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34화 (234/403)

234. 위에는 더욱 위가 있다.-2-

"VVIP가 탑승해계신다고요?"

VVIP. Very Very Important person이라는 문장의 줄임말.

풀어 설명하자면 아주아주 중요한 양반이 되시겠다.

솔직히 말만 들으면 무슨 유치원생 둘이서 서로 자기가 더 세다며 말장난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을 수 없는 말이지만, 어쩌겠어. 정말 중요하니까 중요하다고 부르지.

그야 물론 우리도 어느 고객이든 최고의 고객이란 마음가짐으로 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가게 매출을 책임지다시피 하는 고객을 여타 고객과 완전히 동등하게 볼 수 없는 것만은 자연스러운 판매자의 심리.

VIP 구분은 그 심리의 극에 달한 제도다.

요컨대 돈 많이 써주는 손님 최고다 이거야.

"연간 탑승일이 최소 50일 이상인 고객이 VIP. 그중에서 매출액이 상위 5% 안에 들면 VVIP지. 말이 상위 5%지, 실질적으로 따지면 아마 년마다 돈을 억 단위로 써야 할 거야."

"고작 배 좀 타고 다닌다고 그게 가능해요?"

"다들 그렇게 묻는데, 이게 의외로 된단 말이지. 이번에 탑승하신 분 같은 경우는 로열 스위트룸만 보름 가까이 이용하셨으니까. 수행원은 전부 스위트룸이고."

"와오."

어제 실내에서 할 짓이 없어 보았던 숙박요금표에서 본 그냥 스위트룸만 해도 1박에 100만원 정도 하지 않았나? 로열 스위트룸은 또 뭐야?

"VIP만 이용 가능한 객실이야. 이 배에도 고작 여덟 개밖에 없어. 네 개가 한 층이거든."

"허허……."

배가 이만하니 한 층 너비만 해도 장난 아닐 텐데 그걸 방 네 개가 잡아먹을 정도면 대체 얼마나 큰 걸까. 그 방을 잡는 가격은 또 어떻고.

부르주아니 뭐니 하는 걸 떠나서 스케일로 이미 아웃이다. 50이 다되어가던 나조차 평생 해본 사치라고는 끽해야 백만 단위. 천만 단위를 넘어간 소비 같은 건 집을 구할 때 외엔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그런데 거기서 억 단위라. 거 참 상상하기도 힘든, 아니. 싫은 단위다. 생각해봐라. 난 이렇게 조뺑이 쳐서 하루 10, 20 꼬박꼬박 버는데 누군 하루에 수백을 숨 쉬듯 태우고 살고 있다니……! 레볼루시옹. 비바 라 레볼루시옹이 필요하다……!

'뭐, 농담은 이쯤 하고.'

내가 그런 사람 어디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그런 거에 별 신경이나 쓸까. 상상 이상의 규모에 살짝 놀라긴 했어도 이 세상에 은근히 비일비재한 게 그런 사람이다. 깊게 생각하면 피곤해진다.

"뭐하시는 분이길래 그렇게 돈을 펑펑 쓰신대요?"

"고객이 뭐하시는 분인지는 우리한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렇긴 하죠."

우리에게 중요한 건 고객이 고객이라는 것이다. 고객이란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고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

서로를 이은 거라곤 돈밖에 없는 건조한 관계지만, 그 외에 서로를 묶는 게 없는 건전한 관계.

그러니 우리야 그 사람이 어디 아랍 부자든 억만장자든 신경 쓸 필요 같은 건 없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건 그저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을 완벽하게 만들 방법에 대한 것 말곤 없으니까.

"듣기로는 스포츠 스타니, 대기업 회장이니, 재벌 3세니. 아주 소문만 무성해. 번잡한 걸 좋아하시는 분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그런 분이면 요 근래 보통 불편하신 게 아닐 텐데 용케 배가 조용하네요."

"사실 VIP쯤 되면 딱히 일반 구역으로 나올 일이 없거든. 여가 시설이야 VIP 전용층에 더 좋은 게 많고 식사는 전부 룸서비스로 직접 가져다드리니까. 필요한 거 찾는 심부름도 우리가 해."

"아."

아니 그런데 그런 사람이면 선상파티에는 안 나오는 거 아냐?

내 외로운 딴죽에 임재후 쿡이 고개를 지었다.

"뭐 분명 평소 같았음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겠는데 그럴 수도 없게 됐어."

"?"

"오늘 밤 스카이라운지 티켓 여러 장이 VVIP 전용 카드로 결제됐거든. VVIP 본인은 모든 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지만 수행원은 그럴 수도 없어서 대신 구매한 거겠지."

아하, 과연.

그렇다면 정말로 그 VVIP가 선상파티에 참여할 확률이 아주 높다고 할 수 있겠네.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고. 아직은 모를 일이지만 유비무환이라고 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러니까 긴장 풀지 말고 있어. 내가 끌어들여 놓고 이렇게 말하기도 미안하긴 하지만."

머쓱하게 웃는 임재후 쿡을 따라 나도 쓴웃음을 지었다. 이 상황 자체가 누가 바라서 만들어진 결과는 아니라지만, 이미 일이 벌어진 걸 별수 있나.

우리 두 사람 다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지금은 그저 서로가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음을 안다.

"자, 시간이 좀 남긴 했어도 중요한 거 다 익히려면 빠듯해. 얼른 시작하자."

"옙."

마제스틱 퀸 호의 경적이 울린다.

정오 정각을 알리는 경적 소리였다.

***

마치 실제로 캠핑장에 온 것 같은 간이 조리기구에 익숙해지기 위해 연습하거나 메뉴를 연습하는 등의 준비를 앞서 끝마칠 때쯤이 되자, 시간은 어느덧 파티 시작을 눈앞에 두게 됐다.

"나도 이만 내 자리로 돌아갈게. 힘내, 찬혁아. 파이팅!"

여태 내 옆에 붙어 날 케어해 주시던 임재후 쿡까지 메인 주방으로 돌아가자, 나는 마침내 서로 얼굴도, 이름도 잘 모르는 이 배의 조리사들 사이에 섞여 가판대에 서게 됐다.

빛이 암전된 스카이라운지로 하나둘 모여든 승객은 제법 많은 인파가 되어 조금씩 드넓은 스카이라운지를 군데군데 채운다.

그걸 보고 새삼 깨달은 사실.

VVIP의 중요성 때문에 잠시 깜빡하고 있었지만 결국 내가 서비스할 고객의 절대다수는 평범한 고객이라는 것.

뭐, 당연한 일이긴 하다. 세상에 그런 사람만 있으면 비위 맞춘다고 살 떨려서 살겠나.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운 분위기네.'

회귀 전 호텔에서 종종 보던 것과 비교하면 훨씬 개방적이고 화사한 분위기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가득하다.

그리고, 드디어 시간이 됐다.

수평선 끝에 걸려 있던 화구가 단말마 같은 노을빛과 함께 수평선 아래로 잠긴 그 순간, 스카이라운지의 모든 조명이 암전한다.

승객 사이에 침묵이 깔리기도 잠시, 웬 커다란 굉음이 승객의 말소리를 대신한다.

─기이이이……!

"와."

저거 진짜 열리는구나.

소리의 진원지는 바로 우리들의 머리 위.

마치 하늘이 반으로 쪼개지듯 정 가운데를 시작으로 한 균열이 일직선으로 넓어지더니, 그대로 더더욱 그 너비를 키우며 하늘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진한 남색을 지나 검은빛을 띠기 시작한 하늘에 알알이 빛나는 별 또한 우리 승무원처럼 저마다의 자리에 나열한다.

내가 거대한 배에 타고 있단 건 나도 모르지 않지만, 이렇게 대놓고 그 거대함을 되새기게 하는 연출에 맞닥뜨리니 탄성이 안 나오고는 배길 수 없었다.

"우와……."

"이야……."

그런 반응을 한 건 당연히 나뿐만이 아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눈동자 속엔 동심과 낭만이 가득하다.

그 동심과 낭만의 사이를 걸어, 누군가가 등장한다.

남자의 손에는 마치 동화 속에서 꺼내온 것 같은 원시적인 모양새의 횃불이 들렸다.

그 뜨거운 열기와 눈부신 빛에 자연스레 시선을 향하는 승객들. 그들 사이를 걸어 나아간 남자가 그들 중심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파티장 중심에 놓인 모닥불.

남자의 목표는 그것이었고, 그는 별 어려움 없이 목표에 닿았다.

그의 손에 들린 횃불이 재받이 위로 떨어진다.

─화륵!

그러자 눈 깜짝할 새에 높이 치솟는 불길! 미리 살짝 착화제로 적셔둔 장작에 순식간에 불이 옮겨붙은 반응을 확인한 그 순간, 준비하고 있던 나와 다른 현장의 쿡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파티의 오프닝 시퀀스 리허설 때 준비한 간단한 쇼다.

각 쿡이 서로가 가진 각자의 조리도구를 달궈 도수 높은 술을 뿌린 뒤, 그 증기에 망설임 없이 불을 붙인다.

증기가 된 알코올을 타고 오른 불씨는 순식간에 화염이 되어 마치 무대 위 폭죽이 터지는 것 마냥 치솟는 장작불과 함께 암전한 스카이라운지를 짧지만 폭발적인 빛으로 메웠다.

그 섬광이 가라앉자, 비로소 스카이라운지의 조명에 다시금 전기가 돌아오고, 모닥불에 불을 지핀 남자의 얼굴도 그 빛 아래 드러난다.

앤드류 선장. 모닥불을 등지고 관객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멋들어진 빳빳한 정복 차림으로 나란히 줄선 승객에게 경례했다.

그의 손이 올라간 순간, 그의 등 뒤에서 하늘로 오른 몇 발의 폭죽이 그의 후광을 자처했다.

더 이상 별다른 말은 필요 없단 걸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더는 못 기다리겠다는 듯 흥분에 들뜬 승객들의 표정이 앤드류 선장의 할 말을 대신하고 있었으니까.

파티, 시작.

***

"후우."

별 탈 없이 끝났네.

제법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나름 볼만한 그림이 연출되지 않았는가.

불꽃이 단번에 같이 솟아오르게끔 하려고 몇 번을 연습했는지, 실전에서도 잘 되어 다행이었다.

"후우…… 좋아, 일 시작하자."

쇼는 쇼고, 본직은 본직. 나는 준비한 파티 메뉴를 만들기 위해 서둘러 손을 놀렸다.

전열기에 전원을 넣고 붉게 달아오른 열선 위로 철망을 올린 뒤, 앞서 손질해둔 식자재를 그 위로 올린다.

무슨 요리를 할 셈이냐고?

솔직히 이런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요리라고 해봐야 크게 대단한 것도 없다. 솔직히 굳이 내가 필요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순한 요리다.

고기나 야채, 혹은 야채와 시푸드, 소시지 따위를 꼬치에 꽂아 굽는 단순한 꼬치구이 요리.

바다를 보며 즐기는 야외 요리라는 점에서 이만한 메뉴 선택도 없긴 하지만, 솔직히 어려울 게 없는 건 사실이다.

고기나 해산물, 야채는 해봤자 본 주방에서 미리 양념해서 재단한 꼬치를 현장에서 꼬치에 꽂아 굽기만 하면 끝이고, 내가 하는 거라고 해봐야 따로 양념을 만들어 맛을 조금 추가하는 정도?

솔직히 굽는 기술이야 누구한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이 정도라면 그냥 다른 사람한테 맡겨도 되지 않았을까 몇 번을 생각했다.

그때마다 임재후 쿡은 그렇지 않다며 내 생각을 만류했지만, 글쎄…….

'게다가 지금은 구워봤자 딱히 먹으러 오는 사람도 없고…….'

애당초 시간적으로 대부분의 승객이 이미 저녁을 먹고 왔을 타이밍이지 않은가.

그야 당연히 뭘 먹으러 오는 사람은 적을 수밖에.

"조만간 올 것 같긴 한데……."

스카이라운지 바깥쪽에는 전용 야외 수영장이 있다. 지금쯤 다른 사람들은 거기서 신나게 물놀이를 즐기고 있거나, 별구경, 바다구경을 하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터. 조만간 배가 꺼지든, 안주가 필요하든, 어쨌든 무슨 이유로든 음식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를 끝내두는 게 나을 것이다.

대충 머릿속에서 현장정리를 끝낸 뒤 행동을 시작했다.

구울 때 바를 양념, 구운 후 바를 양념을 따로 분리해서 만든 뒤 쓰기 편한 상태로 배치하고, 거기에 더해 이래저래 고기의 종류와 해산물의 종류 따위로 분류하여 꼬치를 만들어 언제든 바로 굽기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면 끝.

달군 전열기 온도 탓에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그때, 개시 후 첫 손님이 내 가판대를 찾아오셨다.

"실례하겠수."

"어서 오세요."

영어였다. 미국 중부 지방 느낌이 강하게 드는 억양.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제법 체격이 튼실한 노년의 서양인, 아마 미국인으로 여겨지는 남성이 어딘가 고까운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걸걸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여긴 뭘 파는 곳이요?"

"아, 고객님. 현재 스카이라운지 내 모든 시설은 무료로 이용이 가능하십니다. 저는 간단한 요깃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요깃거리?"

"예. 육류, 해산물 바비큐를 취급하며, 육류는 양, 돼지, 소, 닭을. 해산물은 새우 등의 다양한 갑각류를……."

"아, 됐고. 뭐, 딴 거 없소? 내가 고기는 좀……."

…… 뭐?

고기를 마다해? 건장한 중부 미국인 마초맨이?

'고기를 마다하는' '미국 중부 남성'이라는 난생 처음 보는 조합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내게, 남성은 여전히 고까운 표정으로 알콜 냄새가 풀풀 풍기는 수통을 들이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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