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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41화 (241/403)

241. 라인 스왑.-1-

"온새미로에서 컨택이 왔다고?"

안효민 선배가 보기 드문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오랜만에 얼굴 비친다 싶더니, 재밌는 이야기를 들고 왔네."

선배의 말대로, 요 근래에 시험이니 공부니 할 일이 많은 터라 대회반에서 선배 얼굴을 본 게 거의 몇 주 만이었다. 점심시간이나 반 이동 중에 잠깐잠깐 스치듯 마주치긴 했지만, 인사나 잠깐 하는 정도였고.

거기다 선배도 이제 3학년. 진학 고민으로 한창 바쁠 시기라 더더욱 쉬이 만나지 못했다.

그나마 학기말이 되어 여유가 생긴 덕에 이렇게 잠깐이나마 대화할 시간이 난 것이다.

뭐, 선배는 내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가져온 게 더 반가운 눈치였지만 말이다.

"와, 온새미로 아시는구나."

국어책을 읽듯 과장스럽게 놀라는 날 보며 선배가 웃었다.

"당연히 알지. 명색이 라이벌인데."

"안가람하고 라이벌 소리 들으면 간 떨려서 못 살 것 같은데 말이죠."

"괜히 비행기 태우지 마. 뭐 대단한 거라고."

그야 요리사라는 게 태생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기 힘든 서비스 직종이긴 하지만, 안가람쯤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사람들은 종종 자기를 제일 잘 아는 건 자신이라고 하지만, 가끔씩 스스로를 가장 모르는 사람이 될 때도 있는 법이랬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배가 이어 말했다.

"아무튼, 온새미로에서 지명이 온 건 처음 봤어."

"그렇게 드문 일이에요?"

"응. 적어도 내 대에는 지명도, 지원자도 없었으니까."

애당초 지원자를 안 받는 곳이라며 선배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 주인인 유 아주머니가 장난 아니게 까다롭거든. 직원도 되게 이것저것 많이 보면서 뽑는다고 하고."

"그래요?"

셰프가 까다롭게 구는 건 전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이긴 해도 선배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어지간한 수준은 아니겠지.

그런 곳에서 어떻게 날 알고 지명을 넣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나저나 유 아주머니라니, 부르는 방법이 쓸데없이 친근하게 들려서 괜히 웃음이 나온다.

"다른 사람들이 라이벌이라고 하는 거지, 사실 그렇게 나쁜 사이는 아니야."

"하긴, 백하은 쿡도 일하고 있었으니까요."

"응. 그것도 유 아주머니 추천으로 온 거거든. 언니가 그랬었어."

얼마 전 심심풀이로 만들어 냉동고에 넣어뒀던 수제 아이스크림을 한가득 퍼온 선배가 말을 이었다.

"그야 뭐, 누가 더 잘 나가느냐 하는 자존심 싸움 같은 건 조금 할지 몰라도 아빠랑 유 아주머니 사이가 나쁜 건 아니거든. 두 분 다 같은 데서 요리 공부 하셨었다니까."

"같은 곳이요?"

"응. 우리 증조할아버지."

뭔가 숨겨진 비화 같은 걸 듣는 기분이었다. 선배의 증조부라 한다면 교장선생님의 부친 아니신가. 안가람 일가에서 가장 유명세가 높은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교장선생님이겠지만, 그 부친 또한 알려진 바가 없을 뿐이지 대대로 이어진 대령숙수의 직계 후손인 만큼 대단한 한식의 고수였으리라.

그런 분 아래에서 같이 수업을 받은 두 사람이 지금은 강남에서 선두 다툼을 하는 가게의 주인. 재밌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뭐, 증조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건 한창 갓난아기였을 때라 얼굴도 잘 기억 안 나지만……."

"그러게요. 선배가 갓난아기였던 시절은 잘 상상이 안 가요."

"그쪽이 더 궁금해?"

"조금요."

"조금이 아니라 많이 궁금해하란 말이야. 정 보고 싶음 보여 줄 수도 있는데."

"괜찮습니다."

"재미없긴."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볼을 부풀린 선배가 책상에 늘어지듯 엎어졌다. 실습실의 조리대는 통짜 철판이라 에어컨 바람에 차게 식어 있다. 무더위를 피하기에 딱 좋은 도구다.

"그래서, 이번엔 거기로 가려고?"

"예. 조금 고민하긴 했는데, 이번에는 온새미로로 가볼까 해서요."

지명을 넣어준 곳이 세 곳이나 됐기에 조금 고민하긴 했지만, 결국 선택은 온새미로였다.

다른 곳에 흥미가 없었다는 건 아니다. 다만, 가능한 젊을 때 다양한 경험을 해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다. 내가 회귀 전 호텔에 입사할 때 평균보다 살짝 낮은 스펙으로도 입사할 수 있었던 건 다양한 나라에서 근무한 경력이 높게 평가받은 덕분이었으니까.

그래도 정말 사이가 나쁘면 어쩌나 했는데 그런 것 같진 않으니 다행이다. 마음의 짐을 좀 던 느낌이라고 할까.

"그러면 아빠 실망하겠다. 안 그런 척 해도 내심 기대하시는 것 같았는데. 작년 겨울에도 안 왔잖아. 그랬더니 갑자기 TV에나 나오고."

"아하하……."

그때는 나도 잠깐 쉬러 간 거였단 말이지. 어째 이뤄지지 않는 꿈이 됐지만.

게슴츠레 뜬 눈으로 실실 웃는 선배에게 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질문을 건넸다.

"저, 선배. 혹시 아버님이 따로 좋아하시는 거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어쩔 수 없지. 이럴 땐 선물로라도 감정을 달래드릴 수밖에.

하지만 오션즈 브리타니아. 너흰 아니야.

***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방학식이 끝나고.

시험기간 내내 잠깐 들를 생각도 못 했던 집에 돌아가자마자 성대한 환영을 받은 나는 또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무슨 내가 출가외인도 아니고, 이러다가 집보다 바깥이 더 익숙해질 지경이다.

이번에는 따로 그쪽에서 지낼 곳을 마련해준 것도 아니기에 내가 직접 방을 잡아야 했다.

잡은 곳은 서울 외곽 쪽, 그리 비싸지 않은 비즈니스 호텔에서 일주일. 다만 이건 경비처리를 해주신다고 했기에 감사히 호의를 받았다.

아무리 몸은 똑같이 힘들다지만, 좋은 직장을 가르는 건 업무의 강도가 아닌 복지의 수준이라는 말이 절절하게 공감되는 일처리였다.

뭐, 일도 쉽고 복지까지 좋으면 금상첨화겠지만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겠어. 남의 돈으로 벌어먹는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내일부터 출근인가…….'

언젠가 이런 걸 하루, 일주일, 한 달 수준이 아니라 평생 하고 살아야 할 미래가 온다니…… 이런 미래, 난 견딜 수 없어! 응애, 나 아가 찬혁. 일하기 시러…….

…… 뭐, 그래. 이런 푸념을 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늦었지.

이미 할 거, 못 할 거 가리지 않고 다 해보고 돌아온 지가 언젠데. 편하게 사는 게 목적이었다면 애당초 학교를 제일 먼저 때려치웠겠지.

그냥 지금은, 힘들어도 버티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커리어를 쌓아 올라갈 뿐이다.

'거기다…….'

올해 말부터 시작될 대회를 생각하면, 슬슬 배움에도 시동을 걸어야 할 테고 말이다.

아무튼, 미래 걱정도 좋지만, 지금은 우선 당장 코앞에 당도한 일이 먼저다.

호텔에 체크인해서 짐을 대강 풀어두고, 내일 출근할 때 혹시라도 준비하다 늦는 일이 없게끔 정리를 끝마칠 때쯤이 되니 어느덧 창 바깥으로 저녁놀이 진다.

노을빛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

어떨 때엔 마음에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또 어떨 때엔 뭔가 사람의 쓸쓸함을 부추기는 힘이 있다.

"……."

이번엔 후자다. 뭐라고 해야 할까. 꼭 기러기 아빠가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자식도 없는 놈이 무슨 개소린가 싶긴 하지만.

그래…… 이렇게 호텔 침대에 홀로 앉아 멍하니 저런 예쁜 노을을 보고 있자니…….

"배가…… 고파졌다……."

…… 결론이 이상한 것 같지만, 그래. 결국은 그거다.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가야 살맛이 난다.

***

"여기가……."

출근 첫날. 일하기에 앞서 주방 구조라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원래 출근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가게에 나온 나는 건물 입구부터 감탄을 감추기 어려웠다.

대체 이 커다란 건물을 어떻게 관리하는 건지 때 하나 안 묻은 하얀 외벽이 번쩍번쩍 빛나는 게 아주 거울 대신 써도 될 것 같더라.

청소상태가 엄청난 건 홀도 마찬가지였다. 하얀 내장에 검은 테이블과 의자 따위의 가구, 그리고 살짝 포인트로 있는 금색 장식 몇 개로 이루어진 모노톤이 확실한 공간이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뭐라고 할까, 캐주얼한 복장으로 들어오기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드레스코드 같은 거 분명 있겠다 싶을 정도로.

아침부터 청소하느라 바쁜 홀 직원 분들에게 길을 물어 탈의실로 온 나는 직접 지참한 하얀 조리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뒤 주방으로 나왔다.

"이야, 이거……."

주방을 보면 대충 그 주방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깨끗한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조리도구 따위의 배치나 기물의 정리정돈 상태로 이 주방의 책임자가 어떤 식으로 주방을 관리하는지 알 수 있다고 해야겠지.

그런 점에서, 내가 내린 이 주방의 평가는 이렇다.

"…… 미치겠네, 이거."

이 주방의 주방장. 분명 말도 안 되게 깐깐한 성격이다.

사이즈 별로 구역이 확실하게 정해진 냄비나 접시 따위의 기물, 같은 종류만 모아놓은 조리도구가 담긴 철망. 뭐 이런 건 어느 주방에서나 볼 수 있는 거지만 내가 주목한 건 다른 거다.

조미료 통이 통일됐다. 종류별로, 아주 각을 잰 것처럼.

세상에 맙소사. 소름이 돋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조미료 같은 건 어지간하면 본래 제품에 나오는 통에 두고 사용하는 게 태반이다. 손님 상 위에 놓일 거라면 몰라도 손님 눈이 닿지 않는 주방에서 사용하는 건 십중팔구 본래 제품에서 포장만 뜯고 그대로 사용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여기 놓인 조미료는 아니다. 소금이나 설탕 따위의 가루 계열 조미료를 통에 따로 담아두고 사용하는 건 그러려니 하지만 간장이나 된장, 고추장, 꿀, 액젓 같은 게 전부 따로 전용 통이 있다니?

이 정도면 능률을 포기한 수준이다. 거의 집착에 가깝다.

'어지간한데.'

유민하 셰프. 실제로 얼굴을 만나 뵌 건 아마 작년 대회 때가 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그쪽에선 날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의문이지만, 과연. 대충 어떤 느낌일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이 주방, 조심해야 한다. 까딱하다 모가지가 날아가는 단두대에 올라간 것처럼.

일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벌써 긴장감이 온몸을 엄습한다.

이거, 혹시 좀 잘못된 선택이었던 거 아닐까? 그냥 마음 편하게 안가람에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아니, 아니다. 그래, 이런 주방도 다 경험이지. 좋게 생각하자. 좋게.

"후우."

한숨을 내뱉고 심기일전한 뒤, 시계를 살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출근 시간이 이르다. 출근 첫날이니만큼 다른 상급자에게서 교육을 받기 위함이다. 다른 주방 같았다면 그냥 다른 사람과 같은 시간에 출근시켜서 바로 일에 들어가게 했을 텐데, 이런 점도 묘하게 주방장의 성격을 연상할 수 있게 만든다.

'이제 슬슬…….'

원래 내가 출근하기로 한 시간. 어제 전화해서 물어본 바에 따르면 날 교육해줄 상급자가 곧 출근할 시간.

그 전까지 적당히 주방 파악을 마쳐둘 생각에 주방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주방의 구조를 보고 동선 파악, 냉장고 따위를 들여다보며 대강 식자재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자니 제법 시간이 빨리 흐른다.

그나저나 여기 진짜 대단하네. 무슨 마장동에 있는 고기집도 아니고 주방에 숙성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 냉장고 내부도 아예 식자재가 종류별로 칼각으로 정리되어 있고 말이다.

그 꼼꼼함과 철저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 아까 내가 들어온 주방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드디어 상급자가 온 모양이다.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나는 고개를 숙이며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부터 견습으로 일하게 된 류찬혁입니다."

1초, 2초, 3초.

꽤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

혹시 너무 갑작스럽게 인사하여 놀란 것인가 싶어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내 앞에 굳어 있던 사람이 섭섭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처음 보는 사이였어?"

"…… 어?"

백예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은 녀석이 팔짱을 낀 채 어딘가 심통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뭐지 이거, 상하역전세계인가?

학교에선 부장이었던 내가 직장에선 따까리?

그런 내용의 소설이 있으면 추천을 받고 싶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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