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44화 (244/403)

244. 라인 스왑.-4-

"어, 엄마?"

'대리 주방장 역할을 맡아라.'

대리 주방장. 그 낯선 단어가 주는 어감이 너무나 생소한 나머지, 백예은은 그만 저도 모르게 집에서 부르듯 유민하를 불렀다.

'아.'

주방에서는 셰프라고 부르지 않으면 한 소리 들을 텐데.

그나마도 입이 열린 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은 사실.

하지만 유민하는 딱히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본인이 충격적인 화두를 던진 만큼, 대강의 실수는 그냥 넘어가겠다는 태도다.

아니, 그보다는 본인이 언급한 말에 더 신경을 쏟고 있다고 봐도 좋겠지.

"왜, 못 하겠어?"

네, 맞아오! 못 하겠어오!라고 쉽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런 대답을 쉬이 할 수 없다는 건 찬혁을 제외한 이 자리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온새미로의 주방에선 유민하의 말이 곧 법.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는 선택사항 따위는 없다.

"괜찮아. 엄마가 보조해줄 테니까."

그러나 유민하는 지금 '주방장'의 입장이 아닌, '보호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었다.

네가 정 할 수 없겠다면 거절해도 괜찮다는 완곡한 표현이었고, 백예은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

백예은의 눈동자가 흔들린 것도 잠시, 이윽고 그녀의 두 눈에 담긴 빛이 빠른 속도로 중심을 되찾았다. 그녀의 눈이 잠시 눈앞의 유민하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한다.

여전히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당황스런 표정을 지은 찬혁의 얼굴에서, 백예은은 방금 전 나눈 대화를 겹쳐보았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모른다. 그건 백예은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모른다고 하여 제자리에 가만 서 있으란 법은 없다. 멈추면 변하지 않으니까. 설령 한 걸음 앞에 떨어진 물건이라 하여도 제자리에서 서서 손만 뻗어선 닿지 않으니까.

"…… 응, 해볼게."

아마 1년 전의 그녀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에겐 짐이 많다. 부모의 기대, 누이와의 관계, 들쭉날쭉한 사춘기 여아의 감정.

1년 전의 그녀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무거운 인생을 살았다.

이미 두 손을 꼭 모아 만든 손접시에는 쥐어진 것이 너무도 많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흘러넘칠 만큼.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1년. 인간의 생물학적 수명을 따져보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엔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다.

백예은에게는 작년 한 해가 그런 시간이었다.

조금 더 다양한 것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조금 더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조금 더 짊어질 수 있는 무게가 늘어났다.

부담감이라는 건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 사회라는 것에 얽혀 있는 이상 그 누구도 부담감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얼마나 많은 부담을 짊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부담을 짊어지고 언제까지 당당할 수 있는지.

그 한계가 차차 늘어나는 것을, 사람들은 어른이 된다고 말한다.

백예은. 그녀는 아직 어른은 아니었으나, 어른이 되어갈 준비를 마쳐가고 있다.

"아니, 할게."

"…… 그래."

유민하가 웃었다.

아이를 훈육하는 것은 오롯이 부모의 몫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성장시키는 것만큼은 그 어떤 부모라 하여도 몫의 전부를 가질 수 없다. 모래밭에서 알을 깨고 태어난 새끼 거북이는 바다에 들어간 뒤에야 성장할 수 있는 법이다.

그녀의 딸이, 드디어 바다에 몸을 담갔다.

***

"못 따라가겠어……."

"예?"

"오늘 하루, 뭔가, 사건이 너무 많아……."

유민하 셰프의 충격 발언이 있고 잠시 후, 소스 파트로 넘어온 나는 내 옆에서 넋두리를 읊조리는 김정우 쿡의 말에 살짝 동의하고픈 마음이 샘솟았다.

"그러게요."

"너도 똑같아."

"예?"

야호, 시즌 2호 째 '예?'였다. 군대 막내 때 이랬으면 선임들이 내 주변에서 강강술래를 돌면서 환희의 댄스를 췄겠지. 지금 생각하면 그거 꼭 인디언 기우제 같지 않나 싶다.

'아니, 이게 아니라.'

김정우 쿡의 원망스런 시선을 피하고 주방 메인 섹션에 자리한 백예은에게로 눈을 돌렸다.

괜찮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내가 유민하 셰프의 모든 저력을 아는 건 아니지만,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에서 본다면 백예은과 유민하 셰프의 수준 차이는 그야말로 어마무시하다.

아마 혼자서 요리를 하는 거라면 그리 절망적일 정도의 차이는 아니리라.

개인에게는 한계가 있다. 두 팔, 두 다리.

사람의 육체는 어느 선 이상의 성능을 발휘할 수 없다.

구조적인 한계라고 해야 할까. 결국 팔다리 한 쌍 달린 건 변하지 않는다는 거다.

거기서 실력의 격차를 가르는 것은 어떤 일이 남았고 얼마나 걸리는지를 아는 계산력, 무엇을 우선순위로 세워야 할지 결정하는 판단력.

그리고 센스와 영감.

한 접시의 뛰어난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이다.

그런 면에서 백예은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굉장히 뛰어난 요리사다.

기본적으로 머리 굴리는 것이 남다르고, 말 그대로 천재적인 센스가 있다.

먹는 게 어디로 가진 않는다는 건지 동갑내기 남자애들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 체력과 행동력까지 겸비했다.

'그렇지만…….'

그걸로 유민하 셰프와 비빌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오'다.

몇 번이고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듯이 유민하 셰프의 진짜 가치는 본신의 요리솜씨가 전부는 아니다.

핵심은 통솔력. 주방의 요리사를 제 손발처럼 놀릴 수 있는 카리스마.

내가 아는 백예은은, 솔직히 말해 상당히 수동적인 캐릭터다.

허구한 날 장난이나 치면서 툭툭 신경 건드는 녀석이 어떻게 수동적이냐고 묻는다면 나도 할 말이 없긴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요리 쪽의 이야기다.

나라고 폼으로 1년이 넘게 대회반 팀장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내 크루의 버릇이나 습성 따위는 이미 파악이 끝난 지 오래다.

예를 들어 안창민은 주도적인 캐릭터다. 가끔 시키지 않은 사이드 따위를 자신이 판단하여 추가로 만들 때도 있고, 다른 아이들의 진행에 맞춰 요리 속도를 조절하거나, 혹은 다른 아이에게 남은 일을 자신이 가져와서 재빨리 끝내 놓을 때도 있다.

그에 비해 백예은은…… 말하자면 정말, 엄청나게 성능이 좋은 조리기계다.

주어진 지시를 자신이 가능한 최고의 퀄리티로, 최단시간 내에 뽑아낸다.

다만, 거기까지다. 만약 누군가 거기서 추가적인 지시를 하지 않으면 백예은은 움직이지 않는다. 수동적이라는 건 이런 면을 뜻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동료를 꼽으라면 나는 둘 사이에서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하다가 이윽고 백예은의 손을 들어주겠지만, 이상적인 오너의 상에 더 가까운 쪽을 꼽으라면 나는 안창민을 꼽을 것이다.

당초 나는 이런 이상함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나며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알게 된 거고. 당시에는 이유가 궁금했더랬지. 근데 이제는 대충 알겠다.

'이래서였구나.'

백예은의 스타일은 다름 아닌 이 온새미로의, 유민하 셰프의 휘하에서 가장 크게 활약할 수 있도록 최적화되었단 사실을.

말하자면 머릿속 업무의 프로세스가 그녀 전용으로 코딩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유민하 셰프의 교육관에 참견할 생각은 없지만…….'

이건 훌륭한 셰프를 키운다기보다 훌륭한 일꾼을 키우는 것이다. 그렇게 교육받은 아이가 갑자기 자리가 주어진다 해서 그 자리에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모르겠네…….'

그래. 바로 그게 문제지. 모르겠다. 전혀.

평소 같았다면 그렇지 않다는 게 내 의견이었겠지만 말이다…… 이게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의견이 달라질 수도 있는 법이거든.

백예은은 흔히 말하는 천재다. 내가 전국팔도,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면서도 쉬이 본 적 없는 계통의 재능충이라 이거다.

그런 사람들은 가끔 내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떡하니 내놓을 때가 있다. 기대조차 하지 않은 답을.

과연 백예은이 내게, 온새미로 크루에게, 그리고 본인의 어머니에게 보여줄 대답은 무엇일까.

걱정과 기대가 뒤 섞인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예은은 여전히 가만히 서서 심호흡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잠시 후, 조용하던 주방에 주문출력기 소리가 퍼졌다.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고 첫 번째 주문이 들어오는 소리. 백예은이 주방장의 위치에서 처음 받는 주문.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첫 지시가 튀어나왔다.

"다들 위치로. 시작할게요!"

좀처럼 들어본 적 없는 녀석의 외침이 달팽이관을 울린다. 호쾌한 목소리, 제법 괜찮은 목청에, 내 입꼬리가 작게 올라갔다.

기세는 좋다. 그럼 내가 해야 할 일은 걱정이 아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기왕 하는 직위역전이라면 제대로 해줘야 할 것 아닌가.

***

백예은은 생각했다.

과연 자신이 이 주방을 제대로 통솔하려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을까.

온새미로의 시스템을 가장 효율적으로,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이상적 롤모델은 틀림없이 그녀의 어머니, 유민하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이겠지.

'그치만…….'

백예은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녀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쿡으로서의 역량이라면 어떻게든 흉내라도 낼 수 있겠지만, 셰프로서의 역량을 비교하면 자신은 어머니의 발끝에도 다다르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다. 이 주방은 말하자면 아주 정밀한 기계다.

장인이 손수 제작한 시계같이, 기계로 출력한 회로가 옹기종기 모인 기판같이.

그 핵심이 되는 톱니바퀴를 갈아 끼웠는데 원래 상태와 똑같이 작동하기를 바라는 건 과한 욕심이다. 백예은은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대안을 찾는다.

그녀는 처음 칼을 쥔 뒤부터 평생을 그녀의 어머니에게 교육받았지만, 요 1년 동안 겪은 경험의 무게는 결코 그것에 밀리지 않는다.

학교의 수업, 대회반 연습, 대회 실전.

그 많은 것들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해답은 그곳에 있었다.

백예은은 그녀가 단체 조리를 할 때마다, 그 구심점이 된 사람의 모습을 머리로 되새겼다.

사람을 다뤄본 경험은 없어도, 다뤄진 경험이라면 충분하다.

그렇기에 알 수 있다. 어떻게 다루어져야 자신과 같은 시스템에 익숙해진 요리사가 가장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지,

사람을 도구처럼 부릴 순 있어도, 도구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도구의 행세를 한 사람은 있어도, 사람 행세를 할 수 있는 도구는 없다.

그녀는 도구 행세를 해왔지만, 항상 어떻게 해야 최적의 도구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왔다. 생각. 생각하기에 사람은 존재한다고 하던가.

정말 그 말대로다. 백예은은 도구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다. 어느 의미 주인보다도 제 쓰임새를 아는 도구다.

그것에 입각하고, 뇌리에 깊게 박힌 누군가의 모습을 덧씌운다.

"각자 조리 시작하시고, 끝나면 바로 보고해주세요. 특별히 지시 없는 한 주문 따라서 계속 조리합니다. 각 파트 속도 조절은 제가 관리합니다."

찬혁의 방식이다.

무엇보다 크루 간 소통을 중요시하는 찬혁의 방식은, 분명 온새미로 크루에게는 상극에 가깝겠지. 익숙하지 않은 방식을 크루에게 강요하면 분명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 조절하면 돼.'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두 리더의 방식을 섞어, 그녀만의 방식으로 조율하여 재창조하는 것.

그게 지금의 그녀가 내린 해답.

보고라는 생소한 말에 잠시 머뭇거리는 크루 사이에서, 한 사람의 외침이 돌아온다.

"예, 셰프!"

굳이 누군지 안 봐도 알 수 있다. 1년 반이 넘게 들어온 목소리를 어떻게 잊겠는가.

눈알을 굴려 힐끗 옆을 바라본 백예은과 마침 그녀를 바라보던 찬혁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입가에 비슷한 느낌의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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