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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31화 (231/403)

231. Like DiCaprio.-8-

아직 새벽 찬바람이 채 빠지지 않은 아침. 평소보다 이르게 선교로 출근한 앤드류는 도착하기가 무섭게 타이를 풀어헤치며 폴 대신 일등항해사석을 차지한 존 윌슨에게 물었다.

"조니. 부재중 상황 보고."

"아이아이, 캡틴. 전일 UTC 12:00부터 평균 시속 8노트로 자동항법장치 지정 경로에 따라 서행 시작. UTC 16:00 야외 통로 폐쇄. 이후 UTC 19:00 경에 악천후 지역 진입. 정기 교신 제외 교신 없음. 이상입니다."

교대조가 작성한 항해일지 내용을 들은 앤드류가 잠시 의아한 눈빛을 향했다.

"UTC 19:00에 악천후 지역에 진입했다고?"

"예."

앤드류는 그 말에서 자신이 아는 정보와 다른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선박 위치 기준 시간으로는 새벽 세 시쯤에 악천후 지역에 진입했다는 것인데 분명 어제 퇴근 전에 토의한 내용대로라면 세 시가 아니라 다섯 시 정도는 돼야 진입했을 터였다.

그런데 두 시간이나 일찍?

"느낌이 안 좋은걸……."

앤드류가 선교의 두터운 창문 너머로 펼쳐진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예상한 시각보다 일찍 진입한 이유가 뭘까?

가능성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잠든 밤에 선교에서 멋대로 속도를 올렸을 경우.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긴급시를 제외한 경우 선장의 명령 없이 속도 제한을 변경하는 건 금지사항이다. 심하면 선상반란으로 체포 후 감금, 퇴사에 이어 소송까지 받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사람, 기계를 가리지 않고 보는 눈이 이토록 많은 선교에서 누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할까.

그렇다면 자연스레 정답은 그다음의 가능성이 된다.

"넓어진 건가……?"

악천후 예상 지역이 기상 예보보다 넓을 경우.

안 그래도 아까 전부터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느끼고 있던 앤드류다.

'공기가 무거워.'

남이 들으면 공기에 무슨 무게냐며 말도 안 된다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갑판닦이부터 시작하여 크루즈의 선장이 되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을 뱃사람으로 살아온 앤드류에게는 말이 되는 소리였다.

공기 중의 습도나 기타 요인으로 인한 무게감.

감각기관이 민감한 새 같은 동물이라면 모를까 사람이 눈치채기는 힘든 미묘한 변화였으나 앤드류는 그것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끼는 것이 가능했다.

경험이 기른 일종의 육감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조니, 기상 상황 모니터링."

"네."

화면 공유를 통해 선장석 모니터로 넘어온 자료를 눈으로 훑는다.

현재 평균 풍속은 대략 8m/s. 강풍이라고 할 것 까진 없지만, 이 정도 풍속이라면 제법 거센 바람이다.

기상청이 예보한 대로 아직은 그리 대단치 않은 악천후.

하지만 아직 모른다. 바다의 악천후라는 건 비가 온 다음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비가 내려 식은 공기와 수온의 변화로 인해 해류와 기류가 뒤섞이는 그때야말로 눈으로 시인할 수 있는 악천후가 시작된다.

'이번엔 또 얼마나 갈런지.'

바다 위의 기상변화는 육지와 비할 바가 못 된다. 기상에 영향을 주는 지구에서 가장 큰 수원, 바다가 있기에.

도시 하나 정도를 뒤덮을 먹구름은 육지에서도 종종 보이지만, 바다 한복판에선 작은 섬 하나는 가뿐히 덮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먹구름이 흔히 보이기도 한다.

그 범위를 시속 10노트 미만의 속도로 달려 빠져나가려면 한나절로도 부족하다.

마제스틱 퀸 쯤 되는 배라면 그다지 걱정할 것이야 없겠지만, 앤드류는 부디 이 악천후를 빨리 빠져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비스듬하게 설치된 선교의 채광창 위로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는 물방울을 바라보는 앤드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

"어, 비 떨어진다. 슬슬 오려나 본데?"

김철정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복도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까지 성난 황소가 들이받기 직전 콧김을 뿜으며 투레질을 하듯 천둥 번개를 뿜어대던 하늘이 비로소 물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마치 간이라도 보는 것처럼 한두 방울씩 창문을 톡톡 건드리던 빗방울은 이윽고 말 그대로 장대비가 되어 딱따구리 수십 마리가 동시에 나무를 쪼는 마냥 쉴 새 없이 창문을 두드린다.

"오우야. 무지하게 오네. 괜히 바깥 통로를 막은 건 아니구나."

"지금 나갔다가 미끄러져서 바다에 입수라도 하면 그날부로 이승탈출이지."

"수영 잘 하면 살 수 있지 않을까."

"너 혹시 뭐 고래나 돌고래 뭐 그런 거냐? 여기서 육지까지 거리가 천 키로는 될 거다. 익사보다 프로펠러에 갈려 죽는 게 먼저가 될 지도 모르고."

같은 포유류라고 머리까지 돌고래가 되어 버린 것인가? 아니, 이건 실례되는 발언이네, 돌고래한테.

녀석의 쉰소리에 적당히 대답하며 걷기도 잠시, 아침식사 전 집합 장소에 도착한 우리는 반 아이들이 줄선 곳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평균적으로 아침 준비가 빠른 남자아이들의 뒤를 이어 여자아이들도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중에는 양희연과 나현주 또한 있다.

"좋은 아침. 잘 잤나?"

"어. 너는?"

"내도 뭐 똑같다. 아니 근데 현주 쟈 완전 또라이 아이가?"

"왜?"

"저녁에 그 난리를 치고 밤에 헬스하러 간다 안 카나. 뭐 운동 못 해 뒤진 귀신이 붙었나."

평소 같았음 운동 열심히 한다는데 왜 그리 난리냐 물었겠지만 이번에는 좀…….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묘하게 부끄러운 기색이 엿보이는 나현주에게 건강하면 좋은 거 아니냐고 감탄 섞인 위로를 해주니 더더욱 그런 기색이 강해진다.

어제 일 탓에 생긴 근육통을 호소하는 목소리로 시끌벅적한 홀에서 간단하게 출석체크를 한 뒤, 우리는 식당을 향해 이동했다.

하지만 움직이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 경종이 좀처럼 끊이지 않고 울린다.

어제도 그렇게 난리였는데 과연 오늘이라고 멀쩡할까.

아니,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 모레, 저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내릴 때까지 과연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을까.

그 정답은 뷔페에 도착한 직후 단박에 알게 됐다.

"못 하겠네."

아, 역시.

온 배의 사람이 같은 때에 한 곳에 모이는 유일한 시간이기에 다른 때에도 사람이 많던 뷔페지만 오늘은 유난히 혼잡해 보인다.

아니,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혼잡한 거다. 그것도 엄청나게.

메뉴 진열대에는 벌써 접시를 몇 개씩이나 든 사람들이 꿀물을 찾은 벌떼마냥 몰려 있었고, 테이블 여기저기서 접시를 긁는 날카로운 소리와 수다소리가 어우러져 절로 귀가 아파지는 소음을 유발하고 있다.

어떤 곳에선 저마다 열 명은 나란히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테이블을 고작 서넛이서 전세라도 낸 것처럼 접시를 가득 올려두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만찬이라도 차린 건가 싶을 정도로 화려한 테이블 세팅이다.

"하아, 오늘은 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저 사람들 또 저러네."

입구에서 선뜻 발을 내밀지 못하고 있는 다른 반 아이들 입에서 새어 나온 불평이 내 귀에 닿았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근처를 지나가던 다른 고객들도 별반 다를 것 없는 반응이다.

거 참, 망할 놈의 비 때문에 바깥에 못 나가는 것도 짜증 나는데 여긴 더 가관이구만.

"야, 얘들아. 가자."

"뭐? 밥 안 먹고?"

"여기서 뭘 먹을 순 있겠어?"

"그라믄 아예 안 먹을 기가?"

"먹긴 해야지."

의아한 눈빛을 보내는 녀석들에게 나는 손을 들어 맞은편 식당가에 있는 레스토랑을 가리켰다.

"뭐? 뭔 소리고. 내 돈 읎다."

"나도 많이 안 챙겨왔어."

"나는 아빠가 카드를 주시긴 했는데……."

"됐으니까 가자. 아침은 내가 살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모처럼 크루즈까지 왔는데 한 번은 가봐야지. 돈이야 제법 쌓인 게 있으니 조금 쓴다고 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뭣보다 지금 돈 아껴서 저기서 억지로 밥 먹는 게 나에겐 더 기분 나쁜 일이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많았는지 몇몇 아이들도 발걸음을 돌려 이곳저곳에 흩어진 레스토랑으로 각각 이동하는 게 보였다.

'나 원…….'

이러다가 수학여행 다 말아먹게 생겼네.

저 사람들도 매번 저러면 지칠 테니 좀 나아지겠지, 지금은 그저 그렇게 믿고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그런 찬혁의 믿음이 무색하게도 점심때까지 그들의 행동거지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그나마 이번에는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접객부서 승무원이 돌아다니며 폭주하는 승객에게 다른 고객이 불편해하시니 드실 만큼만 음식을 담아 달라, 쓰레기는 바닥에 버리지 말고 한곳에 모아 달라, 음식을 싸서 가져가시지 말아 달라 간절히 당부했으나 그마저도 그리 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오히려 비싼 돈 내고 탄 배에서 왜 시키는 대로 해야 하냐는 반응이 더 컸고, 어떨 때는 욕까지 먹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죽을 맛인 건 다른 승객과 주방에서 일하는 크루들이었다.

음식의 소모량이 평소의 배가 넘어간 탓에 일은 그 이상으로 늘어났다. 식자재야 적어도 배에 탄 인원 전부가 한 달은 먹어도 괜찮을 만큼 적재되어 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를 겪고 있는 건 인적자원 쪽.

갑자기 업무가 늘어난 탓에 비번이던 인원에 교대조 인원까지 빼내어 잔업을 시키고, 거기에 더해 성심고 학생들까지 죽어라 일을 돕고 있음에도 주방은 그야말로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뷔페를 마다한 고객이 유료 레스토랑을 찾아가 자리가 만석이 되는 웃지 못할 모습마저 연출됐다.

작금의 사태에 앤드류는 그야말로 골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어제는 저녁 한 번 뿐이니 그나마 조용하던 고객들도 어제에 이어 아침, 점심 둘 다 상황이 변하질 않자 본격적으로 컴플레인을 넣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가 그것뿐이었다면 좋았으련만.

─콰앙!

"젠장, 이젠 하늘까지 지랄이군."

분명 그리 대단치 않을 것이라던 악천후는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일정 주기마다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빛줄기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흉악한 벼락을 내리꽂았고, 처음엔 장대비 수준으로 시작한 비는 어느새 저 대밀림大密林의 스콜이 부럽지 않은 물벼락이 되어 있었다.

벼락이 둘이라니,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라며 앤드류가 웃었다.

"존. 기상 상황 보고."

"현재 풍속 약 16m/s. 강우량은 시간당 50ml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그쯤 되면 훌륭한 태풍 전조구만. 아주 지랄이 풍년이야. 본국 기상청과 교신은 해봤나?"

"예. 적어도 3시간 이내에는 그칠 것 같다고 합니다."

"……."

'이건 그 정도로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은데.'

입 바깥으로 꺼내진 않았으나 다른 승무원의 표정도 앤드류와 비슷했다. 심하지 않은 악천후라고 3국 교차 검증까지 해서 확인했더니 뭐 하나 맞는 게 없을 줄이야.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지만 굳이 지금 좋은 뱃사공을 만드려 노력하지 않아도 될 텐데. 신도 무심하시지.

작게 한숨을 뱉은 앤드류에게 존이 물었다.

"저, 함장님. 제프리 총주방장이 보고 답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만……."

"하."

그래, 그것도 문제였지.

안 그래도 최선을 다해 해결책을 생각해둔 바가 있긴 하다. 이걸 제프리가 받아들일지 어떨지는 앤드류도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당장은 그 외에 방법이 없었으니까.

"제프리 총주방장에게 말하게. 현 시간부로 유료 서비스 레스토랑은 영업 종료 후 그대로 공간을 활용해서 뷔페 업무로 전환하라고. 잡무부에 연락 넣어서 제프리 쪽으로 사람 몇 명만 붙여주고. 자재 창고에 뷔페용 자재가 남는 게 있을 거야. 그건 제프리가 더 잘 알겠지."

"…… 정말 그대로 전할까요?"

"그래."

존은 살짝 망설이다가, 곧 내부 회선 수화기를 들곤 제프리의 사무실 코드를 입력했다. 답변을 기다린단 말이 헛말은 아니었는지 신호는 곧바로 이어졌다.

잠시 후, 존은 전달사항을 말한 뒤 곧바로 수화기에서 귀를 뗐다.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비하던 제프리의 고함은 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제프리는 제법 그럴듯하다며 긍정적인 음색으로 콧소리를 돌려주었다.

파격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도 별달리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제프리 총주방장이 알겠다고 합니다. 대신 레스토랑 한 구역은 정상영업으로 돌릴 수 있게 해달라고 하십니다만……."

"그러라고 해."

"예."

생각보다 쉽게 나온 합의에 앤드류는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에 서로 힘든 일은 피해가자는 의지를 보이는 제프리의 배려가 고마울 뿐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 합의가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는 그들 중 누구도 모른다.

거센 강풍에 선교에 내걸린 국기가 깃대 채로 찢어질 듯 펄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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