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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38화 (238/403)

238. 한 여름의 쟁탈전.-1-

드라마틱한 선상 생활을 청산한 뒤로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뭔가 속으로는 '많은 일이 있었다.' 같은 말을 쓰고 싶은데, 애당초 학교라는 게 원체 뭔가 한 건 많은데 뭘 했느냐고 물으면 마땅히 할 말이 없는 곳 아닌가.

뭐, 요컨대 그냥 평상운전 했다. 이상 근황 보고 종료.

다만 다른 애들의 평상운전이 적당한 머신으로 서킷을 주행하는 정도의 난이도라면, 내 경우엔 코너 돌다 엎어지는 삼발이로 산을 타는 수준이라는 게 특이점이라면 특이점일까.

아니, 말하고 보니 진짜 다른 의미로 특이점이네. 나 어떻게 살고있는 거야 대체?

아무튼, 그렇게 햇볕에 널어놓은 오징어가 된 기분으로, 혹은 압착기에 깔린 캔음료 쓰레기더미가 된 심정으로 여차저차 하루하루를 죽지만 않고 간신히 명줄을 이어나가고 있자니 어느새 기말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중간고사를 치른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기말이라니…….

기말 시즌의 학교는 선생님, 학생 가릴 것 없이 바쁘다.

선생님들은 기말고사 문제지 제작과 시험 범위를 가르친다고 고생, 학생들은 시험 범위 따라가면서 실습 시험 대비 레시피 구상하느라 고생.

매 학기마다 이 시기만 되면 학교 도서실이나 실습실 등지에는 혼돈과 파괴, 망각을 침묵으로 부르짖는 불쌍한 영혼들의 소모임이 종종 일어난다.

"……."

"……."

"……."

그래, 바로 이 녀석들처럼 말이지.

방과 후, 웬일로 기숙사 주방이 아닌 학교 도서실에 모인 나와 김철정, 양희연, 나현주.

2학년 들어선 필기 수업보다는 실습할 때 만나는 일이 더 잦았기 때문일까, 족히 5미터가 넘는 기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모습이 굉장히 낯설다.

모인 이유는 앞서 말했다시피 시험 대비를 위한 스터디그룹이다.

우리 학교야 원체 실업계나 마찬가지인 만큼 필기 수업의 수준이 엄청나게 높진 않지만, 반대로 말하면 실무에 포함된 쪽에 대한 필기 수업은 다른 수업이 부담해야 할 것을 죄다 떼어 모아놓은 듯 어렵기 그지없다.

이렇게 말하긴 뭐하지만, 이 녀석들처럼 머리가 제법 좋은 축에 들어가는 놈들이 이토록 죽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이 과목.

식품위생법개론.

나조차도 쌍욕을 참기 힘들게 만드는 이 빌어먹을 과목이 이번 시험의 가장 큰 난적이다.

다른 필기가 막심 커피믹스라면 이 녀석은 아주 그냥 막심 잡지다. 답도 없다 이거지.

머리가 어덜트한 양반이 변호사 시험이라도 준비하는 거면 모를까, 머리가 덜 여문 고등학생에게는 여러모로 과분한 과목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이게 바로 필수 수강 과목이라는 거고.

"어…… 씁, 족보 좀 외운 것 같다. 야, 문제 하나만 내줘봐."

"다음 보기 중 삭제된 조항을 고르시오. 13조, 15조, 19조, 23조, 40조."

"그러니까…… 그게 분명…… 아, 19조?"

"땡. 복수정답 허용이었다, 요 녀석아."

"아니 정신 나간 놈아 그건 풀기 전에 말해야지."

"기출문제야. 부분점수 허용이라곤 적혔는데 복수정답이라고는 안 적혔더라."

"말장난이잖아……."

삭제된 것을 빼더라도 부칙을 합하여 자그마치 조항이 100개가 넘어가는 위생법을 통째로 외워야 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가끔씩 주관식으로 '제 몇 조를 위반하여 처벌받은 사례를 서술하시오.' 같은 문제가 튀어나오면 나도 급격히 자살 마려워지더라.

"이, 이이, 이딴 거 해 먹겠나? 어차피 사회 나가믄 아무짝에도 못 쓸 거라 안카나."

하다하다 결국 머리가 돌아 버린 양희연의 폭언에 내 시선이 절로 서글퍼진다.

아니야…… 우리가 사회 나가면 기술 다음으로 제일 잘 쓰일 게 이거야…….

양희연 본인도 자신이 시답잖은 소릴 했음을 인지했는지, 당장 이거 치워뿌라며 머리를 쥐어뜯던 것을 멈추곤 다시금 입을 꾹 닫고 가만히 노트를 노려볼 뿐이다.

"…… 이거, 시험이 언제더라……?"

"금요일. 시험 마지막 날."

아이들의 표정이 말 그대로 썩창이 됐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원래 이런 암기과목은 시험 시작 전에 시간을 많이 들여서 빡세게 기억하고 가야 하는데 마지막 날이면 다른 거 준비하는데 급급해서 미처 준비할 시간이 모자랄 터였다.

"…… 전학 마렵다."

"간만에 니랑 짱구가 맞네. 세상 말세다."

누누이 말하지만, 성심고의 전학률은 타 학교의 배 이상이다.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됐으리라 믿는다.

'뭐, 그래도…….'

말은 저렇게 해도 이 녀석들은 그리 쉽게 무언가를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러니 입은 툴툴거리면서도 몸은 성실하게 필기하느라 바쁜 거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의지가 받쳐준다고 몸이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안 그래도 시험범위에 맞춘다고 힘들어진 수업을 끝내고 와서 제대로 쉬는 시간도 없이 공부한다고 고생한 반동이 온 녀석들이 하나둘 노트를 덮었다.

"이까지만 하자. 저녁 무을 때도 날렸다 아이가."

"밥이야 언제 먹든 아무렴 어때."

"안 돼. 밥 먹을 때 가장 중요한 거. 칼로리, 그리고 시간. 안 지키면 살쪄."

"…… 아, 그러냐."

하필 우리 같은 사람이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게 제일 중요한 거라니, 그거 참 아이러니하구만.

자신의 말을 합동하여 반박하는 두 사람 앞에서 잠깐 주눅 든 표정을 지은 김철정이 뒤이어 말했다.

"그런 것도 지킬 수 있어야 지키는 거지, 요즘엔 저녁도 연습하고 남는 걸로 때우고 있잖냐. 연습하느라 시간 늦고, 많이 만들어서 과식하는데 퍽도 지키겠다."

이번에는 여성진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차례였다.

실제로 기말고사 과목은 필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내신에 반영되는 과목은 오히려 실기 쪽이 더 많으니 주방에서 연습하는 시간도 늘어날 수밖에.

필기와는 다르게 실기 연습은 완성품이라는 잔여물이 남으니, 힘들게 만든 요리를 짬통에 처박는 데에 아무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결국 그 잔여물이 향할 곳은 만든 이의 위장 속이다.

아마 그건 이 녀석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뭐, 평소엔 시간을 맞춰 연습한다 치더라도 이 시즌까지 그걸 칼 같이 지키는 건 무리겠지.

차라리 몸만 힘들다면 모를까, 머리와 몸을 가리지 않고 고된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시간 리듬이란 건 자연스레 깨지게 되는 법이다.

다만, 나는 그 점에서라면 여타 학생들과 차별화되는 점이 하나 있거든.

"쯧쯧, 불쌍한 영혼들 같으니……."

진심으로 불쌍하다는 얼굴로 안타까움이 가득 담아 혀를 차주자, 녀석들이 날 선 눈초리를 보내왔다. 다들 잔뜩 화가 나셨구만. 아니, 나현주는 원래 저런 얼굴이라 그런가.

"왜 표정이 그따구냐. 지는 안 그런 것처럼."

"니 장학금 받아야 칸다매? 그라믄 우리보다 더 빡신 거 아이가?"

내 예상과 똑같은 반응을 보니 오랜만에 진심으로 홍소가 튀어나왔다.

"하, 하하하."

"뭘 디비 처웃고 자빠졌노. 뭐 잘못 뭇나?"

"너 우리보다 시험 봐야 할 과목 많지 않냐? 웃음이 나와?"

"아아, 그런가. 시험의 노예인 너희는 모르나보군."

해괴한 말투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녀석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아, 나는 대회반이라고 한다. 실기에 가산점이 붙지."

"아……."

"야, 잠, 니 설마……."

그래, 바로 그 설마다.

"나는 아예 실기를 안 봐도 상위 30% 수준의 성적이 나온다. 그런 내가 시험을 작정하고 본다면, 과연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아이들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든다. 아아, 짜릿해! 정말 최고야! 티배깅이란 놈은 묘한 매력을 갖고 있어서, 할 때마다 새로운 맛이 있단 말이지.

"시바, 인생은 불공평해……."

"왜 저딴 자슥이……."

뭐, 왜, 뭐. 불만이면 너네도 내년에 대회반 시험 치던가. 3학년 대회반은 지옥길이란 거 부디 명심하고.

결국 이날의 스터디 모임은 텐션의 저조를 이유로 살짝 이르게 끝을 맺었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대책 없이 늘려놓은 강의 때문에 장난 아니게 고생 중이지만 그걸 까발릴 수야 없지.

멘탈이 나간 녀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반응이 좀 재밌어야지.

덕분에 오랜만에 가슴이 뻥 뚫리게 웃었다. 미안하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대신 용서도 구하지 않는다.

나에게 향하는 불만의 시선을 감내하며, 나는 그저 응원 한마디를 아이들에게 보태줄 뿐이었다.

"부디 뺑이 잘 치시기 바랍니다."

"…… 저노마 진짜 지이뿔까?"

"참아. 네 손이 더러워질 필요는 없어."

그 말은 좀 상처받는데.

하루하루 하는 거라곤 공부와 연습, 시시한 말장난과 말싸움 정도가 전부인 나날. 뭐, 결국 고등학생의 일상이란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야말로 이런 일상인 법. 그게 내가 나이를 먹으며 배운 가장 중요한 깨우침이다.

***

하루하루가 바쁠수록 시침은 둥근 원판 위를 빠르게 거닌다.

그건 나이가 많든 적든 변하지 않는 것이어서, 특히 가장 분주한 시험 기간을 앞둔 우리에게도 이변 없이 찾아온 현실이었다.

특히 내 기말고사 스케줄은 누가 보면 정규 수업이라도 하는 줄 착각할 만큼 빈틈없이 꽉꽉 들어찼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2배에 가까운 수강과목. 덕분에 공부해야 할 분량은 그 이상이었고, 시험 시간은 잠시 책 들여다볼 시간도 갖기 힘들 정도.

그나마 실기 쪽은 회귀 전에 사용한 레시피 따위를 참고해서 만드는 것으로 충분했기에 약간의 여유는 챙길 수 있다는 점만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난 너처럼은 못 살겠어."

오죽하면 요전번 스터디 모임 때 내 말에 거하게 내상을 입은 김철정마저 편의점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시험장을 전전하는 나를 보고 혀를 내둘렀을까.

내가 보기에도 이 정도면 정신병 걸리기엔 충분하다 못해 과하다고 평가할 만 했다.

그러나 시들지 않는 꽃은 없고, 아무리 긴 장마여도 언젠가는 그치듯이, 그런 시간도 이윽고 종막을 맞이한다.

일주일 동안의 기말고사.

그중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식품위생법개론의 화룡점정을 끝으로 공식적인 시험 일정이 학생들의 환호 속에 마무리 됐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1학기도 끝난다!"

"여름방학이다!"

거, 그놈들 티키타카가 아주 잘 맞는구만.

어쨌든 저 아이들을 비롯한 여러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말처럼, 기말고사가 끝났으니 남은 일정은 기껏해야 점수 발표, 그리고 직후 찾아올 여름방학 뿐.

2학년이 된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여름방학에 신이 잔뜩 난 아이들은 박예휘 선생님이 교탁을 지키고 있음에도 쉬이 분위기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래, 이제 저 페이스도 익숙해질 때가 됐지.'

선생님이 무섭다고 평생 입을 꾹 닫고 학교를 다닐 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박예휘 선생님은 의외로 평소에는 분위기를 안 잡는 편이다. 뭐, 실기에서야 사람 한둘은 죽일 것처럼 굴긴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평소 조용한 학급을 선호하시는 선생님이 여태껏 아이들을 말리지 않는 이유는 그런 학생들의 속내를 이해하고 계시기 때문이겠지.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소란이 가라앉은 후,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다들 이번 1학기도 고생했어요. 이런 형식으로 수업을 받는 건 처음이어서 적응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모두 아무 탈 없이 학기를 잘 마쳐주어 고맙습니다."

'사건사고가 전혀 안 일어난 건 아니지만…….'이라고 뒷말을 흐리며 장난스레 나를 째려보는 선생님의 시선에 난 작은 쓴웃음으로 답했다. 나도 그 사건은 많이 당황스러웠다고요.

"2주일 뒤부터 방학이 시작될 텐데, 여러분 모두 준비는 잘 했나 모르겠네요. 성심고의 방학 과제는 작년과 같습니다. 총 일주일, 40시간 이상의 현장 근무죠."

그 말에 주변에서 동시다발적인 탄식이 튀어나온다. 방학이 시작도 하기 전에 고생할 이야기를 먼저 꺼내면 누구든 진이 빠지겠지. 박예휘 선생님이 학생들을 보며 작게 웃었다.

"이번 업장 목록은 다음 주에 배부될 예정입니다. 혹시 먼저 생각해둔 곳이 있는 학생은 종례 후에 교무실로 와서 신청서를 받아가세요."

아이들이 입을 모아 대답하자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종례도 끝났나 싶던 그때, 선생님이 말을 잇는다.

"아, 그리고 여러분에게 전달할 게 있으니 호명하면 앞으로 나와서 받아가세요."

전달할 것?

의미심장한 단어에 호기심을 느끼기도 잠시, 박예휘 선생님은 지체 없이 학생의 이름을 차례차례 호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출석부 순으로 하나하나 전부 호명하는 게 아니라 띄엄띄엄 호명하며 정체 모를 봉투를 학생에게 주고 계신다.

봉투 또한 이상했다. 사이즈도, 디자인도 제각각. 학교에서 나누어주는 것 치곤 통일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한 사람, 한 사람. 앞에서부터 부르기 시작한 호명이 어느새 내 순서까지 다다랐다.

내 바로 앞 순서인 도 씨 성을 가진 남학생이 불려나간 뒤, 드디어 선생님의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류찬혁."

"네."

뭘까? 호기심을 누르고 나가자, 선생님이 내게 봉투를 쥐어주셨다.

'어라?'

이상했다. 다른 아이들은 아예 호명이 안 되어 봉투를 못 받았거나, 혹은 나와도 하나씩만 받아 들어간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 선생님이 내게 건네준 봉투는 세 개 씩이나 됐다.

자리로 돌아와 봉투를 살핀 나는 이윽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설 뻔했다.

"안가람?"

봉투 중에서도 고급스런 재질이 돋보이던 봉투 뒷면에 인쇄된 워터마크.

그것은 다름 아닌 안가람의 간판 로고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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