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37화 (237/403)

237. 위에는 더욱 위가 있다.-5-

토마스 테일러는 농부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농부였다.

그의 부친의 부친의 부친, 대공황을 거쳐 세계대전에까지 몸을 담은 그의 증조부가 남긴 땅을 조부가 일구고, 그것을 부친이 일구고, 그것을 다시 토마스가 물려받게 되었을 때쯤에는 이미 그의 땅은 그 본인조차 측정하는 것이 힘들어질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2차 세계대전마저 끊지 못한 그의 핏줄이 가진 행운이 대단했던 건지, 아니면 일족의 수완이 좋았던 건지. 어찌 됐든 그쯤 됐을 때엔 이미 개인의 노동 따위는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였으나 토마스의 부친은 텍사스 토박이 특유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의 소유자였다.

사람이 먹을 것은 사람이 경작해야 한다는 억지를 따라 뜨거운 햇살 아래 몇 번이나 몸을 맡겼는지.

덕분에 손을 굳은살로 두 겹, 세 겹 덮어가며 몸으로 배운 농사는 여전히 그의 오체에 생생하게 그 흔적을 남겼다.

토마스가 농장의 선진화에 집착한 것도 그 힘든 나날에서 벗어나고 싶단 마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술의 발전은 말 그대로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심심하면 퍼지던 트랙터의 엔진은 수년을 쉼 없이 굴려도 멀쩡할 만큼 튼튼해졌고, 평범한 사람은 볼 기회도 많지 않던 비행기가 민간용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손에 들어왔다.

장비와 인력, 인프라가 합쳐지자 땅의 넓이는 그에게 더 이상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농장의 세대교체에 따른 기술혁신. 토마스는 그 흐름에 자연스레 몸을 맡기고 올라타 선두로 나섰다. 보수적인 기질이 강한 동네에서 신기술에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었다.

클라라 테일러, 아니. 이제는 클라라 브라운이 된 토마스의 딸은 아버지의 그런 면을 똑 닮은 아이였다.

농장의 다음 주인 역할을 맡게 된 장남과는 달리 과학자의 길을 걷게 된 그녀는 부모의 지원 아래 독자적인 연구센터를 만들었고, 연구 끝에 새로운 종의 GMO 작물 종자를 개발해냈다.

생산성과 단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데 더해 식약청의 엄격한 심사까지 통과한 이 제품은 미국 국내보다 중국에 앞서 팔릴 계획이었다.

굳이 미국이 아닌 중국에 시작품을 판매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를 꼽아보자면 바로 중국 측 바이어의 행동력 때문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크루즈 바캉스로 휴일을 보내는 계획에 맞추어 그쪽에서 접촉을 바란다는 의사를 보내왔고, 그것을 승낙하기 무섭게 그녀를 찾아온 바이어와 바로 어제 첫 대면회의를 마쳤다.

그리 만족스러운 대화가 되진 못했으나 아직 뒷일을 도모할 여유는 충분하던 상황.

그런데 이때, 조금 덜컹거리긴 해도 무난히 굴러가던 상황에 갑자기 커다란 변환점이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이번 거래, 꼭 해야 하는 거냐?"

"아빠?"

토마스였다.

클라라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수통에 담긴 술을 홀짝일 뿐이다.

그의 뇌리에 아까 보았던 광경이 플래시백 했다.

난장판이라는 단어가 그 이상 어울릴 수 없던 광경.

아무리 주변 친구들이나 동료들에 비해 마인드가 젊다는 이야기를 듣는 토마스라지만, 그 또한 텍사스 토박이다.

그에게도 남들이 보기에 보수적이라고 부를만한, 혹자는 꼰대스럽다고 말할지도 모를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식사예절은 그런 토마스의 보수적인 부분 중 하나였다.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것이지만 미국의 식사예절은 여타 외국인의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누군가는 미국의 식사예절이란 말에서 서부극의 한 장면처럼 야성적인 남자들이 사납게 스테이크를 뜯어 먹는 것을 상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보수적인 미국 가정의 식사예절은 처음 겪으면 히스테릭하단 생각이 들 정도로 민감한 부분이 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옛 미국 가정에서 어언 6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내온 토마스 또한 예외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그는 방금 본 그 광경을 이해하고 싶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러운 식탁, 분명 접시 위에 남았음에도 마구잡이로 버려진 음식. 그러고도 지치지 않고 새로운 접시를 챙기는 사람들.

웨이터에게서 그런 짓을 벌이는 승객 거의 대부분이 중국인이란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중국이 못사는 나라던가?'

예전에야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 밑도 끝도 없는 내수시장으로 세계 정상급으로 발돋움한 나라가 아니던가. 그런데 대체 왜 저 사람들은 무슨 전쟁터의 빈민이라도 된 것처럼 마구잡이로 음식을 탐하는가.

아니, 차라리 전쟁터의 빈민이라면 음식을 남기지는 않았겠지. 저것은 그냥 소중한 식자재를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토마스는 농부다. 밀 한 알, 옥수수 한 대를 기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 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길가에 나뒹구는 쓰레기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나라를 상대로 장사를 해야 하는가?

"난 이번 거래,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아빠."

그런 토마스의 불만을 클라라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클라라도 뜻을 접을 수는 없었다.

이번 종자 판매는 몇 년, 혹은 수십 년을 이어서 볼 수 있는 사업이다.

중국 정도 되는 시장에 그만한 끈을 잇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 그들 농장에서 나온 작물을 중국에 수출할 때도 그 연결로를 뚫느라 상당한 고생을 한 경력이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번에는 중국 측에서 앞서 접촉해온 상황.

천운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클라라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억지 부리면 안 되지. 거래 권한은 나한테 있잖아."

"권한? 말 잘했다. 그렇게 치면 나도 연구에 지분은 있어. 다른 땅엔 심지도 못할 걸 내 땅 버려가다시피 하면서 연구하지 않았냐. 현장에서 직접 키운 건 나야. 나도 의결권 정도는 있다."

"뭐가 문제에요. 저쪽은 비싸게 사주고, 우리는 돈 넉넉하게 받아서 팔면 되잖아."

"이제 와서 우리가 돈 같은 거에 연연할 때냐? 나는 작물을 돈 때문에 파는 게 아니야. 필요 때문에 파는 거지."

토마스의 불평은 그야말로 어린아이가 생떼를 부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름방학 때 열심히 쓴 나팔꽃 관찰일기를 누군가 얕보는 것.

자신이 열심히 기른 작물이 그 가치도 모르는 사람 손에 들어가는 것.

겉보기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본질은 같은 이야기다.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무언가가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게 바로 요점.

그러나 행동원리의 단순함에 비례하여 고집은 더욱 단단해진다.

"하……."

꼭 제 아들의 어릴 때처럼 구는 부친의 모습에 클라라는 절로 새어 나온 한숨을 미처 막지 못하고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렇게 심통이 난 그를 통제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자신의 모친뿐.

그녀로선 도통 토마스의 폭주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 또한 연구자이기 이전에 농부의 딸로서 그의 심정에 공감되는 부분이 없잖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알겠어요. 어차피 이거 한 번 못 판다고 당장 연구소 사정이 어려워지는 것도 아니고. 잠깐 미뤄두지 뭐."

결국, 두 고집의 맞대결에서 승리한 쪽은 토마스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던가. 가끔은 옛말도 틀릴 때가 있는 법이었다.

***

한편, 이 결정에 바이어 측은 생각지도 못한 역풍을 맞았다.

"예? 판매 보류라고요?"

"네. 내부 사정 상 거래를 잠시 미뤄야 할 것 같네요."

회사를 대표하여 나온 남자에겐 그야말로 맑은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사실 그가 소속한 회사는 간판만 무역회사일 뿐, 그 뒤에는 중국 정부가 도사리는 일종의 괴뢰회사였다.

토마스와 클라라는 알 방도가 없겠으나, 중국 내에서는 이번 거래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근래 발생한 무역규제로 인해 미국에서 판매하는 대부분의 GMO 작물 종자의 수입이 힘들어진 상황.

덕분에 널뛰기하듯 날뛰는 식료품, 가축 사료 등의 가격을 어떻게든 안정시키기 위해 주목한 것이 바로 클라라가 근래 개종에 성공한 작물이었던 것이다.

이전의 제품과 비교해도 생산성과 편의성이 뒤떨어지지 않으며 무역 제한도 없는 상품.

안 그래도 식품 생산력으로 여러 약소국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식료품을 잔뜩 소모하던 중국 정부로서는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본래라면 거래따윌 할 필요도 없이 연구자금 등을 빌미로 그 성과를 갈취했겠으나 우습게도 그들은 딱히 자금에 구애 받지 않는 입장에 있었고, 결국 갈취보다 거래의 효용이 더욱 높아진 상황에서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나섰으나 생각지도 못한 변수 탓에 계획에 제동이 걸리고 만 것이다.

"어, 어, 어쩌지……?!"

처음엔 이전 회담 때 했던 무리한 제안 때문인 줄 착각하여 몇 번이고 사정해봤으나 클라라는 그런 그의 제안을 단칼에 잘라냈다.

이대로 본국에 성과 없이 돌아갔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남자는 과도한 공포심에 그야말로 눈앞이 새하얗게 물드는 것 같았다.

국가 단위의 식료품이라는 건 그 거래의 타이밍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번에 이 종자를 들여오지 못한다면 자국에 보존된 작물로 17억 명의 인구와 그에 버금가는 가축이 소모하는 작물의 시세가 엊그제 친 파도보다 더 거칠게 요동치리라.

그렇다면 그로 인해 조국이 감당해야 할 피해는 대체 몇 위안으로 계산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개인이 책임질 수 있는 액수는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남자의 조국은, 그러한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나라다.

남자는 생각했다.

'아…… 이대로 아무 나라에나 내려서 그대로 망명해 버릴까……?'

터무니없지만, 그의 명줄을 부지하기에는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탈함이 배어나왔다.

그는 모르겠지.

이 또한 그와 같은 곳에서 온 사람들의 탓이라는 것을.

언젠가 들린 뷔페에서 본 광경에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던 남자였기에,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르는 편이, 아마 그에게도 더 좋은 일이리라.

***

─저희 마제스틱 퀸 호는 잠시 후 한국, 인천항에 정박합니다. 하선하실 승객께서는 대기 후 안내 방송에 따라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승객 여러분을 모셔 영광이었습니다. 다음 항해에도 저희 오션즈 브리타니아가 승객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상, 마제스틱 퀸 호였습니다.

객실의 모니터에서 흘러나온 안내방송에 나는 짐을 싸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오. 야, 도착했다."

"벌써?"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육지. 거대한 컨테이너가 눈높이보다 낮게 보여 무심코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렇게 큰 배에 타고 있었지.

마치 몇 주는 이어진 것 같은 4박5일의 수학여행도 막을 내릴 시간이 다가온다.

회귀 전에도 경험한 적 없는 대단한 시간을 보내게 해준 배.

좋은 일도 있었고, 재밌는 일도 있었고, 반대로 기분 나쁜 일이나 힘든 일도 좀 있었지만, 푸른 바다 위의 낭만을 좇는 바다 사나이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철정이 녀석은 마치 세상이 자길 버린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배에서 내리는 걸 아쉬워했다.

저게 다 몸이 편해서 저렇지. 어? 새우잡이 배라도 탔어 봐. 당장 육지로 가고 싶어서 배에서 뛰어내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그마한 어선 위에서 방수 앞치마와 바람막이를 입은 김철정이 배보다 높은 파도를 직격으로 맞는 걸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상상이라서 웃을 수 있는 거지, 실제로 그랬다면 호러가 따로 없겠지만.

─구우웅!

"슬슬 정박하려나 보다."

이 배에 탄 뒤 두 번째 정박. 처음 중국에 정박할 때 절차를 대충 기억하고 있기에 지금 울린 경적이 정박 경로에 있는 배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울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육지 앞에서 딱 멈춘 배를 예인선이 잡아끄는 모습이 창문 구석으로 보였다.

잠시 후, 비로소 완전히 배가 정지했다.

그때쯤 우린 이미 복도에 나란히 서서 하선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슬슬 익숙해질 것 같았던 복도를 지나, 비로소 바깥으로 나가는 철교로 이어진 문에 다다랐다.

누군가 그랬던가, 나라는 저마다 공기 냄새가 다르다고.

과연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어딘가 익숙한 내음이 코를 타고 흘러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반갑고 정겨운 냄새.

이별은 아쉽지만,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는 반가움에는 이길 수 없었다.

공기를 한가득 폐로 들이마시며 커다란 철문을 나서는 그때였다.

"아, 찾았다! 찬혁아! 류찬혁!"

"어?"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문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들린 그 소리에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곧바로 그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임재후 쿡?"

어제 새벽을 마지막으로 오늘 하루 종일 얼굴 한 번 안 비치던 그가, 조리복이 아닌 깔끔한 승무원 정복을 입고 내게 손을 흔든다.

"아, 못 보는 줄 알았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놀라움이 반, 반가움이 반.

다시 이 배를 타고 떠날 사람이기에 작별인사도 못 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럴 걱정은 덜었다.

"임시 크루한테 인사나 하러 왔지."

"이 시간이면 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차피 교대 후 자유시간인데, 어떻게 쓰던 내 맘 아니겠냐."

햇살을 등지고 밝게 웃은 그가 말을 이었다.

"자, 약속한 거. 못 주면 어쩌나 했어."

"아."

임재후 쿡이 품속에서 마제스틱 퀸 호의 전경이 인쇄된 봉투를 꺼내 내게 건넸다.

내용물은 안 봐도 안다. 그러고 보니 이걸 못 받았었구나. 워낙 바빠서 잠깐 잊고 있었네.

'응?'

그런데 손에 잡힌 봉투의 촉감이 무언가 이상했다. 꼭 사이즈가 다른 종이를 여럿 겹친 것 같은 묘한 단층의 감촉.

이상함을 느끼고 봉투를 열어본 난 그 이유가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챘다.

"명함?"

새하얀 색에 아이보리 상감. 검은 필기체로 적힌 영어.

오션즈 브리타니아의 로고가 워터마크로 박힌 명함은 총 두 장이었다.

한 장은 재후 임. 임재후 쿡의 것.

또 하나는…….

"제프리 밀러……? 제프리 총주방장 명함이에요?"

아니,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야.

의아한 시선을 그에게 보내자, 임재후 쿡은 웃는 얼굴로 답했다.

"너한테 준다고 티켓을 챙겼는데, 셰프가 같이 주라고 챙겨주더라."

"……왜요?"

"왜겠어."

그가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새로운 크루는 언제나 환영이라는 거지."

…… 허, 허허. 이야, 이 사람.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

그 유머감각에 헛웃음을 짓는 나를 보며 임재후 쿡이 마주 웃었다.

"졸업하면 꼭 와라. 언제든 좋으니까. 기다릴 거야."

그 미소에 난 이런 대답밖에 할 말이 없었다.

"기다리지 마세요. 안 올 거예요."

누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댔냐? 옛말은 역시 순 구라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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