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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48화 (248/403)

248. 불편한 공동작업.-2-

"마침 잘됐네요. 아침 준비는 다 끝낸 것 같은데, 좀 도와줄래요?"

유민하 셰프는 눈을 휘릭 굴려 주방 상태를 확인하고는 곧장 그렇게 말씀하셨다. 품에는 제법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가 2단으로 쌓여 있는 것이, 손가락이 파고든 것을 보면 만만찮은 무게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당연히 한 가지뿐이었다.

"아, 옙. 물론입죠."

"고마워요."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닙니까. 에헤헤.

…… 라고, 백예은이 지금 내 옆에 있었다면 비굴한 척 농담이라도 해봤겠지만 아쉽게도 난 혼자 있을 때 그런 소릴 할 깡은 없다.

아까 재료 손질을 끝내고 닦아두었던 칼과 도마를 집어 유민하 셰프 옆에 서자, 셰프가 스티로폼 박스를 두드리며 말했다.

"저녁때 사용할 생선을 사 왔어요. 반나절 숙성하고 바로 나가야 하니까 서두릅시다."

"예."

생선? 생선이라. 이래 보여도 생선은 나름 특기다. 오마카세 집에서 몇 년 동안 일한 짬이 어디 가진 않는다 이거야.

하지만 그런 자신감이 죽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대단치 않은 이유다. 그저, 스티로폼 안에 들어있던 물건이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놈이었을 뿐이다.

"어, 어……."

"……류찬혁 쿡, 생선 보는 눈이 있나 보네요? 어때요. 꽤 괜찮은 생선이죠?"

박스 뚜껑을 살짝 들춰보고 굳은 나를 보며 유민하 셰프가 평소 같지 않게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 꽤 괜찮은 수준이 아닌데요."

꼭 부채가 생각나는 실루엣.

회색빛 몸에 검은 줄무늬.

뾰족뾰족하게 돋은 등지느러미와 부리처럼 튀어나온 입.

화룡점정으로 족히 6자는 되어 보이는 사이즈까지.

"……대체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돌돔이다. 그것도 자연산. 최고품질이 분명하다.

작년에 부산에서 통째로 튀겨졌던 그놈보다 확연히 상태가 좋다. 아니, 이게 말이 돼? 어떻게 부산에서 건져 올린 것보다 상태가 좋아 보일 수 있지?

"장사를 20년 넘게 하다 보면 그런 인맥도 생기는 거예요. 학생이니 잘 배워둬요, 류찬혁 쿡."

한국은 인연, 혈연, 학연이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는 유민하 쿡의 얼굴에서 백예은의 그림자가 보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들떴다, 이 사람. 이렇게 좋은 물건을 구해서 굉장히 기분이 좋단 게 아주 잘 느껴진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나도 손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이 품질의 돌돔, 그것도 6자를 넘는 놈이면 못해도 키로당 십만은 넘는다.

그 말은 즉 손질 중 실수로 뼈에 살을 10그램만 남겨도 천 원을 손해 본다는 것. 아니 무슨 주머니 뒤져서 나오면 십 원당 한 대도 아니고. 오히려 그게 덜 무섭겠다.

거기다 특수부위를 골라내다 실수로 칼집이라도 내는 날엔…… 이야, 생각하기도 싫네.

"왜 그렇게 잔뜩 굳었어요? 못 하겠나요? 그럼 물러나도 좋아요."

"……아뇨, 아닙니다. 바로 시작할게요."

"좋아요. 그럼 먼저 해보세요."

유민하 셰프는 내 솜씨를 한 번 견식 해보겠다는 듯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다.

으, 속이 쓰려온다. 이러고 있자니 꼭 무슨 대회에서 심사위원 한 사람이 맨투맨 심사를 보는 기분이라고 할까. 유민하 셰프의 경력 등을 따지면 사실 반쯤은 맞는 소리란 게 웃길 지경이다.

"후우……."

심호흡, 심호흡. 이런 건 괜히 긴장해서 손 떨다가 망하는 거다. 손 한 번 삐끗하면 졸지에 세종대왕님이 비키니 시티 시장 자리에 출마하러 저 바닷속 깊은 곳 파인애플 집에 새 보금자리를 꾸미실지도 모를 일이다. 그 전에 집게사장한테 걸리지만 않는다면.

길게 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뺨을 빙글빙글 문질러 간단한 루틴을 거쳐주니 이제야 좀 긴장이 풀렸다.

뺨의 온기에 닿은 손가락도 딱 적당히 느슨한 감을 유지했다. 좋은 신호다. 칼을 너무 강하게 쥐면 괜히 안 해도 될 실수까지 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좋아. 준비는 끝이다. 이젠 행동만이 있을 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찬혁의 손에 쥐인 다마스커스 식칼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모습을 보며 유민하는 몰래 지은 작은 미소 위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

'훌륭해.'

찬혁의 생선 해체 솜씨는 말 그대로 훌륭한 수준이었다.

순식간에 내장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머리와 함께 내장을 몸통에서 분리해내는 섬세함, 마치 무른 순두부를 가르듯 순식간에 살과 뼈의 틈새를 가르는 신속함. 거기에 더해 생선을 조금 만진 걸로는 알 수 없는 볼살, 정수리살, 입술, 쓸개 따위의 특수부위를 정확히 구분하는 지식.

그 모든 면이 가히 완벽한 수준이다. 눈이 특히 높은 유민하가 보기에도 그러했으니. 일반인의 눈에는 달인의 손놀림처럼 보였으리라.

유민하는 그 손놀림과 과감함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보통 어떤 요리사든 비싼 재료를 다룰 때에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 법이다. 그러나 찬혁에게는 그런 긴장감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십수 년 동안 해온 일을 잠시 미뤄두고 있다가 다시 손에 잡은 사람처럼, 태연자약하게 첫 번째 돌돔의 손질을 마치고 지체없이 두 번째 돌돔을 꺼내 손질을 시작한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저 집중력.

뼈에서 살점 하나 허투루 낭비 않겠다는 듯, 생선의 몸통 반대편까지 투시할 것 같은 기세에는 유민하도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애당초 그녀가 갑자기 찬혁에게 돌돔 손질을 시킨 이유는 기본적인 실력을 조금 더 세부적으로 살피고 싶었던 탓도 있지만, 그 외에도 둘만의 대화를 통해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손놀림에 놀라 본론은 꺼내지도 못하고 있던 것이다.

"흠흠."

헛기침과 함께 찬혁의 주의를 살짝 돌린 유민하가 그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류찬혁 쿡.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예?"

"류찬혁 쿡은 이 주방에서 가장 중요한 섹션이 어디라고 생각하죠?"

온새미로의 크루는 여느 주방이 그렇듯 각각 여러 파트를 나누어 조리한다. 이전 찬혁이 일했던 잡무나 소스 섹션 이외에도 메인을 담당하는 메인 섹션이나 샐러드, 식사 따뤼를 관리하는 섹션까지.

무엇하나 빠질 수 없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분명 일의 경중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유민하가 질문에 앞서 찬혁의 집중력을 소모시킨 건 좀 더 진솔한 답변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그 작전은 스무스하게 성공하는 듯 보였다.

"저야 역시 가장 중요한 건 메인이라고 생각해요."

"메인?"

정석적인 선택지다. 유민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건 왜죠?"

"메인이라는 건 말 그대로 식당의 간판이잖아요. 메인 하나만 보고 가게를 다시 찾는 고객도 있는 만큼, 메인이 가게에서 가장 중요하단 건 당연한 거 아닐까요?"

"흐음……."

유민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메인은 어느 의미 코스 요리를 고르는 고객이 가장 먼저 보는 선택지이기에, 가장 큰 기대를 갖는 순서이기도 하다. 분명 찬혁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지금 그가 손질하고 있는 돌돔만 해도 오후에 가게를 찾을 특별한 고객을 위해 준비한 메인이지 않은가. 그녀도 메인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하는 바가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너무 심심한 대답이지 않을까. 유민하의 머리 한편에 그런 생각이 스친 그때, 두 마리 째 돌돔 손질을 끝낸 찬혁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가끔은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해요."

"다른 생각?"

"메인이 중요하다는 건 이제 막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도 아는 소리일 테니까요. 그래도 저는 다른 섹션도 메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음…… 디저트? 예. 디저트도 분명 메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디저트. 식사를 마무리하는 가벼운 입가심거리. 그것이 메인만큼 중요하다. 유민하가 보내는 의아한 시선에 찬혁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마지막 돌돔에 칼날을 올렸다.

"디저트라는 건 어느 업장을 가든 마지막 차례에 나오는 거잖아요. 말하자면 식당이 고객에게 보내는 작별인사가 디저트인 거죠."

"식당의 작별인사. 재미있는 말이네요."

"저희는 식당이잖아요? 그럼 한 번 찾아주신 고객님이 다음에도 한 번 더 찾아뵙게 만들려면 마지막 인사를 잘 드리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고 봐요."

거기다…….

잠시 말끝을 흐린 찬혁이 갑자기 안 그래도 날래게 움직이던 손을 배는 빠르게 움직였다. 과장 조금 보태어 칼끝이 제대로 눈에 잡히지 않을 만큼의 속도로.

'그게 최선이 아니었나?'

유민하가 깜짝 놀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찬혁은 순식간에 마무리한 세 번째 돌돔을 부위별로 정리한 뒤에 말을 이었다.

"전부 잘하고 마지막에 망쳐 버리면, 그것만큼 화나는 일도 없잖아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그런 거라."

말을 끝맺은 찬혁은 머리 한구석으로 회귀 전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반추했다. 그때의 자신의 삶을 되새기면, 찬혁의 생에는 결코 실패한 삶은 아니었다. 다만 마지막 매듭. 그것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했을 뿐이다.

옛 북유럽에는 운명의 세 여신이 있어서, 그들이 매만지는 실타래 한 올을 사람의 생애로 비유했다.

찬혁이 보기에 인생이란 새끼줄을 꼬아 매듭을 만드는 일과 같았다.

아무리 열심히 짚을 비벼 꼬아도, 마지막에 매듭을 제대로 묶지 못하면 전부 풀려서 허사가 되어 버리는 것이 인생.

유민하가 찬혁의 그런 속내까지 알 길은 없었겠으나,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충분히 찬혁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말이 너무 길었나요?"

"아뇨. 먼저 이상한 걸 물어본 건 저니까요. 나머지는 제가 끝내두도록 하죠. 류찬혁 쿡은 이만 휴식하세요."

"옙. 감사합니다."

제가 사용한 자리를 깨끗이 치우고 휴게실로 들어가는 찬혁을 잠시 바라본 유민하는 착혁이 마무리한 돌돔의 상태를 살폈다.

하나같이 깔끔하고 각이 딱딱 떨어지는 절단면,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하게 발라낸 내장과 깨끗하게 벗긴 껍질이 그 솜씨를 대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이 중요하다, 라."

과연. 허튼 말은 아니구나.

찬혁이 작업한 세 마리의 돌돔 중, 가장 마지막 한 마리는 유민하마저도 이것과 똑같이 처리하려면 꽤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완벽한 상태를 자랑했다.

"……좋아."

백예은의 지휘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과연 찬혁을 어디로 붙여주어야 그 성장에 더욱 큰 도움이 될까 줄곧 고민하던 유민하는 이제야 비로소 그가 자리할 곳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디저트 섹션, 한 번 맡겨볼까?"

과연 찬혁이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의 딸은 찬혁이라는 날카로운 칼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까.

괜한 기대감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반차를 낸 백예은의 출근이 모처럼 기대되는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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