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위에는 더욱 위가 있다.-1-
성심고는 현장학습을 나갈 시 해당 업장에 학생들의 간이 이력서를 제출한다.
본래는 업장이나 사업체 측에서도 딱히 볼 생각을 않는 유명무실한 물건이긴 해도 일단은 그게 관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아무도 찾아볼 생각을 않던 그 이력서 중 한 장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호오……."
이게 성인도 되지 못한 어린 학생의 이력서란 말인가. 침대에 누운 제프리의 눈이 이른 아침부터 호기심으로 빛났다.
기본적으로 수상경력이 곧 업무능력으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걸 제프리 또한 알고는 있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그게 상식적인 선 안에 있을 때의 이야기.
"푸드 엑스포라."
상식을 넘어 버린 이력은 이미 그 자체로 설득력을 갖는다.
그의 손에 들린 이력서에 적힌 문구 중 대부분을 빼더라도 그 한 줄의 문장이 빠진 전부를 대체하고도 남는다. 애당초 학생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과업이지 않은가. 아니, 학생은커녕 현장에서 일하는 프로에게도 벅찬 일이다.
반대로 말해서, 그것을 해냈다면 아무리 어려도 프로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자네가 말한 게 이 친구라고?"
"예."
"용케 저 많은 애들 중에서 이 아이를 골랐군. 이력서를 살필 시간 같은 게 있었나보이."
"아뇨. 저도 바로 어젯밤까진 까먹고 있었어요."
자기도 놀랐다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지은 임재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이 학생을 데려오고 싶었던 건 이력서에 적힌 경력 때문이 아니라 일할 때 모습을 봐서 그랬던 겁니다. 이 배에 타고 7대양을 빠짐없이 돌아다닌 크루보다 이 친구 솜씨가 더 나았거든요. 처음엔 저도 이해가 안 됐는데, 이걸 보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 말에 어이가 없어진 건 오히려 제프리 쪽이었다.
"아니, 자넨 지도 총괄이라는 사람이 이력서도 안 살펴보나?"
"저도 이런 애가 숨어 있는 줄 알면 진즉 봤겠죠. 학생 중에 이런 애가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젠 아예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부하직원의 모습에 골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을 느끼며 제프리가 되물었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구만. 그래서, 어떻게 꼬시려고?"
"음…… 글쎄요. 사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요."
"뭔데?"
"정면 돌격이죠."
"그거참, 이미 작전도 뭣도 아니군."
"가끔은 번잡한 변화구보다 화끈한 직구가 필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양키 놈들이나 하는 야만적인 스포츠는 몰라."
제프리가 챙겨보는 스포츠라곤 10년 전에도 지금도 오로지 테니스뿐이었다.
***
"부탁할게!"
"……허어."
그래서 이렇게 됐단 말이지.
비로소 우중충한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빠져나와 햇빛의 중요함을 새삼 온몸으로 느끼는 아침.
짧은 시간 동안 느낀 감동이 무색하게도 내 기분은 그렇지만도 못했다. 이유 같은 걸 굳이 찾을 필요도 없이, 지금 아침밥을 먹기가 무섭게 날 찾아온 임재후 쿡 때문이었다.
"선상파티라고요? 그것도 내일도 아니고 오늘이요?"
"응. 오늘 밤이야."
"아이고 두야……."
사정이 딱하다는 건 알겠다.
대충 이해는 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저 민폐 덩어리…… 아, 악천후 말하는 거다. 악천후. 내 말 알지? 승무원은 결코 고객의 험담을 하지 않는다. 적어도 대외적 통로에서는.
아무튼 그 민폐 덩어리 덕분에 주방에서 사고가 터져서 중요한 이벤트를 맡을 일손이 딸리게 됐다.
이걸 다른 팀에서 데려오자니 애매하다. 안 그래도 모종의 이유로 일손이 딸리는 데다가 위로 올릴 만큼 실력이 되는 쿡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 라는 게 현 상황의 전모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내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답변은 무언가의 문장도, 낱말도 아닌 단순한 한숨이었다.
'우리 일이 늘 이렇지 뭐.'
나라고 이런 상황이 반갑지는 않다마는 굳이 학생한테까지 와서 부탁하는 임재후 쿡의 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애당초 서비스업이란 게 결국 리스크를 감당해야 하는 쪽이 정해진 일. 시작부터 지고 들어가는 게임이다. 그 패배에서 이득을 계산할 수 있어야 프로인 거고.
그런 면에서 마제스틱 퀸의 크루는 철저하게 프로다웠다. 뭐, 나도 어디까지나 잠깐 크루를 경험해본 게 전부인 고객이란 걸 생각하면 영 아니다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제안을 단박에 걷어차기엔 나 또한 임재후 쿡의 심정에 공감되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지금 난 고작 학생이고, 뭣보다 고객이다. 어? 고객한테 갑자기 우리 알바 좀 도와주세요! 이러면 언제든 나가서 도와줘야 돼?
비행기에서 탑승객이 원인불명의 사유로 쓰러졌을 때 의사를 찾아도 의사는 거기 대답할 의무가…… 아, 있구나. 히포크라테스 선서. 아니, 그건 의사고 나는 요리사잖아. 음.
거기다가 이거 갖고 선생님한테 허가 받으려면 또 장난 아니게 귀찮을 거고. 응?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했지?
머릿속 원탁에서 기나긴 내부회의를 거친 결과, 드디어 결론이 나왔다.
그래, 어차피 정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지. 내가 여기 뭐 일하러 왔어? 평소엔 엄두도 못 낼 부르주아 기분 좀 내면서 놀다가 겸사겸사 공부 좀 한 거지! 그러니까─
"이번에 도와주면 패밀리 자유이용권을 보답으로 줄게!"
"아쉽지만 죄…… 예?"
"이 배에 있는 시설은 뭐든 무료야! 당연히 유료시설은 물론이고 스카이라운지까지 전부!"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아, 일당이 이렇게 세면 그냥은 못 지나가지. 여름방학 때는 배라도 타러 와볼까?
***
박예휘 선생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건조했다.
"뭐? 선상파티 지원? 그래…… 네가 좋다면야. 알아서 해라."
그걸로 끝? 아니, 업체에서 학생 한 사람을 콕 집어서 자기 일하는 곳으로 데려가 쓰겠다는데 반응이 고작 그것뿐이면 이걸 굳이 말하러 온 나도 조금 처지가 곤란해지는데.
하지만 선생님의 반응은 변함없었다.
"오션즈 브리타니아는 마제스틱 퀸 호 만큼은 아니어도 초호화 유람선을 몇 개나 소유한 초대형 여행사다. 요컨대 대기업이지. 그런 곳에서 우리 학생을 하루만 스카웃하겠다는데 선생으로서 무슨 불만이 있을까."
"어……."
"혹시 강제로 착취당하는 거니? 열정 페이야?"
"아뇨. 이용권을 받긴 했는데요."
"그렇다면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냐?"
"……그렇죠."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다마는'이라며 의중을 떠보는 시선을 보내는 선생님에게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기도 했고, 허락은 해주겠지만 정하는 건 네 몫이라는 듯 바라보는 선생님의 시간을 난 더 이상 빼앗을 수 없었다.
이해득실을 명확하게 따진 결과는 이러하다.
이 가족용 자유이용권은 딱 하루밖에 못 쓰는 물건이긴 해도 유료시설이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티켓. 패밀리 티켓은 그 자체로도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물건이다.
그에 비해 내 근무를 요청하는 시간은 해봐야 네다섯 시간 정도. 시급만 따져도 엄청난 금액의 보상이다. 그렇게까지 숙이고 나오는데 나도 못하겠다고 뻗댈 건 없지. 저들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란 건 나도 잘 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이렇게 조리복을 차려 입은 것이다.
"진짜 고마워. 거절하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거든."
"……저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으셨던 거예요?"
"아니? 있었지 그야."
"뭔데요?"
"보상을 늘리는 거?"
임재후 쿡이 앞치마를 동여매며 말했다. 끈을 쥔 손에 질끈 힘이 들어가는 걸 보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아서 묘하게 무섭다.
"농담이야. 내 재량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그 정도가 한계라. 사정사정하는 것 말곤 딱히 방법도 없었겠지."
고작이라고 말하기에는 꽤나 수위가 높은 재량이라는 점에서 다시금 임재후 쿡이 주방에서도 꽤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란 게 실감난다.
뒤이은 웃음으로 묘하게 진지한 분위기를 흩어놓은 그가 말을 이었다.
"일단 일 시작 전에 설명부터 해줄게."
선상파티는 슬슬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저녁 7시 무렵부터 시작해서 저녁 12시가량에 끝난다.
"마제스틱 퀸 최상층 스카이라운지는 경관도 경관이지만 가장 유명한 명물이 있는데, 알아?"
모른다 그런 거. 애당초 이런 곳하고 그리 연관 있는 삶을 산 것도 아니고. 내가 고개를 젓자 임재후 쿡이 플로어 천장을 가리켰다.
"저거야, 저거."
"예?"
그가 가리킨 투명한 천장은 여기저기 정체 모를 유압 실린더처럼 생긴 게 잔뜩 달려 있었다. 뭐야 저거. 설마 천장이 열리기라도 하나?
"열리거든, 저게."
…… 진짜. 부르주아 생각은 따라가질 못하겠다.
"하늘이 맑개 갠 날엔 밤하늘이 예쁘거든."
"그냥 닫혀 있어도 투명해서 괜찮은 거 아니에요?"
"뚫려 있으면 더 예쁘잖아."
"아, 예. 그렇겠죠."
이 배는 맑은 하늘 아래의 선상파티를 위해 일부러 항해를 할 때도 선상파티 날만큼은 최대한 하늘이 맑게 갠 지역을 경유하도록 항해한다고 한다. 이번에 악천후에 휘말린 것도 악천후 직후에 하늘이 맑게 갤 걸 예상해서라고 하는데, 이게 진실이라면 웃지도 못할 이야기다.
'……아니, 근데 효과가 있긴 했네.'
실제로 적란운이 거쳐간 뒤의 하늘은 정말 구름 한 점 찾아보기 힘들 만큼 깨끗했다. 이런 하늘 아래서 보는 별천지는 참으로 굉장할 테지. 거기에 굳이 목숨을 걸 필요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선상파티는 종류가 두 종류거든. 하나는 캠핑 분위기로 아웃도어 느낌이 나는 파티. 하나는 셀러브리티 파티 느낌으로 화려하게 하는 파티. 날씨가 좋으면 전자고, 춥거나 너무 더워서 개방을 못 하면 후자."
"그럼 이번에는 전자겠네요."
아웃도어 파티라고 말해도 크게 대단한 건 아니다. 배 위에서 캠프파이어를 할 건 아니지 않은가. 다만 커다란 재받이 위에 작은 모닥불 하나를 지피고, 그 주변에서 굳이 여기까지 꺼내 설치한 조리도구로 간단한 숯불꼬치나 철판구이 따위의 요리를 서비스한다는 게 선상파티의 요지였다.
"이게 단순히 굽고 서비스하는 것 정도면 괜찮았겠는데, 여기 찾아오는 게스트가 게스트다 보니 겨우 그 정도가 끝이 아니거든."
서비스업자로서 고객 대우에 차별을 둬선 안 되겠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평범한 고객을 상대로 했을 때의 이야기. 흔히 말하는 VIP가 상대라면 당연히 서비스의 품질엔 두 배, 세 배 이상의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니 라이브에서 뛸 크루도 아주 꼼꼼하게 따져 넣어야 한단 말이지."
"꼼꼼하게 따져 넣은 결과가 저예요?"
"아무렴. 실력 괜찮고, 똘똘하고, 바빠도 침착하지. 일할 때 태도는 봐서 알아. 지금까지 본 학생 중에선 네가 제일 나았거든."
"감사합니다만…… 그게 다는 아니죠?"
"그렇지. 그래, 간단히 검증이나 해볼까?"
검증?
잠깐 머리를 갸웃하는 내게 임재후 쿡이 미처 생각할 새도 없이 질문을 던졌다.
"What do you think is the basis of the service?"
"It's communication. Right?"
"知っているなら簡単な話でもしてみようか。 君,年は?"
"今年で二十になりました."
"C'est vrai, vraiment? tu as l'air jeune!"
"Merci beaucoup."
우리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멎었다. 과연, 이런 뜻인가.
"봐봐. 이게 되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 이력서에는 적혀 있어도 막상 말하라고 하면 제대로 못할 사람이 많을 걸?"
"외국어란 게 보통 그렇죠."
"그리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은 '보통'이면 안 되고 말이야. 축하해. 너도 참 보통 녀석은 아니란 게 방금 증명됐습니다. 그 타이밍에 거짓말까지 할 줄은 몰랐어."
"너무 어리면 얕보이잖아요."
"그렇지. 특히 우리 같은 동양인은 나이에 비해서 훨씬 어려 보이니까.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어. 너 정도면 조금 더 올려도 될 것 같긴 했지만."
"……그거, 칭찬인가요?"
"칭찬이지. 어른스럽다는 뜻이잖아."
과장되게 박수를 친 임재후 쿡이 여우처럼 웃었다. 거 참. 본인도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대단한 자리에 있단 걸 스스로도 안다는 걸까. 이 사람도 도통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검증 끝. 그럼 이제 진지하게 준비 시작해보자. 이번 선상파티는 빡세게 준비해야 되니까 각오 단단히 해야 될 거야."
"예? 왜요?"
"탑승명단에 말이야, 계시거든. VVIP 고객님이."
오, 그거 참.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어째 요즘은 가는 곳마다 장이 열리고 지랄인 건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