 디저트 섹션은 이 온새미로에서 가장 불 앞에 있는 시간이 긴 곳이다.
왜냐하면, 디저트에 주로 사용되는 팥소 같은 경우 거의 하루 종일 팥을 졸여가며 만들어야 하는 물건이고, 그 외에도 과자를 구울 때 쓰는 오븐이나 버터, 초콜릿 따위를 녹이기 위해 사시사철 불이 들어와 있는 전열기에서 흘러나오는 열기는 고작 환풍기 몇 대나 에어컨 정도로는 해결이 안 될 정도로 힘겨운 환경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 난 슬슬 내가 뭔가 셰프에게 잘못한 게 있는 건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뭐지? 내가 뭘 했더라?'
혹시 아침에 돌돔 손질할 때 실수라도 했나? 아니면 백예은이랑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게 눈꼴시었던 걸까?
아니, 그건 아닐 터다.
돌돔은 빡집중하고 한 보람을 스스로 느낄 만큼 내가 봐도 완벽하게 손질해놨고, 딸이 친구랑 좀 가깝게 지낸다고 심통을 부릴 만큼 유민하 셰프가 속이 좁은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다.
…… 아니 뭐, 속이 좁은 것과 깐깐함이 도를 넘은 건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지 않겠냐마는, 아무튼 내가 보기엔 그러하다.
그러면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걸까.
'혹시…….'
돔을 손질할 때 셰프와 나눈 대화 때문일까.
그때는 정말 진지하게 해체에 집중하고 있던 탓에 거의 머리에서 필터링이 안 된 수준으로 대답이 나온 거였는데, 그걸 듣고 '오호라, 네가 그렇게 디저트가 중요해? 디저트 섹션으로 따라와' 같은 생각을 하신 건…….
"……하하, 설마 그렇겠어."
고작 그런 대화로 인사권을 마음대로 휘두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럴 리 없다.
…… 없겠지?
내 입으로 말하고도 튀어나오는 의심에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주어진 일을 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아……."
진짜, 남의 돈으로 벌어먹기 참 힘든 동네다.
빨리 내 식당이나 차려야지.
이런 상황에 처하니 오히려 각오가 단단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 날 부수지 못하는 고난은 날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 계속 이러다간 조만간 정말 부서질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