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불편한 공동작업.-1-
백예은이 음식을 남긴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날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그날은 녀석이 혹시 처음 해본 주방장 대리 업무에 지쳐 어디 탈이라도 난 줄 알고 가슴을 졸였지만, 다음 날 백예은은 아픈 기색 하나 없이 멀쩡한 몸으로 출근했다.
"야, 너 괜찮아? 아침 먹었어?"
"……우리 혁이, 오늘 하루만 입 다물고 있을까?"
"……."
넹 눈나.
회귀 전, 후를 합치면 쉰 살 가까이 먹은 놈이 여고생 보고 누나라니…… 뭐, 어차피 동갑이니까 괜찮나.
분위기는 냉랭하게 날 밀어내던 어제와 똑같단 게 문제긴 했지만, 대충 그날 하루는 사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뭐 아무튼, 그 후로 하루가 더 지난 오늘도 온새미로의 주방은 순항 중이다.
다만 특필할 부분이 하나 있다면, 이전 백예은이 맡았던 주방장 대리 업무가 단발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일까.
그날 뒤로도 유민하 셰프는 당신이 판단하기에 여유와 바쁨이 적절히 혼재된 시간대가 되면 백예은을 대리 주방장으로 내세웠다.
솔직히 말해 내 입장에선 딱히 신경 쓰이는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누가 주방장 업무를 보든 결국 내가 할 일이 크게 변하진 않았고,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견해였을 뿐, 최소 년 단위로 온새미로에서 일한 크루에게는 그렇게 단순히 넘어갈 사안은 아닌 듯싶었다.
두 번째 대리 업무가 있던 어제도, 지금 막 마감을 시작한 오늘도 크루는 저들끼리 모여 쑥덕거리기 바쁘다.
"셰프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요?"
"나도 모르겠다. 우리가 언제 셰프 머릿속 상상하면서 일했냐."
"그건 그런데요…… 혹시 슬슬 물려주실 생각이신 게……."
"멍청한 소리 마. 예은이가 몰라보게 컸어도 아직 민증도 안 나온 학생인데. 셰프도 한창 정정하시고."
"근데 후계 교육 중이신 건 확실한 것 같지 않아요? 처음 하는 거 치고 너무 잘하잖아요. 미리 이거저거 가르치신 것 같은데."
"어, 그건 맞는 것 같다만……."
"하은이는 어떻게 하시려고 저러시는지 모르겠네요. 하은이는 이런 거 시키신 적 없잖아요."
"그거야……! 그, 뭐냐. 셰프도 생각이 다 있으시겠지. 이만 가자고. 어서."
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올 동안 조리복 차림 그대로 쑥덕거리던 크루가 갑자기 서로 손짓을 하더니 엉거주춤 어색한 동작으로 사방팔방 흩어진다.
이유야 뭐, 단순하다.
"왔냐."
"응."
다른 것도 아니고 당사자가 눈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계속할 순 없을 테니까 말이다.
적당히 활동하기 편한 추리닝을 입은 녀석의 머리칼은 배배 꼬여 엉망이다. 요리할 때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머리망으로 묶어놓은 탓이다.
백예은이 한쪽 어깨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연달아 손가락으로 빗질하며 꼬인 것을 대충 풀어냈다.
그걸 멀뚱멀뚱 지켜보던 내게 의아한 표정을 지은 녀석이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늘도 수고했어. 같이 갈 거지?"
"……어."
안 되겠다고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
나와 백예은의 귀갓길은 중간까지 경로가 겹친다. 내가 묵는 호텔은 가게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기에 그냥저냥 걸어 다닐만하고, 백예은은 그 중간쯤에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식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요 며칠 동안 함께 퇴근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만큼 조용한 퇴근길은 또 처음이다.
"……."
"……."
'처음이라고 해도 이제 고작 사흘째긴 하지만.'
오늘도 어제와 그제처럼 나보다 살짝 앞서서 걷는 백예은의 뒤를 따른다.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후덥지근하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은 그런 바람 때문이라고 탓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쯤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미묘한 어색함을 간신히 견디며 백예은의 뒤꽁무니를 쫄래쫄래 쫓아가던 그때, 돌연 백예은이 입을 열었다.
"신경 쓰지 마."
"응? 무, 뭘?"
"아까 크루 아저씨들이 한 말 있잖아."
"……들었어?"
"들은 건 아닌데, 대충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것 같아서."
뭐, 엄마가 갑자기 왜 저러느니, 언니는 어쩌느니, 가게가 어떻게 되느니 하는 얘기겠지. 라며 한숨을 내쉬는 백예은. 이쪽에 등을 돌리고 있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크게 들썩이는 어깨가 그 심정을 대변했다.
'너무 정확하게 답을 맞히니까 할 말이 없네.'
"아저씨들도 불안해서 그러시는 거야. 이게 평범한 일은 아니잖아."
그렇게 말해도 난 모른다. 여기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좀 시선을 바꾸면 이해가 아예 안 가는 것도 아니긴 한데…….'
온새미로 크루에게 유민하 셰프는 굉장히 특별한 존재다.
말하자면 망망대해의 북극성, 미궁 속 아리아드네의 실, 고속도로의 표지판 같은, 요컨대 헤매지 않게 자신을 이끌어주는 존재라고 할까.
그들에게 있어 유민하 셰프란 흔들리지 않는 이정표다. 설령 땅이 뒤집히고 하늘이 무너진대도.
솔직히,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온새미로 크루는 다들 대단한 쿡이다. 아마 반수 이상이 지금 당장 자신만의 가게를 너끈히 차릴 수 있는 실력을 갖췄겠지.
그런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이정표가 된다는 건 아주 힘든 일이다. 우민의 왕이 되는 건 쉬울지언정 능신能臣의 군주가 되는 건 어려운 것처럼.
그럼에도 유민하 셰프는 여성의 몸으로 그것을 해냈다.
여자는 전문 요리사를 하는 데에 이런저런 애로사항이 많이 꼽힌다.
노동 강도도 물론 그 이유 중 하나고, 그 외에도 이래저래 불편한 점이 많다.
아까 말한 머리카락 같은 것도 남자라면 왁스를 잔뜩 바르고 조리모를 쓰던가, 극단적인 경우에는 아예 밀어 버린다지만 여자는 그러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 중 하나가 바로 어머니란 말이 있듯이, 두 아이를 장성하도록 키우며 요리사 일을 병행한다는 건 얼마나 힘든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하지만 유민하 셰프는 그걸 해냈다.
해냈기에 그들의 이정표가 됐다.
헌데 갑자기 평생 따라온 이정표의 상태가 갑자기 이상해진 것이다.
'저렇게 흔들리는 것도 이상하진 않지.'
나도, 백예은도 유민하 셰프의 갑작스런 행동에 충분히 놀랐지만, 분명 우리 중 가장 크게 놀랐을 이들은 다름 아닌 온새미로의 크루이리라.
백예은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엄마도 갑자기 나한테 주방을 맡길 생각은 아니실 거야. 아마 이건…… 일종의 시험이라고 생각해."
"시험?"
"왜, 칼 갈다가 날이 잘 섰나 종이에 그어보는 것처럼."
종이에 그냥 그어보는 수준이라고? 그게?
이야, 역시 전국구를 넘어 세계구를 넘보는 셰프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걸까. 쉬움의 기준을 가뿐히 제 눈높이로 치환하시는 능력이 혀를 내두를 정도구만.
사람이 상상도 못 했던 일을 태연히 저지르는 모습에 아주 전율이 이는 기분이다.
"시험이라고 치자 그래. 그럼 넌 지금 어디까지 온 것 같은데?"
"글쎄? 한 1500에서 2000방쯤은 오지 않았을까?"
방이란 것은 숫돌의 거친 정도를 말한다. 숫자가 높을수록 부드러운 숫돌이며 보통 칼을 갈 때엔 거친 것부터 시작하여 점차 부드러운 숫돌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500방 정도 되는 숫돌은 기본적인 칼날의 각도나 모양을 잡기 위해.
1000방 정도라면 한 번 잡힌 모양이 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1500에서 2000방 정도라면…….
"간신히 주방에서 쓸 정도는 된다는 뜻이구만. 너무 박한 거 아니냐, 너네 아주머니."
"헤헤, 원래 엄마가 좀 그래."
보통 평범한 주방에서 사용하는 식칼이면 2000방 정도에서 연마를 끝내도 무방하겠으나, 유민하 셰프는 백예은이라는 칼을 가능한 한 최고의 상태로 연마하고픈 심정이겠지.
나도 안다. 원래 부모 마음이 다 그러니까.
'그렇다면…….'
2000방으로는 턱도 없다.
3000, 5000, 10000, 종국에는 숫돌 하나에 대략 5, 60만을 호가하는 30000방까지.
내가 본 유민하 셰프의 성미라면, 분명 그 경지를 노리고 있으리라.
그 말은 즉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다.
"……너, 인생 진짜 폈다."
"튼 게 아니라?"
"양심적으로 안 말하고 있던 건데."
"아이고, 배려가 참 깊으십니다. 감사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네."
백예은과 나는 서로를 보며 작게 킬킬댔다.
그래, 이런 별거 아닌 농담에도 웃을 수 있다는 건 정신상태가 그만큼 건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웃음은 여유의 발현. 아직 백예은에게는 충분히 여력이 남았다.
사람을 칼로 비유하자면, 백예은은 아직 단조 중인 칼날이다.
어떤 모양이 될지, 어떤 무늬가 나올지, 이제야 간신히 실루엣을 드러내기 시작한 참이기에 무엇 하나 장담할 수 있는 건 없지만, 그 어느 날붙이든 망치질과 담금질을 거치지 않으면 좋은 칼이 될 수 없는 법.
녀석을 부수지 못하는 망치질은 오히려 녀석을 더 단단한 칼날로 탈바꿈하게 도울 뿐이다.
그러니 난, 앞으로 백예은의 앞에 닥칠 고난과 역경에 갈채를 보낸다.
더욱 강하고, 예리한 칼날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녹을 떨궈내고 새로이 재단장하는 녹슨 칼의 응원이 부디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
이튿날 아침. 평소처럼 부랴부랴 업장에 출근한 나는 오늘도 조용한 주방에 발을 디뎠다.
오늘은 백예은이 반차를 내서 오전에는 출근하지 않는다. 아니, 뭐 오너 일가가 반차까지 내가며 쉬는가 싶지만 이게 또 월급 계산은 철저하다던가.
'나야 철저하면 좋지만.'
여기 일당이 한두 푼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
혹시 바깥에서 흙이라도 묻었을세라 발자국 한 번 남기는 것도 조심하며 조리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뒤 주방으로 들어섰다.
아침 업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처리하고 각 파트 조리대의 냉장고를 열어 재고를 살피면 끝.
나머지는 각 파트의 재고 상비량에 맞추어 재료를 손질하고 선입선출을 맞춰 채워놓은 뒤 주방 청소를 하는 것으로 영업 준비가 끝난다.
다른 주방이었다면 혼자서 하기엔 버거웠을 업무였겠으나, 온새미로 크루는 다들 하나같이 마감을 꼼꼼하게 처리하는 데다가 재료도 많이 부족하다 싶으면 알아서 채워놓는지라 일을 덜 수 있다.
"수평구조 주방 만만세다 진짜."
보통 다른 주방은, 특히 옛 베테랑이 많이 상주하는 주방일수록 후임에게 짬 때리는 건 기본 중 기본에 들어가는 소양이다.
주방의 안 좋은 풍습이지만, 사실 이것도 아주 예전에는 요리를 가르치기 위한 일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선임의 일거리를 대신 하면서 자연스레 자기보다 윗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요리란 몸을 움직일수록 배워지는 것이기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요즘 놈들이야 인터넷 방송인지 뭔지로 요리를 휙휙 배워서 가르칠 보람이 없는 신참이 너무 많이 늘었다며 투덜대던 악독한 요리 스승의 얼굴이 뜬금없이 눈앞을 스친다.
"후……."
부탁이니 제발 은퇴해달라고 신에게 몇 번을 빌었는지.
종국에는 정년퇴직 기간마저 넘기고 머리가 온통 희게 변할 때까지 가게를 지켰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완벽한 무신론자로 변해 있었다. 참고로 그 양반은 크리스천이었다. 미국인 평균이다.
뭐, 아무튼.
이런 잡생각을 하는 것도 전부 단순노동의 효율을 위해. 사실 효율보다는 재미, 혹은 지루함 때문이긴 하지만 이런 단순노동은 노동자의 텐션이 일의 효율을 좌지우지한다.
'노동요가 괜히 생겼겠어?'
어허라디야 이럇차 으럇차 얼쑤 좋다 흥겨운 그루브를 타면 어머나 놀라워라. 벌써 일이 끝났네!
…… 그래, 그냥 내가 빨리 움직여서 끝냈다. 가끔씩은 노동요로 180BPM 랩을 들을 때도 있는 법이라고 치자.
잠시 후, 비로소 모든 작업이 마무리 된 뒤에야 나도 뻐근한 몸을 풀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난 것은.
아니, 사실 누군가 같은 말을 붙일 필요도 없었다.
요 사흘간의 업무를 통해 이 주방에 슬슬 익숙해진 나는, 지금 주방에 출근하는 인물이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찰나면서도 영원 같은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그 사람. 유민하 셰프가 주방에 얼굴도장을 찍었다.
"……아, 좋은 아침이에요, 류찬혁 쿡."
"좋은 아침입니다, 셰프."
유민하 셰프 특유의 철괴처럼 무뚝뚝한 눈빛을 마주하자,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유민하 셰프랑 단둘이 보는 건 처음이지 않나?
어쩐지 유민하 셰프의 눈빛에 기이한 빛이 감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