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위에는 더욱 위가 있다.-4-
혹시 이런 경험이 있는가?
맑은 날을 골라 놀러 간 바닷가. 뜨거운 햇살 아래 펼쳐진 하얀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를 오가며 물놀이를 즐기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기진맥진하여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코로 스며드는 고소한 냄새.
해변의 가판대에서 파는 군오징어나 군옥수수, 버터감자 따위의 군것질거리 냄새에 저도 모르게 끌려가는 몸.
멋들어진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제대로 된 식당보다 이상하게도 그런 군것질에 마음이 간 적. 혹시 이런 경험을 한 적은 없는가?
아마 대부분은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거다. 아니면 비슷한 것이라도.
어째서일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비싸기만 한 군것질거리에 자금을 소모하기보다 식당에서 제대로 한 끼를 먹는 게 이성적으로는 옳은 선택일 텐데, 어째서 사람은 그런 것에 마음이 끌리는 걸까.
뭐, 이 물음에 정확한 답은 없다고 봐야겠지.
그건 여행지의 분위기에 물든 사람의 감성에서 우러나온 선택일 수도 있고, 혹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뇌가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공부할 시절 어떤 영양학 선생님은 격한 운동으로 에너지를 소모한 몸이 염분과 탄수화물을 한시라도 빨리 보급하기 위해 뇌가 그런 방향으로 선택을 강제한다고 했던가.
추운 겨울날 스키장만 갔다 하면 컵라면이 그토록 끌리는 이유도 그와 비슷하다고 가르쳐주셨던 기억이 있다.
과학적인 면에서야 재미있는 결론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심심한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생각이 전부 뇌의 화학반응에 불과하다는 건 너무 감성이 결여된 것 같아서.
식사라는 건 맛과 영양이 전부가 아니다. 그날의 날씨, 경치, 분위기, 기분. 사람이 무슨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지는 그 사람 본인조차 모를 때가 많다. 오늘 뭐 먹지 같은 말이 괜히 나오겠는가.
그 오묘한 상황과 환경, 감정의 변화에 따라 사람은 시시때때로 원하는 음식이 달라진다.
아무튼,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그건 바로 지금 내 앞에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옥수수 한 접시 더 주세요!"
"여기도요!"
"예! 잠시만요!"
대체 이 많은 사람이 어디 그렇게 숨어 있었는지, 수영복이나 캐주얼한 차림으로 몰려온 고객들이 내 앞에 줄까지 서가며 음식을 받아가는 중이다.
'그것도 하필 엘로떼를 말이지…….'
아니, 엘로떼는 어디까지나 내가 방금 그 어르신을 위해 임기응변으로 만든 물건인데, 정작 손님들은 내 본래 메뉴인 바비큐에는 눈길도 안 주고 옥수수를 달라며 아우성이다.
덕분에 곤란해진 건 나다.
애당초 냉장고에 있던 옥수수는 어디까지나 서브에 불과했다.
고기 바비큐에 곁들이로 나갈 예정이었으니까. 고기와 옥수수는 상상 이상으로 조합이 잘 맞는다. 그래서 일부러 조금만 준비한 건데, 그게 원래 주역이 될 터였던 육류와 해산물을 밀어내고 센터를 차지할 줄이야.
고기나 해산물은 이미 뷔페에서 질리도록 먹었기 때문일까, 비교적 저렴한 간식거리 느낌인 엘로떼에 이토록 사람들이 열광하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안 그래도 작은 냉장고에 있던 옥수수만으로 남은 시간을 버티는 건 굉장히 요원한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옥수수에 바르고 뿌릴 소스 따위의 부재료도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식자재를 옮기는 역할을 맡고 있던 주방의 막내 쿡이 나와 함께 덩달아 바빠졌다.
"여기 옥수수랑 칠리 파우더, 마요네즈랑 홀그레인 머스타드하고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부탁드립니다!"
"예? 그걸 전부? 얼마나요?"
"소스는 전부 3ea! 옥수수는 들고 올 수 있는 만큼!"
본의 아니게 요리사를 상하차꾼으로 만들었지만, 막내가 하는 일이 원래 그렇다. 힘들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해야지 별수 없다 이거야.
잔혹한 말이었지만 이건 우습게도 지금의 내게도 그대로 통하는 말이었다.
내가 지금 파티에서 곁가지로 나갈 요리를 만들러 온 건지, 아니면 무슨 관객 참여형 요리대회를 하러 온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격렬한 시간을 보낸 끝에 비로소 선상 파티가 막을 내릴 시간이 됐다.
"고생했어요."
"쿡도요. 괜히 저 때문에 더 고생만 하신 것 같습니다."
"류 씨만 할까."
고객의 관심이 집중되다시피 한 탓에 튀어 버린 어그로에 그대로 노출당한 내 주변의 쿡들에겐 미안한 마음뿐이다.
이게 뭐 개인 영달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모를까 정해진 급료를 받고 하는 일이라…… 본래 회사일은 나한테 돌아오는 일이 없을수록 좋다 하지 않는가.
그나마 시간이 지날수록 배가 찬 고객들이 다른 곳으로 흩어진 덕에 시간이 지날수록 나름 일이 수월해져서 그럭저럭 할 만 했다. 쉬웠다는 이야긴 전혀 아니지만.
'다른 애들은 자고 있으려나.'
사람은 지칠수록 위를 봐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사장님 말처럼 고개를 크게 들었지만, 벌써 중천을 지난 보름달의 모습에 괜히 한숨만 늘어났다.
거 참, 좋다고 한 일이긴 하지만 일단 놀러 온 건데 너무 워커홀릭처럼 사는 거 아닌가 몰라.
이런 건 회귀 전과 비교해도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꼭 누군가 나에게 '너는 자유로운 몸이 아니야.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이라고 귀에 바람을 넣는 느낌이랄까. 이러다가 장인이신 백 회장님까지 등판하시겠네.
구름 한 점 없는 저 텅 빈 하늘이 꼭 내 신세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문득 까만 하늘에 알알이 박힌 별천지가 눈에 들어온다.
외해의 바다에서 보는 별은 참으로 밝았다. 강원도 산골짜기 한구석에서 추위를 견디며 어거지로 봐야 했던 밤하늘 속 별무리보다 훨씬.
언뜻 보면 텅 빈 것 같은 내 신세도, 저런 별들이 가득 감춰져 있는 걸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며 나는 밤하늘에 시선을 고정했다.
선상파티의 마지막 클라이맥스, 배에서 쏘아 올린 온갖 색채의 폭죽이 밤하늘을 별보다 더 밝은 빛으로 수놓는다.
그 광경이 꼭 까만 캔버스를 갖가지 물감으로 채색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 시간까지 깨어 있지 않았다면, 이 배의 꼭대기로 올라오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을 멋진 광경이었다.
***
"정말 고생 많았다. 덕분에 살았어. 진짜 고마워."
폭죽놀이를 끝으로 먼저 선내로 돌아간 고객을 뒤로 하고 현장을 정리하던 날 찾아온 임재후 쿡이 눈물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뭘요. 공짜로 한 것도 아닌데요."
"그래도 고생한 건 고생한 거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정말 잘 해줬어."
고객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다며 싱글벙글 웃는 임재후 쿡이었다.
"좋았다면 다행이네요. 고생한 보람은 있는 것 같아서."
"좋은 수준이 아니었다니까? 안 그래도 요즘 식당 쪽 클레임이 많아져서 힘들었는데 이쪽은 잘 풀려서 그나마 다행이야."
하긴, 식당 쪽이 지금 얼마나 난장판인지를 생각하면 뭐 하나 잘 풀린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애당초 내가 그 트러블의 증거 아닌가. 결과라고 해야 하나. 뭐, 나야 곧 내릴 사람이고 일도 끝났으니 이제는 아무래도 좋지만.
'아, 그러고 보니.'
아까까진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어서 잠깐 까먹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근데 혹시 그건 어떻게 됐나요?"
"뭐가?"
"VVIP요. 손님 중에선 못 본 것 같았거든요."
VVIP쯤 되면 일단 기본 고객과는 태가 다르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나 잘난 사람이요'하는 아우라가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게 있다.
'그런데 일하면서 그런 사람은 딱히 못 봤단 말이지.'
하기야 그런 사람이 엘로떼 같은 간식거리를 굳이 줄까지 서가면서 찾을 것 같진 않네.
내 물음에 임재후 쿡이 답했다.
"VVIP라면 스카이라운지에 출입 기록은 남아 있었어. 잠깐 계시다 금방 가신 것 같지만."
"그랬군요."
"왜, 궁금해?"
궁금하냐고 묻는다면야 그렇긴 하다.
이런 큰 배를 모는 회사의 VVIP라는 건 그만큼 사회적 역량이 있는 사람이라는 거니까.
모르긴 몰라도 어느 잘 나가는 기업의 CEO라거나, 재벌 가문 사람이라거나, 아니면 정치인, 혹은 연예인 같은 유명한 사람일 수도 있고.
혹시 아는가. 유명한 배우라도 될지. 뭐, 그랬다면 당연히 이 배에 난리가 났겠지만. 아무리 외국이 스타의 사생활을 신경 써주는 풍조가 있다 해도 이토록 가까이서 볼 기회는 적지 않은가. 군중심리라는 건 무서운 법이다.
하지만 임재후 쿡은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부정했다.
"아니, 이번에 탑승하신 VVIP는 딱히 유명한 분은 아니야. 봐도 누군지 모를걸?"
"그래요?"
"응. VVIP 신상 정보는 원래 외부인한테 발설하면 안 되지만, 이건 잠깐이나마 우리 크루가 되어준 서비스."
아니, 안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귀는 저도 모르게 쫑긋거렸다. 어쩔 수 없잖아.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호기심은 사람의 본성이니까.
"이번에 탑승하신 분은 농부거든. 말이 농부지 딱히 농사를 짓는 사람은 아니지만."
"농부요?"
"어. 미국인인데, 종자 개발로 돈을 긁어모은대나. 뭐, 소문이지."
농부라고? 아, 그럴 수도 있긴 하겠구나.
한국사람 입장에서 농부가 억만장자라고 하면 좀 어처구니없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미국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쪽 농부는 정말 잘 나가는 사람이면 개인이 한반도 국토보다 넓은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야 그 정도쯤 되면 정말 상위 0.1%보다 위겠지만.
그 넓은 경작지에서 나오는 작물이 통째로 수익이 되는 것이다. 작은 나라 하나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많은 작물이 말이다. 그 정도면 억만장자 정도야 가뿐할 거다.
'그나저나, 미국인 농부라…….'
문득 머릿속에서 앞서 있던 일이 생각났다.
내 부스의 개시 손님이 되어주신 고객. 그 어르신도 분명 미국인 농부 아니었나?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긴 하지만 특징을 생각하면 반쯤 확실했다.
"에이, 설마."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내 개시 손님이 VVIP였다고? 말도 안 되는 확률이다. 설마 그럴 리가.
확실히 특이한 점이 있는 손님이긴 했다. 입고 있는 옷은 상당히 고급으로 보였고, 시계도 자세히는 못 봤지만 상당한 고가 모델로 보였다.
하지만 이 배에 탄 고객 중에 오히려 안 그런 손님이 드물기에 크게 신경은 안 썼는데, 설마 진짜로?
혹시나 싶어 머리를 굴리는 나를 임재후 쿡이 의아하다는 듯 바라봤다.
"왜 그래?"
"아뇨. VVIP 손님을 본 것 같아서……."
"뭐? 정말로?"
"예. 농부로 보이는 장년 남성 고객이었는데요."
이어진 내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던 임재후 쿡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아하하, 아냐아냐. 아마 잘못 본 걸 거야."
"왜요?"
그럴 리 없다며 단정 짓는 것이 이상해 되묻자, 임재후 쿡이 말을 이었다.
"그 VVIP 손님, 여성분이거든."
"아."
과연, 그렇다면야 저렇게 단언하는 것도 납득이 된다.
'신기하네.'
내가 만난 고객이 VVIP는 아니었다 치더라도, 하필 성별만 다른 미국인 농부가 첫 손님이었다는 데에서 묘한 인연을 느낀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는 해도, 그것도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 안심과 아쉬움이 묘하게 뒤 섞인 마음을 집어넣으며 나는 뒷정리를 마무리 지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학생은 학생답게 일찍 자야 하지 않겠는가. 뭐, 새벽 한 시가 넘어 버린 시간이긴 했지만.
***
선상파티가 끝난 다음 날. 아니, 다음날이라고 해도 00시를 기준으로 하면 같은 날이긴 하지만 나를 비롯한 성심고 학생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을 먹으러 나섰다.
"벌써 마지막 날이네. 아, 좀 더 있고 싶다."
"그러게나 말이다."
아쉽다는 듯 한숨을 뱉는 철정이 녀석의 말에 절절히 공감했다. 다른 이들이 하루 일하고 4일 놀 동안 나는 이틀을 일했으니까. 뭔가 수학여행 절반 손해 본 기분이다.
다른 애들도 오늘 오후에 하선하는 것이 믿기지 않는지 오늘은 어딜 어떻게 돌아다니자며 벌써 계획을 짜고 있다.
하지만, 그래. 누구에게든 계획은 있는 법이지.
'트러블이 일어나기 전까진.'
뷔페에 도착한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구겨졌다. 이유는 정해져 있다. 그놈의 대륙 양반들.
"아, 저거 오늘도 저러네."
"진짜 내릴 때까지 저럴 생각인가……."
대체 저 나라의 식사 매너가 어떻게 되어 먹었는지 머리를 갈라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행태는 오늘도 여전했다.
뷔페에 들어가기도 싫게 만들어지는 광경을 조성하는 데에 열심히 임하는 그들의 모습을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다, 문득 뷔페 앞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어제 파티에서 봤던 어르신이다. 옆에는 동행인지, 어딘가 인상이 비슷한 중년 여성이 한 사람.
경악스러운 것을 보았다는 듯한 눈초리를 한 그 사람들의 모습에 절로 공감이 갔다.
"아."
이런, 가 버렸구만.
차마 더 이상은 봐줄 수 없다는 듯 식당에서 등을 돌려 떠나는 어르신과 그 뒤를 급히 따르는 여성의 모습에 나는 다시금 뷔페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게 화날 만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