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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코트 지음
240. 한여름의 쟁탈전.-3-
서울시 서초구.
강남역을 기점으로 강남구와 서초구를 양분하는 교차로. 서초대로와 테헤란로가 맞닿는 장소.
대한민국의 최대 도시 서울. 그중에서도 가장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강남.
그리고 그 강남 최대의 노른자 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
온새미로는 바로 그러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단색單色적이다. 온새미로의 건물을 본 사람들은 대개 이러한 첫인상을 받고는 한다.
네모반듯한 외형의 새하얀 건물. 층수는 고작해야 지하 2층, 지상 3층에 불과하나 제법 커다란 넓이를 자랑하는 이 건물은 단색적이지만, 결코 단조롭지는 않다.
오로지 대리석으로만 만들어진 명공名工의 조각상을 보고 단조롭다고 비난하는 이가 있을까?
온새미로 또한 그와 같았다.
지어질 때부터 온새미로라는 시스템을 움직이기 위해 최적화된 인테리어. 십수 년이 지나도록 때 묻지 않은 건물의 아름다움조차 오로지 식당을 위해서.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면 결벽증이라도 걸린 거 아니냐며 혀를 내두르겠지만, 어느 의미 그 말은 정곡을 관통하는 사실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온새미로의 이런 모습은 말 그대로 그 주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으니까.
***
온새미로는 그 소재나 영업방식으로 알 수 있다시피 굉장히 비싼 값으로 식사를 제공하는 파인 다이닝이며, 완전예약제로 운영된다.
평범한 사람은 쉬이 접하기도 어려운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그 입지와 유명세 덕에 상류사회의 만남의 장으로 통하는 일도 많으며, 그 탓에 예약을 잡으려면 반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 만큼 온새미로의 주방은 언제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런 부분은 다른 평범한 식당과 비교해도 크게 다를 것이 없으나, 온새미로의 주방은 여타 주방과 전혀 다른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바쁜 주방. 열 명 남짓한 쿡과 보조 인원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주방 전체를 가득 메운다.
가스가 연소하는 소리, 지글지글 지지고 볶는 소리, 물이 끓고 뚜껑이 들썩이는 소리, 온갖 조리도구가 서로 부딪치고 마찰하며 만들어지는 쇳소리, 수도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 칼이 도마를 찍는 리드미컬한 소리.
어느 주방에서든 당연히 들릴법한 것들이기에 이게 무슨 대수인가 싶겠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그렇다. 주목해야 할 것은 결락된 것. '들리지 않는 소리'.
이 주방에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평범한 요리사가 보면 이해하지 못할 광경이다. 주방에서 일을 할 때엔 반드시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특히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이 함께 일할수록 누가 무엇이 필요한지, 누가 뭘 하고 있는지를 그때그때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말은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다.
'지금 누군가가 무엇을 필요로 하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말을 꺼낼 필요는 없다'고.
도통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나, 실제로 온새미로의 주방은 그것을 이루어냈다.
그것은 이 주방에 모인 요리사들이 베테랑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오래도록 손발을 맞춰온 경험으로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완전 예약제의 장점인 요리 중 변수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유를 포함하더라도 이런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
유민하. 온새미로의 주방장인 그녀의 초월적인 능력과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소리를 기계와 도구의 소음이 대신하는 것 같은 주방. 그런 주방 가운데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김정우 씨. 잠깐 저 좀 봐요."
온새미로의 주방에서 입을 열 권한을 가진 사람은 오직 한 명. 온새미로의 주인이자 주방의 장인 유민하 뿐이다.
"네, 넵!"
"……."
"……."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온 순간, 다른 요리사들이 움찔 몸을 떤다.
그들의 이마와 등골에 식은땀이 인다. 김정우라 불린 남자는 마치 형장의 처형자에게 호명이라도 당한 듯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리대에 선 유민하는 제 옆으로 온 김정우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조리대 위에 놓인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리대 위에는 요리에 쓰일 온갖 양념과 소스가 가득하다. 당연한 일이다. 애당초 이 조리대 위에는 그것들 외에 다른 것을 올려선 안 되었기에. 그게 이 주방의 룰 중 하나다.
대충 어림잡아 수십 종류의 양념. 유민하는 그 사이에서 양념 하나를 쏙 빼내어 집어 들었다.
"……!"
김정우. 그가 만든 양념. 쇠고기 석쇠숯불구이에 곁들일 오미자 소스였다.
유민하는 소스를 작은 티스푼으로 떠 손등에 몇 방울을 떨구곤 혀로 핥았다. 최대한 청결하게 맛을 확인해 보기 위한 방법. 혀끝으로 맛을 확인한 그녀가 이윽고 제 손에 들린 소스통을 김정우에게 내밀었다.
그가 경직된 동작으로 조심스럽게 소스통을 받아들자 유민하가 말을 이었다.
"가져가서 버리고 다시 만들어요. 10분 주죠."
힘들게 만든 요리를 버려라. 요리사로서는 참기 힘든 폭거였으나, 김정우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김정우라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박할 수 없다. 유민하에게는 그의 마음 따위보다 몇 갑절은 타당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소스 배합이 틀렸어요. 이번에 수확된 오미자는 당도가 높아서 평소보다 설탕 양을 줄여야 한다고 분명 말했었죠?"
"예."
"그 소스 500g을 만드는 데에 10만 원이 넘는 비용이 들어요. 이런 쓸데없는 낭비는 하지 마세요. 두 번은 없습니다."
"예!"
배합이 틀렸다고 해봐야 오미자와 설탕의 비율이 1:1에서 1:0.9 정도가 되는 차이. 실질적으로 그 맛의 차이는 크지 않겠지.
하지만 그녀는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는다.
자그마한 결점 하나 놓치지 않는 결벽증에 가까운 완벽주의자적 기질과 주방을 통제하는 카리스마의 결합.
누구도 이 주방에서 침묵을 지키라 강제하지 않는다. 이 침묵은 오로지 그녀의 권위가 자아낸 것이다.
그녀가 만든 권위가 아닌, 그녀를 흠모하는 온새미로의 요리사들이 만들어낸 권위.
권위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 그 어떤 대단한 기업이라도 다음 해를 기약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강남. 이런 피바람이 부는 전쟁터에서 선두를 다투는 지위에 오른 온새미로의 모든 레시피를 직접 만들고 관리하는 유민하에겐 그에 부합하는 능력이 있다.
어떤 직원이 어떤 작업을 할지는 그녀가 결정한다.
주방의 요리사는 그녀의 또 다른 수족. 주방 안에서의 유민하는, 말하자면 열 쌍의 팔이 달린 개인이다. 그렇기에 말은 필요치 않다.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은 없으니까. 자신의 팔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주인은 없으니까.
"계속 이어서 합니다. 부디 다른 여러분도 실수 없도록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짧은 소동이 막을 내렸다.
다시금 온새미로의 주방을 기계와 식기의 소음이 뒤덮는다. 마치 제자리를 되찾은 듯 돌아온 침묵은 그야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나, 이게 바로 온새미로의 일상.
날 선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은 긴장의 연속. 두 손으로 해를 꼽을 동안 변하지 않은 이 주방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려 하고 있었다.
***
안가람에서의 일을 끝마친 백하은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엔 이미 해의 자리를 달이 대신한 늦은 밤이었다. 여름 해가 저무는 속도를 생각하면 굉장히 깊은 밤이다.
일부러 살짝 먼 곳에서 오토바이의 시동을 끄고 손으로 끌고 집의 차고에 들어가던 백하은은 집의 창문을 통해 거실의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가족의 구성원이 다들 자는 시간이 이르다는 걸 생각하면 꽤나 드문 광경이었기에 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창문을 올려다보며 주차를 끝내고 집으로 들어섰다.
거실 불을 켜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어머니 유민하였다.
"다녀왔습니다."
"하은이니? 어서 오렴."
백하은은 거실을 지키고 있던 유민하의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다.
온새미로의 주방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알만큼 아는 백하은이다. 그 방식으로 하루 종일 가게를 운영하려면 만만치 않은 심력이 소모된다. 그렇기에 보통 이 집에서 얼굴 보기가 제일 힘든 사람은 유민하였다.
웬일로 늦은 밤까지 깨어 있는 유민하에게 백하은이 질문을 건넸다.
"엄마? 왜 안 자고 계세요?"
"잠깐 전화 좀 하고 있었어."
주방에 있을 때와는 달리 노곤하게 살짝 늘어진 목소리로 유민하가 답했다.
아무리 주방에서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완벽을 추구하는 그녀라지만 집에서까지 그렇지는 않다. 그냥 평범한 사람보다 조금 더 꼼꼼한 성격일 뿐이다.
"전화요?"
"그래. 선배랑."
선배. 유민하가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단 한 명밖에 없다는 것을 백하은은 잘 알고 있다.
안가람의 주방장이자 백하은의 상사인 안상필. 한때 안상필과 유민하가 같은 스승 아래서 수학한 사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일이다.
그 이야길 듣자마자 백하은은 얼마 전 안상필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맞다, 엄마. 저번에 안가람 오셨었다면서요."
"어머, 선배가 말했니? 참, 말 안 해도 된다니까."
"다른 사람이 가르쳐줬어요."
업계인들 사이에선 공전절후의 라이벌로 여겨지는 안가람과 온새미로다. 갑자기 그중 하나가 다른 쪽을 찾아가면 눈길을 안 끄는 게 어렵다.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무슨 일이긴. 식당에 뭐하러 가겠니. 밥 먹으러 갔지."
"……정말로요?"
세간에서는 라이벌이라 부르는 두 가게가 사실은 그렇게 서로가 견원지간이 아니라는 건 그 사이에 제대로 끼인 내부인 처지에 있는 백하은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애당초 안가람에 들어간 것 또한 다른 곳에서 요리를 배울 거면 그곳만 한 곳도 없다던 유민하의 추천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서로 전혀 경계하지 않는 건 아니다. 서로 거리가 먼 동업자는 동병상련이지만, 서로 가까운 동업자는 그럴 수만도 없는 게 현실이니까.
그런 상황에 아무 이유도 없이 밥만 먹으러 왔다는 건 조금 신빙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백하은의 생각은 그러했고, 그 생각은 얼추 정답에 가까웠다.
"왜, 작년 복날 특선 메뉴 재판매 기간이잖니. 그때 못 먹어봤으니 한 번 염탐하러 간 거야. 이러면 만족하니?"
"……그럼 차라리 저보고 만들어 달라고 하시던가요."
"어떻게 그래. 네가 스파이도 아니고."
"하아……."
그래, 저 소리도 몇 번 듣긴 했지. 하지만 그걸 제 어머니의 귀에서 듣자니 살짝 어이가 없는 백하은이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완자탕 참 맛있더라. 잘 만들었어."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유민하의 입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말이 두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칭찬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맛있다는 말이다. 특히 다른 사람이 만든 요리라면.
그 두 가지를 한 번에 들은 백하은의 얼굴이 잠시 기괴하게 찡그려졌다가, 이내 떨떠름한 얼굴로 돌아왔다. 왜 그 이야길 지금 하시는 걸까. 그런 의아함 때문이었다.
잠시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 있던 유민하가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있잖니, 그거 혹시, 콩소메 기법으로 끓인 육수니?"
"!"
백하은은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그건 백하은이 작년 찬혁 일행과 함께 만든 레시피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또 완성품을 보고 가장 눈치채기 어려운 비밀이었으니까.
그걸 한 번 들려서 먹어본 것만으로 알 수 있다고?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이럴 때마다 백하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동생이 누구에게서 재능을 이어 받았는지, 그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백하은이 놀라거나 말거나 유민하는 여전히 골똘히 생각에 빠진 채 말을 이어나갔다.
"깜짝 놀랐지 뭐니, 전통기법 아니면 눈도 안 주던 선배가 갑자기 콩소메 같은 걸 쓸 줄은 몰랐어. 고리타분한 면이 있는 사람인데 용케 허가를 받았구나?"
"아, 응. 어쩌다 보니까요."
"그래서 흥미가 돋아서 찾아봤거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그렇게 말한 유민하가 갑자기 탁자에 놓여 있던 잡지 하나를 들어 올렸다. 먼슬리 푸드 트립 2020년 9월 호.
백하은은 또 한 번 놀라야만 했다. 저 잡지엔 분명…….
"류찬혁? 재밌는 애가 있더라. 성심고 애라고? 어떻게 선배 같은 고집불통을 꺾었는지, 참 신기해. 근데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인데……."
"어, 엄마?"
백하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음에도, 유민하는 제 할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그래서 생각난 건데. 마침 곧 여름방학이잖아? 이번엔 우리 가게에서 한 번 불러볼까 싶거든, 하은이 넌 어떨 것 같니?"
그녀는 답할 수 없었다.
온새미로의 시스템과 류찬혁의 기질을 어우러지게 하는 것은, 자석의 같은 극을 붙이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라곤,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