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42화 (242/403)

242. 라인 스왑.-2-

잠깐이라도 깊게 생각해봤다면 분명 이렇게 되리란 걸 알았으리라.

성심고에서 부른 학생을 같은 성심고에 다니는 자신의 딸에게 맡긴다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일임을 말이다.

거기다 주방을 이렇게 관리하는 사람이 내 인적사항을 아예 조사하지 않았을 리도 없다. 그냥 TV나 잡지, 학교에서 주는 이력서 따위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었을 테니까.

같은 대회반을 다니는 자녀와 친구일 것이란 건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러니 이런 상황에 오게 된 건 어찌 보면 사귀필정이겠지.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하나 있다면…….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엄마가 웬일로 견습을 받아줬대서 누군가 했더니. 혁이가 올 줄은 몰랐어."

"어…… 미안하다. 요즘 바쁘다 보니 좀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어."

내가 온새미로에 온다는 걸, 얘한테 말하지 않았다는 거다.

"온다면 온다고 말 좀 해주면 어디 덧나? 나 놀라게 하려고 그런 거야?"

아니, 내가 굳이 일부러 숨기려고 그런 게 아니라 딱히 말할 기회가 없을 뿐이었다.

내가 온새미로에 오기로 결정한 건 거의 방학식이 시작하기 직전의 일이었고, 그 뒤로 따로 만나질 못했으니까.

물론 온새미로에 올 때 잘하면 얘랑 만날 수 있겠지 싶은 생각에 딱히 연락할 생각을 안 하고 있던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말이다.

"섭섭해. 혁이는 친구 집에 갈 때 전화도 안 하고 가고 그런 성격이야?"

"어…… 아니, 친구 집에 가본 적이 딱히 없는데."

"……하긴, 혁이는 쉽게 친구 사귀기 힘들어 보이긴 해."

무슨 뜻이냐 인마. 사람을 선천적 아싸처럼 취급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런데 너네 아주머니가 나 왔다고 이야기 안 해주신 거야?"

"응. 그냥 학생 한 명 견습으로 받았다고만 하셨어."

그거 참, 심술궂은 면이 있으신 분이구만. 아니면 딱히 이름을 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거나.

외부인으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내막에 대한 상상도 잠시, 그 후에도 조금 더 심통함을 내비친 백예은이 내게 단어장처럼 묶인 종이 쪽지를 건넸다.

"이건 뭐냐?"

"우리 가게 레시피."

그 말에 쪽지로 나가던 손이 멈칫, 하고 제자리에서 정지했다.

무협 느낌으로 말하자면 가게의 레시피란 건 무공비급이나 마찬가지다. 거기다 온새미로 수준의 가게라면 국내에서는 가히 구대문파 수준에 범접할 터. 그런 걸 오늘 첫 출근한 견습한테 대충 넘겨주다니.

"……막 줘도 되는 거야?"

"괜찮아. 어차피 딴 데 줘봤자 제대로 만들지도 못할 건데 뭐."

하긴, 초식을 알아봤자 심법이 없으면 그냥 춤사위지.

초식이 조리법이라면 심법은 재료다. 이만한 재료를 쓰면서 수익을 남기려면 어지간한 수준의 업장으론 어림도 없다.

결국 조심스레 그 레시피를 받아 든 나를 보며 백예은이 말을 이었다.

"오픈까지 시간 좀 남았으니까 그때까지 외워둬."

"오케이."

이만한 분량의 레시피를 통째로 외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나도 백예은도 그 점을 딱히 지적하진 않았다.

이게 별거 아니라는 게 아니다. 다만 이 녀석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신뢰의 표현이었고, 나는 그 신뢰가 틀리지 않았다고 증명하기만 하면 되니까.

꼭 커피 한 잔 건넨 것 같은 가벼운 말투로 백예은이 물었다.

"주방 동선은 좀 알 것 같아?"

"얼추 파악했어."

"음…… 아마 우리 가게가 조금 특이할 건데, 너무 놀라지 마."

"그럴 것 같더라. 주방 보면 대충 감 잡히니까 걱정 마."

백예은의 여러 질문에 대답하는 와중에도 내 눈은 녀석이 준 레시피 북에 못 박히듯 고정되어 있었다.

'오…….'

과연, 대단한 가게다. 새삼 그렇게 느꼈다.

온새미로는 완전전통을 중시하는 안가람과는 달리 여러 나라의 것들과 섞인 퓨전 한식을 고객에게 제공한다.

예를 들어 한식에서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요리법인 오븐조리나 기름에 푹 담가서 튀기는 딥프라잉 같은 게 레시피에서 가끔 얼굴을 비추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요리 또한 서양처럼 코스로 나가지만, 그러면서도 정통 한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며. 밑반찬 등의 요소에서 찾아볼 수 있듯 묘하게 한국적인 정서를 자아내는 느낌이 든다.

'이런 식이구나.'

백예은의 말대로, 남이 쉽게 따라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새삼 이해가 된다.

퓨전요리라는 건 어려운 장르다 결코 대충 섞어놓는다고 해결되는 장르가 아니다.

'그걸 모르는 양반들이 블루베리전 같은 걸 외국에 한식을 홍보한답시고 갖다 팔았지…….'

다시 생각하면 참 웃기지도 않는 일화다. 그걸 만들 돈으로 육성기관을 지원했으면 차라리 더 성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퓨전요리에서 제일 중요한 건 밸런스니까.'

온고지신이라는 말처럼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타파한다는 생각만으로는 안 된다. 고유의 멋스러움을 지키면서 참신함을 뽐내는 것.

당연하게도 그건 굉장히 어렵다. 말만으로는 내가 페이커 다섯을 상대로 펜타킬도 낼 수 있을지언정 현실에선 거의 절대 불가능하듯이, 그 밸런스를 적절하게 잡을 줄 아는 뛰어난 센스가 필요하다.

요리의 플레이팅이 그 대표적인 밸런스를 잡는 방법 중 하나겠지만, 재료를 고르는 안목 같은 것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식자재는 풍토에 따라 맛이 휙휙 바뀌니 원'

농산물의 맛은 토질, 수질, 비가 내리는 주기, 일조량 등에 따라 바뀐다.

축산물의 맛은 사료, 목초, 땅의 너비, 축사 환경 등에 따라 바뀐다.

해산물의 맛은 수온, 해류, 먹이, 수심 등에 따라 바뀐다.

그렇기에 그 나라 음식 본연의 맛은 현지에서만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조리법, 조리에 쓰는 도구, 불을 떼는 재료나 음식에 쓰는 물과 기름, 조미료, 술 따위의 요인.

'그 모든 밸런스를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을 장인이라고 하는 거지.'

이만한 솜씨는 쉬이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줘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말이 허세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외부인사에게 주는 것 치곤 상당히 세심한 부분까지 쓰인 레시피북의 내용에 종종 감탄사를 터트리며 넋이 빠져라 읽기도 잠시, 이윽고 마지막 장을 덮었다.

"됐어. 기억했다."

"벌써? 잘 할 줄은 알았어도 이렇게 빨리 할 줄은 몰랐어. 역시 혁이."

"괜히 비행기 태우지 마. 이게 잘 쓰여 있어서 그래."

레시피가 명료하고 정확할수록 이해도,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굴리기도 편하다.

그런 면에서 이 레시피 북은 좋다. 쓴 사람이 어떤 부분이 중요하고, 어떤 부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세심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아, 으, 응. 고마워."

"?"

고맙다고? 이 경우는 오히려 내가 이걸 인수인계 해준 사람한테 고마워야 하는 입장인데. 좀 핀트가 엇나간 감사에 나도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흐, 흐흠. 슬슬 일 시작하자. 레시피 외웠으면 뭐부터 해야 할지 알겠지?"

"어."

요리사가 별거 있겠는가. 결국 막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재료손질. 그리고 청소.

어느 대단한 곳이든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

온새미로에서 아침 준비를 하는 당번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주방을 찾는 건 다름 아닌 온새미로의 주방장인 유민하다.

새벽 일찍 시장에 직접 나가 특유의 까다로운 안목으로 고르고 고른 재료를 주방에 인계한 뒤 영업 준비를 시작하는 것이 기본적인 루틴.

오늘 아침도 그 루틴은 깨지지 않았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차 키를 직원에게 건넨 뒤, 단에 예리한 각이 설 정도로 빳빳하게 다림질 된 조리복을 입고 주방에 들어서는 유민하.

다만 오늘은 무언가 다르다.

그녀가 아니라 주방 쪽이.

"음?"

평소 같았으면 장사 준비를 하고 있을 막내들이 분주히 일하는 소리가 들려야 할 주방이 묘하게 조용하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

평소 맡지 못한 묘하게 고소한 냄새. 이미 온갖 식자재를 볶고 끓이는 냄새가 뒤섞여 혼란스런 주방 속에서 특이한 냄새 하나만을 정확히 포착하는 후각은 그야말로 놀라운 수준이었으나, 유민하에게는 크게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냄새의 원천. 그녀의 관심은 이미 그쪽을 향하고 있었다.

유민하는 주방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마치 미간을 딱밤으로 맞은 것 같은 얼얼함에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야, 혀, 혁아? 엄마 곧 오신다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밥은 잘만 먹네. 좀 더 먹어. 얼른 먹어야 치울 거 아니야."

"아니, 그러니까 이게 맛은 있는데, 그게……."

주방의 가스 화구 앞에 선 두 사람, 찬혁와 백예은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냥 서서 대화를 나누는 것뿐이었다면 유민하도 이토록 놀랍진 않았으리라.

화구 위에 올라간 커다란 프라이팬. 그리고 두 사람의 손에 들린 접시.

그녀가 맡은 고소한 냄새는 다름 아닌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유민하가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제자리에 멈춰 서자, 갑작스런 소리에 깜짝 놀란 두 사람의 고개가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아."

"어."

두 사람의 입에서 외마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짧은 침묵. 고착상태를 가장 먼저 깨트린 것은 순식간에 접시를 내려놓고 반듯한 자세로 선 백예은이었다.

"셰, 셰프! 좋은 아침입니다!"

'셰프?'

그 호칭에 고개를 잠시 갸웃거린 찬혁이었으나, 찬혁 또한 재빨리 접시를 정리하고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셰프. 류찬혁입니다."

고개를 숙인 두 사람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본 유민하는, 이윽고 높낮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평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요. 좋은 아침입니다. 백예은 쿡, 류찬혁 쿡."

'아, 엄마 화 났을 때 목소리다.'

백예은은 잠시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찬혁에게 원망스런 눈총을 몰래 보내고 있자니, 유민하가 말을 이었다.

"아침 준비는 어떻게 됐죠?"

"전부 끝내뒀습니다."

찬혁이 답했다. 그러나 유민하가 주목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전부?"

막내라고 해도 온새미로의 주방 막내는 다른 업장으로 가면 실장 정도는 쉬이 따낼 수 있는 인재들이다. 그런 인물들도 아침 준비를 마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린다. 적어도 그녀가 출근하기 이전에 작업을 끝내놓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그런데 학생 단 둘이서 벌써 그 많은 작업을 끝냈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무언가 놓친 것이 있거나, 아니면 정말 전부 끝냈거나.

그러나 유민하는 전자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찬혁 이전에 그녀의 딸인 백예은은 그런 기본적인 부분에서 결코 실수를 할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고생했어요. 빠진 거 없이 잘 해뒀네요."

그것도 완벽하게. 주방을 돌아다니며 준비 상태를 확인한 유민하가 일부러 뒷말을 빼고 답했다.

과연 성심고 대회반의 부장 역할을 맡을 능력은 있다는 것인가. 게슴츠레하게 내리깐 시선이 찬혁에게 닿았다.

"그래서, 이건 뭐죠?"

그녀의 시선이 이번에는 화구 위에 올라간 프라이팬으로 향했다. 아직 채 비지 않은 프라이팬 속 내용물은 여전히 따스한 온기와 코를 간지럽히는 고소한 향을 내뿜고 있다.

이번에는 백예은이 나서서 답했다.

"아, 엄, 아니. 셰프. 이게, 류찬혁 쿡이 아침을 아직 못 먹었다고 해서……."

"그래서, 주방에서 아침을 만들어 먹었다고요?"

"예……."

백예은이 말끝을 흐렸다.

물론 사람이 배고플 수 있다. 배고프면 요리 좀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그걸 온새미로의 주방에서 만들어 먹는 간 큰 쿡은 여태껏 없었다.

이 주방에서 그녀가 허가하지 않은 조리는 금지다. 강제는 아니지만,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애당초 누군가 끼어들어 다른 요리를 할 여유가 없는 것도 이유였지만.

또다시 침묵이 흐른다.

그저 고개를 숙인 딸을 빤히 내려다보는 유민하와, 그 시선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백예은.

그때, 찬혁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얇은 얼음막 같은 침묵이 산산이 깨졌다.

"아, 갈릭 버터 볶음밥을 만들었는데요. 너무 일찍 나온답시고 아침을 깜빡해서요. 괜찮으시면 셰프도 드세요.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끈따끈 합니다."

"……."

이 분위기가 부담스럽지도 않은지, 찬혁은 마치 포장마자 주인이 떡볶이 한 접시를 손님에게 서비스로 주는 것 마냥 자연스러운 태도로 볶음밥을 접시에 담아 건넸다.

부지불식간에 그녀의 손에 들린 볶음밥 한 접시와 숟가락.

그녀의 냉랭한 시선이 잠시 볶음밥에 빼앗긴 그때, 백예은은 그야말로 엄청난 얼굴이 되어 찬혁을 바라봤다. 저절로 밴 식은땀이 그녀의 이마를 가득 메웠다.

'어, 어쩌려고 그래?!'

여태껏 이 주방에서 이런 행동을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백예은이 놀랄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고마워요."

유민하가. 주방에서 깐깐하기로는 대한민국에 적수가 없다는 그녀의 어머니가 순순히 찬혁이 넘긴 볶음밥을 한술 떠 입에 집어넣은 것이다!

한 술, 두 술.

백예은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유민하가 접시를 내려놓았다.

접시는 밥풀 한톨 없이 깨끗했다.

"잘 먹었어요. 맛있네요."

"감사합니다."

심지어 칭찬이라니? 백예은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치켜들었으나, 유민하는 이미 그들에게 등을 돌린 뒤였다.

"아침 준비 고생했어요. 마저 먹고 휴식한 다음 일 시작하세요."

"아, 예!"

"예, 셰프."

등 뒤에서 자신의 딸이 놀란 눈초리를 향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민하는 입안에 남은 음식의 맛을 물로 헹궈냈다.

맛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입안에 맛이 남으면 업무 때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혀에 남은 맛을 지우는 몸과는 달리, 그녀의 머리는 찬혁에 대한 평가를 매섭게 내리고 있었다.

실력, 훌륭하다.

배짱, 제법이다.

능률, 보류한다.

아직 미지수인 부분이 많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다루기 어려운 아이네.'

마치 너무 날카로워 주인의 뜻과 상관없이 사정없이 대상을 베는, 예리하게 날 선 도검처럼.

'재밌어.'

유민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주방에서는 실로 보기 힘든 그녀의 표정 변화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