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한여름의 쟁탈전.-2-
내 다음 순번 아이들이 박예휘 선생님의 호명에 따라 자리와 교탁을 오가는 동안, 나는 내 손에 들린 세 개의 봉투를 면밀히 살폈다.
안가람의 간판 로고가 워터마크로 박힌 봉투에 살짝 놀랐지만, 특필해야 할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안가람에서 온 듯 보이는 봉투를 제외한 나머지 봉투 하나에도 쉽사리 무시하기 힘든 이름이 적혀 있었으니까.
"……이건 또 해외 등기네."
봉투 하나를 통째로 덮을 정도로 커다란 스티커의 주소란에 대문짝만하게 쓰인 UK라는 글자. UNITED KINGDOM의 약자다.
그리고 그 아래, 보내는 이는…….
"OCEAN's BRITANNIA?"
좋아. 뭔지는 몰라도 일단 이건 나가는 길에 쓰레기통에 버리자.
이전 탑승했던 마제스틱 퀸 호의 소유주인 오션즈 브리타니아란 이름에 나도 모르게 간신히 잊었던 PTSD가 재발한 느낌이었다.
뭐, 버린다는 건 반쯤 농담으로 치더라도 이제 슬슬 이 봉투의 정체가 뭔지 감이 잡힌다.
'그런데…….'
남은 하나의 봉투. 주소도, 이름도, 그 외에 무언가를 추정할 만한 문장 하나 없는 밀랍 인장이 된 새하얀 편지봉투. 이 녀석의 정체만 모르겠단 말이지.
이걸 지금 이 자리에서 뜯어봐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마침 봉투 배부를 끝낸 박예휘 선생님이 학생들을 불렀다.
"다 받았죠? 눈치가 빠른 학생은 이미 알아챘겠지만, 이건 학교에서 주는 게 아닙니다. 학교는 어디까지나 창구. 그건 각 업장에서 여러분에게 직접 전달하는 편지입니다."
잠시 말을 고른 선생님이 뒤이어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초청장이죠."
초청장.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구나.
"초청장을 받은 학생들은 자랑스러워해도 좋아요. 초청장을 받았다는 건 여러분이 작년 방학 때 일한 업장의 점주가 여러분이 마음에 들었다는 겁니다. 작년에 일을 잘 했으니 올해에도 우리 가게로 와달라는 거죠. 이건 초청장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스카웃이기도 합니다."
스카웃. 확실히 선생님의 말씀이 맞다.
이건 시각을 조금 다르게 보자면 아직 졸업도 안 한 고등학생을 업장에서 고용하고 싶단 의사를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 대단한 기록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잠깐 생각해보면 이건 상당히 엄청나 일이다.
만약 이런 초청장을 누구나 알만한 유명 업장에서 보냈다면 그 자체로 이미 스펙이 될 테니까.
예를 들어 어플이나 고글, 삼전, 럭키골드 같은 회사에서 '너 방학 때 우리 회사에서 인턴 한 번 안 해볼래?'라는 편지가 온다면 어떨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커뮤니티를 불태울 뜨거운 화제가 되리라.
'근데 그게 나네?'
아니, 이게 자뻑처럼 보일지 모르겠는데 진짜라니까?
직장이 복사가 된다고! 나는 학생이고. 회귀는 개꿀이다.
…… 뭐, 장난은 이쯤 칠까.
하여튼 정리하자면 이 가벼운 편지봉투는 그 가치를 따지면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수십 배 이상의 값어치를 하는 물건이라는 것이다.
생기부에 '이 학생은 삼전으로부터 인턴 권유를 받았음.' 한 줄 딱 적혀 있어봐. 그 정도면 내가 봤을 때 대학 정도만 잘 패스하면 인생이 장밋빛이 될 거다.
아, 참고로 우리 업계는 어딜 가든 불지옥 그 자체니까 아예 똑같진 않겠지만.
응? 5성급 호텔에서 일하나 동네 식당에서 일하나 할 일이랑 머리에 집어넣어야 하는 지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어차피 몸은 비슷하게 빡세다 이거야.
물론 월급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막내 시절은 또이또이 하겠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 초청장이란 놈이 내 앞날에 도움이 될 거란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일단 지금은 좋아하도록 하자.
…… 좋아하는 게, 맞는 거겠지?
나이를 먹어도 풀 수 없는 것이 바로 세상사라는 걸 새삼 깨달은 오늘이었다.
***
"세 개나 받았다고?"
"어."
종례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온 나와 김철정은 방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내가 받은 초청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나는 안가람, 하나는 오션즈 브리타니아…… 응? 뭐야. 안가람은 작년에 갔다고 쳐도 여기선 왜 오는 거야?"
"내가 어떻게 알아. 어차피 거긴 뭐라 해도 안 갈 거니까 그냥 신경 끄자."
"뭐지 이건? 가진 자의 여유라는 것인가?"
"잘 아네."
"개부럽네 진짜."
왜 자기한테는 이런 게 안 오냐며 심통을 부리는 김철정이었으나, 어차피 저거 다 구라다.
"넌 방학 내내 너네 집에서 일했으면서 뭔 편지야 편지는."
대체 어떤 가정에서 자기 자식하고 연락할 때 편지를 보내? 무슨 19세기도 아니고.
21세기에 아들한테 편지를 보낼 상황이 뭐가 있을까. 고풍스럽게 연을 끊자고 통보할 때? 뭐, 그렇게 되면 변호사한테 문서가 올 테니 꼭 틀린 말은 아닐지도.
아하핫, 하고 헛웃음을 지은 김철정이 말했다.
"근데 세 통 왔다며. 그럼 나머지 하나는 어디서 온 거야?"
"몰라. 아직 확인 안 해봤어."
나는 침대 위에 펼쳐둔 봉투 중 하얀 밀랍으로 봉인된 것을 집었다.
"야, 이거 진짜……."
다시 봐도 헛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의 고풍스러움이다.
날 그렇게 좋게 봐줬다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런 건지.
애당초 내가 작년에 일한 현장이라고 해봤자 안가람과 사장님 가게가 끝이다.
물론 골목 레스토랑이나 부산에 있는 양희연의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스즈에서도 잠깐 일을 한 적이 있긴 하지만, 거기서 과연 이런 편지를 보낼까?
내가 보기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뭐, 백날 말하기만 하면 별수 있나. 어차피 나한테 온 편지, 얼른 까서 확인해보는 편이 낫겠지.
밀랍 인장 전용 레터 나이프 따위의 고급스런 기물이 기숙사에 있을 리도 없었기에 그 대신 가져온 커터칼로 밀랍을 떼어내어 내용물을 꺼냈다.
내용물은 단촐했다.
곱게 접은 편지 한 장. 그리고 하얀 바탕에 금장 테두리로 장식된 명함 한 장.
…… 아니, 잠깐만. 이거 진짜 금박 같은데.
내가 이래 봬도 상류층과 면식을 나눈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언제였더라, 한 번은 어떤 갑부 양반이 자기네 저택 주방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단 말이지.
그 경험을 통해 추측하건대 이 감촉은 진짜가 분명했다. 이 정도 디자인이면 이 명함 한 장에 몇만 원은 될 거다.
'아니, 누가 이런 명함을 편지에 넣어서 보내.'
어이가 없어서 잠깐 글을 읽을 생각도 못 했으나, 이윽고 정신을 다잡고 명함을 살폈다.
누군가 그랬던가, 진짜 멋진 명함은 여백의 미를 살릴 줄 아는 디자인에서 나온다고.
이것도 똑같다. 이름과 전화번호. 이 종이와 금박 값이 아까워질 정도로 단촐한 구성이지만 유려하면서도 올곧은 글씨체에서 나오는 묘한 기백이 단촐함을 심플한 기품으로 바꾼다.
명함의 주인이 누군지 알기도 전에 압도되는 기분을 견디며, 나는 명함에 적힌 이름에 시선을 돌렸다.
중앙 상단에 적힌 세 글자. 유민하.
'유민하?'
유민하…… 유민하…… 뭐지, 분명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그것도 회귀 후가 아니라 회귀 전에.
내가 회귀 전에 들은 이름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정도면 상당한 유명인사일 터. 학교를 통해 나한테 편지를 보냈다는 건 분명 어느 업장의 주인일 텐데…….
'모르겠네.'
안 되겠다. 잘 기억이 안 난다. 행여나 비싼 명함에 흠이라도 갈까 내 책상에 있는 보관함에 넣어놓은 뒤 편지를 펼쳤다.
누군지는 몰라도 편지를 보면 좀 감이 잡히겠지 싶었다.
"……."
그런데 그게 아니네요? 아이고 맙소사.
편지에 적힌 내용은 동봉된 명함만큼이나 심플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안녕하십니까, 류찬혁 학생. 염치불구하고 첫 인사가 대면이 아닌 글이 되어 송구합니다……."
작년 한 해부터 올해에 이어 학생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류찬혁 학생을 저희 업장에 모시고 싶은 바, 이 편지를 보냅니다.
류찬혁 학생의 뛰어난 능력으로 올 여름을 저희와 함께하여준다면 서로에게 큰 기쁨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저희의 제안을 승낙하실 마음이 드시거나, 혹은 따로 궁금한 사항이 있다면 동봉한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끝이야?"
끝이었다. 편지 본문의 내용은 말이다.
우리가 어느 식당이라는 말도 없고, 주소도 없고, 일당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짧은 네 문단짜리 편지는 스카웃 제의에 점수를 준다면 이 문장은 아마 최하점에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다만, 그렇게 낮아진 점수를 단번에 만회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면 말이다.
"온새미로 드림……?"
편지의 가장 하단에 적힌 단어에 잠시 눈앞에 불꽃이 번뜩이는 착각이 일었다.
아, 그래. 맞다. 온새미로. 온새미로였다.
전통 한식을 고수하는 안가람과는 다른 스타일의 한식으로 명실상부 국내 최대의 한식당인 안가람과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으며, 일부 계층에게는 그보다 더 발전했다는 소리를 듣는 식당.
교장 선생님 대에서부터 지금껏 성장해온 안가람을 단 한 세대 만에 따라잡았다는 점에서 온새미로를 더욱 높게 치는 호사가도 있다.
그리고 유민하 여사야말로 그런 온새미로의 성장의 원동력이 된, 명실상부한 스타 셰프.
국내에서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엄청난 사람이다.
당황스러웠다. 편지에도 나왔다시피 나와 일면식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이 왜 갑자기 나를 찾는단 말인가?
물론 그것 하나만이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당황하진 않았겠지. 그것 말고도 이유는 더 있다.
"오, 온새미로? 진짜?"
"어. 진짜인 것 같은데. 그런 명함 쓰는 사람이 설마 가짜일까."
"야 너 안가람에서도 왔잖아? 어떡할 거야?"
하나. 앞서 말했다시피 안가람과 온새미로는 같은 강남에 위치한 최고급 한식당이다. 아무리 목표하는 방향이 다르다고 해도 같은 한식당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이 레퍼토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연고전, 고연전. 어느 쪽이 옳나 맨날 서로 보기만 하면 눈깔을 부라리는 집단이라던가, 횡단보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뜨레비앙과 파리스바게트 같은 거 말이다.
그래, 요컨대 이 둘은 라이벌이다. 앞서 말한 사례처럼 견원지간까진 되지 않겠지만, 사업적 앙숙이라는 건 확실하지.
'……어느 쪽을 골라도 까이겠는데, 이거.'
고작 학생이 현장실습 잠깐 하는 것 갖고 설마 뭐라 그러겠냐마는, 왜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원래 사람은 마냥 사이 나쁜 사람보다 이리저리 와리가리치며 박쥐노릇을 하는 쪽을 더 싫어하는 법이다.
그리고 거기에 얹어서 또 하나.
"근데 여기, 백예은 걔네 집에서 하는 가게 아니냐?"
"……어, 맞아."
양자택일하기 더럽게 어려운 두 가게가, 하필 내 친구 놈들의 부모님이 하는 가게라는 것이었다.
…… 어쩐다, 이거.
'……진짜 영국에 가버릴까.'
어째 가장 선택하기 싫었던 선택지가 날 구할 유일한 동아줄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내 속이 썩어들어가는 심정이었다.
엄마가 친구 좀 가려 사귀라고 할 때 얌전히 말 좀 들을걸.
때늦은 후회였다.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