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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35화 (235/403)

235. 위에는 더욱 위가 있다.-3-

회귀 전의 내가 외국에서 일한 기간 중 가장 오래 머문 나라를 꼽으라면 명실상부 뼈를 묻을 작정을 하고 들어간 호텔이 있는 프랑스겠지만, 그 다음을 꼽으라면 조금 애매하다.

미국이나 이탈리아, 중국 쪽에서도 잠깐 일해 봤고 기간도 엇비슷하니까.

다만 '일'을 제외한다면 두 번째로 자리하는 나라는 단연 미국이다.

왜냐하면 제대 후에 미국에서 요리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교육을 받던 시절과 일하는 시기를 합치면 분명 프랑스 다음에 자리하는 건 미국이겠지.

덕분에 난 어디 가서 자랑할 수준은 못 되더라도 나름 미국의 문화란 놈에 제법 익숙하다.

미국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아, 그래. 굉장히 혼란한 나라다.

긍정적인 의미로든 부정적인 의미로든.

이유야 뭐 여러 가지겠지. 인종의 용광로라고 불릴 정도로 다민족이 한 나라에 모여살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나라가 너무 넓어서 그럴 수도 있겠고.

아무튼 '미국 사람은 이렇다'는 말로 정리할 수 없는 게 바로 미국다움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몇 가지 정도는 많은 사람들 사이의 공통점이 되는 게 있었다.

예를 들어 미식축구에 대한 애정 같은 것 같은.

그중 하나가 바로 미국 중부 지방. 특히 중서부 지방 쪽 사람에 대한 인식이었다.

미국 중서부는 넓은 평야와 목초지가 많은 환경을 하고 있다. 덕분에 축산업이나 농업 같은 게 굉장히 발달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규모가 최대급에 달하는 축산업의 메카가 있는 지역이니만큼 육류 등이 터무니없이 싸고, 그렇기에 그쪽 지역 사람들은 대다수가 육류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시피 하다. 지역을 먹여 살린 경제적 수단을 싫어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단언해도 좋다. 미국 중부 출신의 장년 남성 중 채식주의자는 없다. 있어봤자 정말 아주, 아아주 극소수다.

물론 중부 억양이 섞인 영어를 구사한다고 반드시 그쪽 출신이란 보장이야 없다마는, 나도 관찰력이라는 게 있다.

목깃과 소매를 선으로 안팎의 톤이 서로 다른 피부, 잔 상처와 굳은살이 많은 손, 이마 부근을 가로지르는 선은 오래도록 모자를 써서 남은 흔적이다.

뭐, 대충 정리하자면 피부색이 짙어질 만큼 바깥에 오래 서서 일해야 하는 직업. 그 억양과 매치하면 그 답은 몇 없다.

아마 농부이거나, 혹은 축산업자이지 않을까.

'그거 말고 신경 쓰이는 게 몇 가지 더 있긴 하지만…….'

뭐, 어차피 이거야 내 멋대로 상상한 거에 불과하니까. 내가 뭐 베이커 스트리트에 사는 탐정은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약 십 초 정도의 관찰로 대략적인 판별을 하고 있을 때, 제법 연식이 되어 보이는 수통으로 알코올 냄새가 풀풀 풍기는 독주를 홀짝이던 어르신이 내게 되물었다.

"고기 말고 뭐 딴 거 없는 겐가? 그럼 다른 데 가고."

"아뇨. 잠시만요. 지금 곧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기다리게 하지 말란 듯 말을 툭 던지는 어르신이었으나 이대로 보내면 쓰나.

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갈 때는 아니지. 고객이 힘든 발걸음을 하셨다면 저작 운동 한 번은 하게 만들어드린 다음 보내야 하지 않겠나. 그러다가 아주 눌러앉으면 베스트고.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 손님을 앞에 둔 난 소뇌에게 업무를 방폐하고 제멋대로 휴식기에 들어가 있던 대뇌를 긴급히 일으켰다.

보기엔 조촐하게만 보이는 이 간이 조리대는 보기보다 다양한 기능을 감추고 있었다.

냉장고 또한 그중 하나다. 뭐, 아마 기능은 가정에서 쓰는 10년 먹은 냉장고만도 못하겠지만.

그런 냉장고라 해도 속은 제법 알차다. 식자재도 제법 쌓여 있고, 그 중엔 내가 당장 메인으로 쓸 물건은 아니더라도 예비용 식자재가 조금은 들어있다.

'그리고 재고 목록은 전부 기억하고 있고.'

경력이 몇 년인데 이 정도 사이즈 냉장고에 든 재고도 전부 파악 못 하고 있으면 나가 죽어야지.

아무튼, 그런 기억 속에서 이 상황에 쓸 만한 식자재를 간추리다가 마침 딱 좋은 녀석이 하나 생각났다.

"손님. 혹시 치즈는 괜찮으십니까?"

"치즈? 상관없네만……."

"앞서 말씀하신 고기와 해물 외에 드시지 못하는 음식은 있으신가요?"

"딱히."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역시 이 손님은 비건 같은 게 아니었던 듯하다. 유제품도 ok인 것 같고. 그럼 마침 딱 괜찮을 것 같은 게 하나 있지.

우선 먼저 꺼내는 건 소스를 비롯한 부재료.

한 덩이 크게 자른 버터를 쇠그릇에 담아 그릴 위로 올려 녹이고, 마요네즈와 홀그레인 머스타드를 대략 3:1 정도의 비율로 섞는다.

그다음은 치즈. 갈아서 뿌리는 경질 치즈와 그라인더를 준비했다면 비로소 주인공이 등장할 시간이다.

두툼한 알갱이가 우둘투둘 나란히 자리 잡은 길쭉한 노란색 몸통.

보존을 위해 제거하지 않은 길쭉한 이파리를 떼어내자마자 은근히 올라오는 고소한 냄새가 입속을 단박에 군침 투성이로 만든다.

다만 이것은 딱히 대단한 재료는 아니다.

아마 지구상에서 가장 흔한 작물 중 하나겠지.

그 증거로 내 앞에 계신 손님께서는 그 이파리를 떼어내기도 전에 이미 그 정체를 꿰뚫어 보신 지 오래다.

"옥수수?"

"예."

그 말대로.

고기도, 해물도 마다하는 손님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준비한 특별재료는 다름 아닌 이것. 옥수수다.

"……."

정작 이걸 드실 손님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무어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잔뜩 구겨진 얼굴을 한 손님이 다시금 술을 홀짝인다.

음. 예상한 반응이었다.

너무 생각한 그대로 튀어나오는 꾸밈없는 반응에 절로 나올 뻔 한 웃음을 간신히 참은 나였다.

앞서 말했다시피 옥수수는 지구상에서 가장 흔한 작물 중 하나.

오랜 기간 동서양의 인구를 부양한 쌀이나 밀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면적 단위 생산량. 거기다 사용할 수 있는 용도는 그 이상으로 다양하다.

그런 특성을 지닌 탓에 옥수수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생산량을 자랑하는 작물 중 하나가 되었고, 그 말은 즉 내가 예상한 대로 이 손님의 정체가 농부라면 질리도록 키우고, 먹었을 작물이라는 뜻이다.

솔직히 나만 해도 모처럼 여행 가서 식사를 주문했는데 백반 한 상이 나오면 적잖게 실망하겠지. 아마 이 손님이 느낄 심정도 비슷하리라.

하지만 그 실망을 다시금 배신하여 최고의 맛을 선사하는 것이야말로 요리사의 책무. 적어도 오늘의 난 내 책무를 다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내 이야기에 별다른 반응도 없이 기분 상한 표정만 지은 고객에게 미소를 돌려드린 뒤, 나는 손을 움직였다.

우선은 버터. 실리콘 붓을 이용해 앞서 잘 녹여둔 버터를 옥수수 위로 꼼꼼히 발라준다. 이 녀석은 평소 한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무염버터가 아닌 소금이 들어간 가염버터. 유지방의 고소한 풍미를 더하며 옥수수 속까지 소금기가 스며들도록 돕는 작업이다.

이렇게 꼼꼼히 버터를 바른 옥수수를 꼬치에 꽂아 그릴 위에서 굴리며 굽는다.

옥수수 속에 숨어 있던 고소한 냄새가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바깥으로 뛰쳐나오고, 그것이 지글지글 끓는 버터의 풍미와 뒤섞여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엄청난 향기로 변한다.

'이쯤 되면 이건 폭력이지.'

복싱 시합 중에 상대의 펀치에 턱을 얻어맞으면 그 충격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라고 한다.

이 또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압도적인 풍미에 취한 뇌가 다른 오감은 도외시한 채 후각을 발휘하는 데에 온 힘을 쏟으면 자연스레 머리가 몽롱해진다.

'이것만 먹어도 엄청 맛있겠지?'

당연한 거다.

고오급 옥수수에 고오급 버터. 거기다 끝내주는 뷰까지.

이걸 먹고 맛이 없으면 그것부터 말이 안 되지.

하지만 이 요리는 아직 끝이 아니다. 고작 이 정도로는 이 어르신의 실망을 반의 반도 채워드리지 못한다.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진한 갈색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옥수수 위로 아까 만든 마요네즈 소스를 듬뿍 퍼서 펴 바른다.

옅은 노란빛이 감도는 하얀 마요네즈가 부푼 옥수수 알갱이 사이사이로 파고들 듯 들어간다.

이 상태로 다시 한번 익히면 마요네즈의 지방이 특유의 살짝 신맛과 함께 옥수수 위로 코팅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무리에 들어갈 차례다.

잘 익은 옥수수 위로 미국의 대표적인 핫소스인 스리라차 소스를 쭈욱 짜 지그재그 모양으로 뿌려준 뒤, 그라인더로 곱게 간 치즈를 튀김옷에 빵가루 입히듯 골고루 흩뿌린다.

마지막 마무리로 멕시코산 칠리파우더를 아주 살짝 덧입혀주면, 비로소 완성.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약 옥수수입니다."

이게 신토불이 떨이다! 마, 함 무바라! 쥐인다 아이가!

***

"마약 옥수수Drug corn……?"

토마스 테일러는 난생처음 듣는 생경한 이름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 그건 그냥 제 조국에서 이 요리를 부르는 별명이고, 실제 이름은 멕시코에서 유래한 멕시코식 옥수수 구이인 엘로떼라고 합니다."

"엘로떼."

마약 카르텔로 유명한 멕시코에서 유래한 음식에 그런 별명을 붙이다니, 특이한 나라도 다 있다고 토마스는 생각했다.

켄자스 태생으로 한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온 토마스는 약 보름 전 뜻밖의 기회를 얻어 마제스틱 퀸 호에서 팔자도 아닌 바캉스를 즐기게 됐다.

그러나 놀러온 것까진 좋았으나, 바다와는 크게 인연이 없는 미대륙의 중심부인 켄자스 토박이인 그에게 바다 위에서의 생활은 편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해질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어제 있던 풍랑으로 가벼운 멀미가 온 탓에 만족스런 식사도 하지 못했다.

속이 안 좋으면 뻥 뚫린 곳에서 바깥바람이라도 쐬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에 이런 선상파티까지 참여했지만, 여전히 배 위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와중에, 이 요리와 만난 것이다.

질리도록 키우고, 질리도록 보고, 질리도록 먹은 옥수수.

하지만 손에 들린 옥수수로부터 풍겨오는 이 특유의 고소한 향기는 고향의 향수를 떠올리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꿀꺽

얼마 만일까, 진심으로 식욕이라는 것이 솟아난 것은.

버터와 옥수수가 끝이 아니다. 살짝 뿌린 설탕의 단내, 마요네즈의 미약한 신내, 녹은 치즈의 구수한 내음. 그 속에 숨어 살풋 존재감을 드러내는 매콤한 칠리향.

한마디로 정의하여, 살찌는 냄새.

뼛속부터 토종 미국인인 토마스 테일러에게는 그 무엇보다 익숙한 것이었다.

'이건 무조건 맛있다.'

먹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칼로리는 맛의 전투력이라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먹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하여 그것을 먹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토마스가 뜨끈뜨끈한 김을 피워 올리는 엘로떼를 크게 베어 물었다.

'아, 역시.'

무엇을 숨기랴. 정말 생각한 그대로의 맛이었다. 고소하고, 짭짤하고, 달콤하고, 느끼하며, 매콤하다.

그러나 그 맛은 결코 단적이지 않다. 캠프파이어 주변에서 파트너를 바꾸어가며 춤을 추는 것처럼, 각각의 맛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계속하여 놀라운 맛의 조화를 이룬다.

짠맛이 고소한 맛을 극대화하고, 단맛이 짠맛을 살짝 억누르며, 혀를 타고 오르던 느끼함을 매콤함이 단번에 잡아내면 그 뒤를 이어 다시 짠맛이 화끈하게 치고 올라온다.

마약이란 별명을 괜히 붙인 게 아니라는 것을 토마스는 깨달았다.

한 입 먹으면 멈출 수 없다. 그야말로 음식에 중독될 것 같은 맛.

정신을 차리고 보니, 토마스의 손에는 뼈대만 앙상한 옥수숫대가 꽂힌 꼬치만이 들려 있을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미 탓에 입맛이 없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할 식욕!

'한 개 더 먹고 싶다.'

마치 이제껏 참았던 며칠 분량의 식욕이 한꺼번에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에 토마스는 찬혁의 가판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압도적인 옥수수를 굽는 향기 때문일까, 아까까지 테일러가 서 있던 자리는 어느새 몰려온 건지 모를 인파가 벌떼처럼 모여 차지한 지 오래였으니까.

"……."

이제 와 줄을 서봤자 저 인파를 뚫고 다시 음식을 받는 건 요원한 일일 것이다.

물론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저 줄 뒤로 걸음을 옮기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에겐 그리 여유가 많지 않았다.

"아빠, 여기서 뭐 해?"

"아, 왔구나."

토마스는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아쉬운 마음을 애써 감추고 고개를 돌렸다.

"일은? 다 끝났니? 잘 풀렸어?"

"아니. 중국 쪽 바이어가 종자 값을 자꾸 후려치려고 해서 대판 싸울 뻔했어. 모처럼 바깥까지 나와서 만나줬는데, 사람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이가 제법 찼음에도 어릴 적처럼 입술을 삐죽 내미는 딸의 모습에 토마스가 헛웃음을 짓자 그녀가 내밀었던 입술을 집어넣곤 물었다.

"어, 아빠 뭐 먹었어? 입맛 없다며."

"아, 이거? 그래. 방금 막 배 좀 채웠다."

"잘됐네! 어제 아침부터 멀미해서 밥도 하나도 안 먹더니! 뭐 먹었어? 맛있는 거 먹었어?"

"그래."

잠시 말을 끊은 토마스가 찬혁 쪽으로 눈짓하며 말했다.

"바다 위에도 상당히 괜찮은 요리사가 있더구나."

"오, 입맛 까다로우신 우리 늙은이가 웬일이래?"

"말본새 하고는."

장난스레 웃는 그녀의 콧잔등에 딱밤을 선물해준 토마스가 말을 이었다.

"내일부터는 방 말고 나가서도 밥 좀 먹어보자. 모처럼 배에 탔는데, 매일 방에서만 먹으면 쓰나."

작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리 현명하지는 못한 생각이었으나, 사정을 알 리 없는 그의 딸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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