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 라인 스왑.-6-
이래저래 좋은 말, 안 좋은 말 가리지 않고 듣는 한국이지만 그래도 이 나라 또한 좋은 점이 있는데, 그중 특필할 만한 것이 바로 치안이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미성년자, 아니. 그냥 누가 됐든 한두 명이서 밤거리를 거닐면서 사지 멀쩡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길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대단한 일이다.
'한국이면…… 해봤자 삥 좀 뜯기는 정도겠지.'
적어도 삥을 뜯겠다고 총구를 들이미는 놈들은 없으니까. 아니 미국은 진짜 그런다니까?
퇴근길에 내게 다가오는 사람을 보면 다른 것보다 먼저 '저 사람이 과연 총을 가졌을까?' 같은 고민이 앞서던 시절을 되새기면 한국은 그야말로 천국 그 자체다. 거기다 한국은 신선식품 가격이 제법 싼 편이라 요리사 입장에서도 편하고.
호텔에 들러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강남역에 도착해 서성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때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 정도로는 총포 소지 권한을 쉽게 딸 수가 없어서 비싼 돈 주고 호신용 권총 한 자루를 불법으로 구해서 갖고 다녔는데, 그걸로도 불안했던 걸 생각하면 역시 한국이 치안은 훨씬 낫다. 주에 따라 다르기야 하겠지만 평균적으로는 말이다.
뭐 아무튼, 초저녁을 살짝 지난 8시. 이 정도면 아직도 학교에서 야자나 하고 있을 시간이니 아주 늦은 시간은 아니다.
더군다나 다른 곳도 아니고 강남인지라 가로등이며 헤드라이트 따위가 과할 정도로 많아 과장 조금 보태서 대낮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나저나 얘는 언제 오는 거야?"
아무리 여자가 남자보다 준비시간이 더 길다지만 내가 여기 죽치고 있은 지도 벌써 30분이 다 되어간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늦는다.
슬슬 밀려오는 두통을 참고 있자니, 비로소 비둘기가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혁아!"
아까까지만 해도 질리도록 들었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녀석이 그곳에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멜빵 치마. 끝자락이 비대칭인 게 조금 신기한 옷이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의 사복 차림을 보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이던가? 백예은과 같이 활동할 때는 보통 학교 행사일 때가 많았으니까.
그냥 반팔 셔츠에 아무 바지나 대충 걸치고 온 나에 비해, 백예은은 확실히 '코디'라고 불릴 만한 모습을 하고 왔다.
손을 흔들며 달려온 녀석이 흔들던 손으로 내 팔을 잡더니 잡아당긴다. 여자애치고 쓸데없이 악력과 근력이 좋아서 미묘하게 아프다. 아니, 요리사니까 쓸데없진 않구나.
"가자!"
어딜?
그렇게 묻기도 전에 나는 녀석의 손짓에 맞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여튼 맞춰주기 힘든 녀석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
녀석이 날 데리고 온 곳은 주문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가격적인 면으로 보면 온새미로의 10분의 1 정도일까. 뭐, 그 정도여도 학생 수준엔 제법 부담이 크긴 했지만 말이다.
"혁이는 뭐 먹을래?"
"나는 낮에 고기 잔뜩 먹었으니까, 그냥 아무 파스타랑 라자냐, 거기에 치킨 샐러드."
"파스타는 봉골레파스타 추천할게. 여기 그거 맛있거든."
"그럼 그걸로. 여기 자주 와봤어?"
"응. 얼마 전에 언니랑도 왔어."
"그러냐."
메뉴판을 거의 얼굴을 박을 기세로 탐독하는 백예은의 얼굴을 살짝 살폈다.
이전과 달리 백하은 쿡의 이름이 나왔음에도 표정은 여전히 밝다. 서로간의 골짜기를 잘 메웠다는 걸까. 다행이지만, 이걸 왜 내가 신경 쓰고 있나 싶은 생각도 든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상관없나.
백하은 쿡만이 아니라 유민하 셰프와의 관계도 그렇다. 어머니 앞에서의 실패를 그렇게 두려워하던 녀석이 그렇게 대담한 도전을 떡하니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그 지시…….'
내가 지시할 때랑 묘하게 닮았었지.
꼭 나를 닮은 누군가가 내게 지시를 내리는 느낌이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아마 내가 그 자리에 있어도 그렇게 지시를 내릴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
어찌저찌 잘 해나가고는 있지만 난 기껏해야 주방 근무 1일 차인 신삥이다. 주방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단 뜻이다.
거기에 더해 주방 안에서 길게 이야기를 나눠 본 사람이라곤 해봤자 김정우 쿡 정도. 주방에 대한 이해도, 크루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상태에서 뭘 어쩌겠는가.
"어디 보자…… 이거랑, 이거랑…… 아, 이거하고……."
내 스타일을 모방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건 백예은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천재는 사람이 상상하지 못한 해답을 내놓는다고 했던가. 정말, 오래 살다 보면 그 말이 허풍이 아니란 걸 느낀다.
해답을 내놓을 수 있기에 천재라고 한다. 옛 요리 스승 중 한 분이 한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다. 언제나 자기 속에 해답을 내놓기 위한 양식을 쌓으며 살아가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자기 자신은 어지간히도 대단한 양반이었지만 말이다.
백예은의 얼굴을 보며 옛 향수를 추억하고 있자니, 녀석이 드디어 결정을 끝냈는지 벌떡 고개를 들었다.
"실례합니다. 여기 주문할게요!"
"예."
"어, 우선 봉골레파스타랑 채소라자냐, 치킨샐러드 주시구요. 거기에 로제파스타, 더블비프버거, 감자튀김이랑 마늘빵, 함박스테이크 정식하고 또……."
"에, 예? 자, 잠시만요!"
…… 적당히 좀 시켜라.
주문을 다 받은 뒤 일행이 더 오나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며 떠나는 점원을 보며 나는 참담한 표정을 간신히 숨길 수 있었다.
***
그야말로 상다리를 부러뜨릴 기세로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음식을 백예은은 기쁜 얼굴로 받아들였다. 이 테이블이 족히 네 명 이상을 너끈히 수용할 수 있단 것을 생각하면 경이적인 물량이었고, 찬혁은 그저 그 경이로움에 입을 다물고 제 몫의 음식을 챙길 뿐이다.
에너지 소모가 격한 일을 자주 하는 찬혁도 먹는 양이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많지만, 백예은 앞에서는 보름달 앞의 반딧불 신세였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오는 것 같은 광경에 찬혁은 포크와 나이프로 파스타를 깨작깨작 건드리다가 파스타를 포크로 찍어 입으로 옮겼다. 백예은이 호언장담한 대로 제법 괜찮은 맛에 찬혁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어때, 괜찮지?"
"…… 어. 잘 한다."
그 모습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백예은의 질문에 찬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만들면 이거랑 똑같게, 아님 더 맛있게 만들 수도 있지만…… 역시 요리는 그냥 만들어서 먹는 게 전부가 아니잖아? 가끔은 이렇게 사먹고 싶더라구."
"하긴, 너야 그렇겠다. 이만큼 만들어서 먹으려면 보통 힘든 게 아닐 테니까."
"뭐? 너무해. 많이 먹는다고 놀리는 거지. 나 그렇게 많이 안 먹는단 말이야."
한입에 수제 햄버거를 4분의 1씩 먹으면서 말은 잘해요. 찬혁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왠지 더 힘들어서 그래. 다른 날엔 이만큼 안 먹는단 말이야."
후반 영업 때는 몸보다 머리를 더 쓴 백예은이었으나, 영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머리를 쓴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일이다. 프로 체스기사나 바둑기사는 대국 한 번에 수천 칼로리를 소모한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그렇다고 얘 먹성이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애당초 평소에도 저만큼 먹지 않는가.
더 이상 고민해봤자 손해라는 생각에 찬혁은 제 몫의 음식에 집중했다.
그렇게 찬혁이 묵묵히 포크와 나이프를 놀리는 한편, 백예은은 볼이 부풀도록 입에 잔뜩 넣은 음식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음식에 푹 빠진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실상 그녀의 신경은 전부 제 앞에 있는 찬혁에게 쏠려 있었다.
분명히 음식을 씹고 있는데도 잘 맛이 안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에, 채 다 씹지도 않은 음식을 꿀꺽 삼킨 백예은은 괜히 함께 시킨 음료수 컵에 담긴 빨대를 입에 물었다.
"……."
찬혁은 신기한 사람이었다.
요리 실력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부분에서.
보고 있으면 꼭 그 나잇대 사람이 아닌 것처럼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다가도, 친구들과 어울릴 때엔 딱 겉모습에 어울리는 장난기가 나오기도 한다.
요리를 할 때는 항상 침착하고 진지하지만, 눈빛은 항상 모험을 꿈꾸는 어린아이 같다.
"혁이는 오빠 같아."
"뭐?"
찬혁이 먹던 손을 멈추고 웬 뜬구름 잡는 소리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느낌이."
"뭐, 여동생이 하나 있긴 하지."
백예은은 그런 뜻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었으나 찬혁은 감도 좋다면서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나저나 너, 대리 업무한 건 이번이 처음이야?"
"응. 처음이었어. 연습한 적도 없고. 왜? 너무 잘해서 놀랐어?"
"어."
움찔.
컵을 내려놓던 백예은의 손이 제자리에서 멈췄다. 장난으로 꺼낸 말에 이토록 쉽게 긍정해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백예은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찬혁이 말을 이었다.
"아마 나였어도 그렇겐 못 했을 거야. 아니, 못해. 그런데 처음 해봤다니까 좀 신기하네. 연습 정도는 해봤을 줄 알았어."
이어지는 칭찬 세례에 백예은은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셰프 흉내라도 낼 수 있었던 건 찬혁을 오랫동안 보며 배웠기 때문이기에, 찬혁의 말은 꼭 '날 그렇게 유심히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아마 실제로 목덜미가 빨갛게 물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괜히 말을 꺼내놓고 본전도 못 찾은 백예은은 입을 꾹 닫고 애꿎은 빨대를 입술로 짓씹으며 반격할 거리를 찾았다.
"나, 나도 해보니까 안 건데, 생각보다 되게 힘들더라!"
"그치? 힘들지? 이제 내 마음이 좀 이해가 되든?"
"조금은……? 근데 그건 알 것 같아. 지시를 잘 내리려면 자기 팀원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거."
"그렇지. 리더라는 게 힘든 이유가 자기 할 거 하면서 다른 사람 일도 신경 써야 되거든. 거기다 주방 규모가 커지면 일하는 게 한두 사람이 아니니까 한 사람 한 사람 따로따로 보고 있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머리를 굴려서 상상력을 써야 돼. 아, 내가 아는 사람이면 이 일은 이쯤 했겠구나. 그럼 다음 일은 뭘 시키면 되겠구나. 이런 거."
"응. 알 것 같아."
백예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녀의 입술이 장난기 섞인 호선을 그린다.
"그럼 혁이는 같이 요리할 때 항상 내 생각만 하고 있는 거네?"
"맞아. 매일같이 머리가 터질 정도로 너네 생각만 하면서 산다, 내가."
"무, 뭐?"
"그러니까 좀 알아서 잘 해줘라. 어? 장난도 그만 치고, 1학년 애들 좀 그만 놀리고."
너무 시원스러운 대답에 이번에는 목덜미를 넘어 귀까지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화들짝 놀라는 백예은을 보며 찬혁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아, 나 감자튀김 좀만 주라. 치킨 샐러드랑 바꾸자."
"어, 어. 응. 가져가."
"땡큐."
자기와 비교해 너무 담담한 태도를 고수하는 찬혁이 살짝 얄미워진 백예은이었으나, 별달리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백예은은 찬혁의 이런 면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끔은, 좋게 느껴질 때도 있긴 했지만.
이후로도 몇 마디의 대화가 이어졌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손해만 보고 물러나는 쪽은 백예은이었다.
그것이 몇 차례 반복되니, 찬혁이 식사를 마칠 때쯤이 됐음에도 백예은 앞에 깔린 음식은 반절이 넘게 남았다.
평소 같았다면 찬혁이 제 몫을 채 먹기도 전에 거뜬히 해치웠을 양이 그렇게 남으니 오히려 찬혁이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
"야 너 어디 아파?"
"아, 아니? 왜……?"
"먹는 게 시원찮아서. 평소 같았음 벌써 다 먹었을 거 아냐."
"……."
백예은은 괜히 심통이 났다.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얘는 사람을 먹보로만 보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었다. 본인의 모습을 되돌아볼 여유가 있었다면 그러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어려운 주문이었다.
"…… 됐어. 오늘은 갈래."
"뭐? 남긴다고?"
"왜? 남기면 안 돼?"
안 될 건 없었다. 다만 백예은이 음식을 남기는 것을 처음 본 찬혁이 짐짓 놀랐을 뿐이다.
"너 진짜 몸 안 좋은 거 아니지? 빨리 집에 가서 쉬어야 되는 거 아냐?"
"…… 진짜 짜증 나."
이 와중에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백예은의 화를 돋웠다.
"야! 집 가면 푹 쉬고! 내일 일어나서도 상태 안 좋으면 병원 꼭 가보고!"
"하지 말라구!"
잔뜩 기대하고 나온 것 치곤, 큰 수확이 없는 저녁이었다.
하지만 붉어진 백예은의 귓불은 차가워진 밤바람 속에서도 쉬이 식지 않았다.
그녀 본인은, 그저 밤까지 더운 여름 날씨 때문으로 치부하고 싶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