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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30화 (230/403)

230. Like DiCaprio.-7-

그 지독한 광경에 한동안 넋을 놓은 채 눈이 빠져라 멍하니 보던 앤드류는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참상을 뒤로한 채 누가 쫓아오는 것 마냥 빠른 걸음으로 선교까지 단박에 돌아왔다.

"다녀오셨습니…… 선장님?"

진땀에 젖어 거칠게 문을 열고 선교로 들어선 앤드류를 본 폴이 책상 위로 구부정히 턱을 괴던 것을 멈추고 등을 바로 세워 그를 바라봤다.

아무리 앤드류가 항해 시에는 풀어진 모습을 자주 보인다고는 하나 적어도 선교 바깥에 있을 때까지 단정함을 잃는 사람은 아니다.

헌데 지금 들어온 그의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그런 단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장석에 앉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이 마치 B급 호러영화의 살인귀에게 쫓기기라도 한 것 같은 몰골이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

조심스레 묻는 폴의 질문에도 앤드류는 묵묵부답.

저렇게 소란스럽게 들어와선 거의 몇 분을 침묵으로 일관하는 선장의 태도에 걱정과 답답함이 동시에 찾아온 폴이었으나 정작 정말로 답답한 것은 다름 아닌 앤드류 쪽이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게 아니다. 무어라 답할 말이 제대로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고객이 뷔페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다? 아서라. 괜히 경비대 일 시킬 거 있나.

배에서 좀비 아웃브레이크가 일어났다고 하면 믿을까?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러는 편이 차라리 좀 더 납득이 된다. 그도 아니라면 분명 저녁 시간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식당이 그렇게 개판이 된단 말인가.

저들의 무리가 몰리는 곳이 뷔페 음식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그는 진지하게 이 망망대해에서 움직이는 시체가 튀어나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었으리라.

'그렇게 되면 배가 피칠갑이 되겠군.'

그럼 배 이름을 블러디 메리로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쉰소리를 내뱉은 앤드류는 시트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곤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것도 아닐세.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지?"

"현재 UTC 기준 11시 48분. 경도 위치 기준은 +08시입니다."

배의 위치를 기준으로 잡는다면 대략 19시에 20시로 바뀌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벌써 그만큼이나…….'

배에서 통용되는 시간은 보통 가장 기준점이 확실한 그리니치 천문대의 것에 맞추어 제어되고 있으나, 현장의 아침밤낮에 큰 영향을 받는 배의 특성상 그 지역의 시간 여건에 따라 업무를 진행하게 된다.

식사 시간도 그와 같다. 물론 아침과 밤이 뒤바뀐 고객을 위한 야간조가 운영이 되긴 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렇다면 저들은 그가 뷔페에서 이 선교로 돌아온 시간을 빼고서 대략 한 시간 반 만에 그만한 참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리를 하고 보니 더더욱 머리가 아찔해졌으나, 핑 도는 현기증을 눈을 꾹 감았다 뜨는 것으로 해결한 앤드류는 폴에게 이어 지시했다.

"별거 아니니 걱정말고 업무에 복귀해. 해가 진다. 자동항법장치랑 GPS 연동 확인해서 위치 조회 철저히 하고 시계 확보가 양호해지는 시간까지 평균 시속 10노트 이하로 고정하고."

"아이아이, 캡틴."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이윽고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지시를 하달하는 앤드류의 모습에 폴이 생각을 거두려던 찰나, 잠시 말끝을 흐렸던 앤드류가 뒤이어 추가로 지시를 내렸다.

"…… 그리고, 30분쯤 이따 사람 하나만 호출하게."

"사람이요? 누구 말입니까?"

"제프리 총주방장. UTC 12:00에 선장과 팀장급 회의가 있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할까 말까 망설이던 지시를 내린 뒤, 앤드류는 선장모를 깊게 눌러쓰곤 챙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앞이 까맣게 물들자마자 귀신같이 떠오르는 아까 전의 기억은 제법 오랫동안 그를 괴롭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아, 그거? 말했잖나. 문제 좀 있을 거라고."

"그게 문제가 '좀' 있는 건가?"

"문제가 있을 걸 이미 알고 있었고, 거기에 대비를 충분히 했는데, 그것보다 살짝 더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건 조금 문제가 생긴 거지."

"……."

앤드류는 눈앞에 앉은 이 옹골찬 남자의 얼굴과 발언에 잠시 정신이 멍해지는 걸 느꼈다. 자긴 그걸 보고 온 세상이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는데, 이놈은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나도 한때 그랬던 적이 있지. 뭐, 어차피 곧 익숙해져."

"익숙해져? 그게?"

"나라고 이 배 주방에서만 일한 게 아니지 않나. 이런 상황도 몇 번 있었지."

아무리 그래도. 앤드류의 입속에 그런 말이 맴돌았다.

전쟁지역에 사는 아이들이 "동네에 폭탄 떨어져서 집 한두 채 허물어지는 건 익숙해. 어제도 떨어졌고 그제도 그랬으니까."라고 말하는 걸 듣는 기분이었다.

"그 말 하려고 부른 건가?"

"정말 괜찮은 거 맞지?"

"…… 아마?"

"…… 거, 진짜 죽도록 신용 안 가는 대답이군."

게슴츠레 자신을 바라보는 앤드류의 눈빛에 제프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그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평범한 육지의 식당이라면 고객이 매너를 지키지 않을 때 나가달라고 요청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이곳은 바다 한복판에 뜬 배 위다. 고객이 매너를 지키지 않는다고 보트에 태워서 내보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걱정마. 그들도 사람이야. 아주 몰상식한 짓을 저지르진 않겠지."

"대체 몰상식의 기준이 어디까진지 궁금한걸."

"알려줄까?"

"됐어. 그래 그럼. 그거 말고 따로 문제는 없나?"

"문제 생길 거리가 없잖나."

"없기는. 그 학생들도 내가 보기엔 충분히 문젯거리야."

"아."

앤드류의 말에 깜빡 잊고 있던 주머니 속 동전을 찾아낸 것 같은 탄성을 자아낸 제프리가 답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오히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추가인력으로는 나름 쓸 만해."

"허."

추가 인력으로 쓸 만하다. 설령 신입이더라도 어느 정도 일에 차도를 보이지 못하면 가차 없이 비수를 꽂는 그답지 않은 단어선택이었다.

"할 이야기 끝났으면 이만 자러 가야겠어. 내일도 하루 종일 그 양반들 상대해야 한다고."

"잘 좀 해봐. 내가 보기엔 오늘 클레임이 안 들어온 것만도 기적이야."

뷔페는 기본적으로 모든 고객이 다함께 사용하는 곳이다. 그런 곳을 아까 저녁처럼 헤집어놨다간 일이 힘든 게 문제가 아니라 마제스틱 퀸 호의 서비스까지 의심받는다.

말 안 해도 안다며 너스레를 떤 제프리가 먼저 방을 나선 뒤에야 앤드류는 품속을 뒤져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곤 테이블에 놓인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스읍, 하아…… 젠장."

바다에 나서서 항해를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못 해먹을 짓이었다.

이 배의 승무원 중 누구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이 남자.

아이러니하게도 제약 없이 흡연이 가능한 개인실이 그가 이 배에서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이었다.

***

"야, 찬혁쓰. 나 솔직히 말해도 됨?"

"뭔데."

"진짜 진심으로, 우리 첫날에 걸려서 다행이다."

교대로 샤워를 하고 나오기가 무섭게 침대에 엎어져 꼼짝도 하지 못하는 김철정에게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거 참. 나도 그 말엔 굉장히 공감이다.

마제스틱 퀸 호의 뷔페는 아침, 점심보다 저녁 메뉴가 특히 화려했다.

아침, 점심이 모자라단 건 아니지만 둘을 놓고 비교했을 때 저녁 준비가 할 게 훨씬 다양하고 복잡했다. 아, 그리고 많았다. 졸라게.

"컨텐츠 늘었다고 좋아서 겜 켜니까 숙제가 백 개씩 쌓여 있는 느낌이야."

"뭔 소린지."

"그래. 이해 못 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보다 슬슬 그 대가리를 좀 베개에서 뗀 다음 말을 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는데. 웅얼거려서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이후로도 몇 마디를 더 중얼거리던 녀석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말소리가 적어지더니, 이내 코고는 소리만을 남기고 입을 다물었다.

하긴. 오늘은 힘든 하루였다. 평범하게 살았다면 어지간해선 연이 닿지 않았을 장소에서 또 하필 최악의 상황을 맞닥뜨리는 일은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도 그리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 나만 해도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름 배운 것도 있다.

당초에는 여기서 일한다고 뭔가 배울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느 의미 이번 현장학습은 개인의 실력이 아니라 크루와의 연계를 배우는 기회가 됐다.

이 정도로 오밀조밀한 연계를 앞으로 살며 얼마나 더 써먹을지 알 수 없지만, 그 외에도 요리에 대한 분석력 또한 이전과 달리 크게 개안한 느낌이 든다.

…… 뭐, 그렇다고 내가 선상 조리에 정이 들었다 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난 평범하게 육지에서 요리할래. 배에 타는 건 노는 걸로 족하다.

아니, 그 전에 내가 봤을 때 이번 수학여행 온 애들은 대부분 선상 조리를 혐오하게 되지 않을까? 당장 아까 우리 조 애들 얼굴만 봐도 말출 나가는 말년병장 표정을 짓고 있던데.

당장 내일부터 일할 2, 3조 애들은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할 것 같지 않다.

다른 반 애들이야 얼굴도 잘 모르는 애들이 많다지만 송지영이나 여준기는 각각 2, 3조에 속해 있으니, 과연 잘 할지 어떨지 걱정 되는 게 사실이다. 특히 여준기 걔는 안 그래도 덩치가 커서 주방에서 움직이는 것도 불편할 텐데.

"…… 알아서 하겠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어차피 이제 이 일은 내 손을 떠났으니 뭐.

걱정은 어제 그 참상을 직접 목격했을 다른 애들 몫으로 남겨두고 지금은 긍정적이게 생각하자.

나한텐 이제 일에 대한 정당한 보수로서 이 초호화 유람선을 내 마음대로 즐기는 일만 남았으니까!

내일 아침엔 일어나면 야외갑판 쪽에서 조깅 좀 뛰고, 수영장도 다녀오고, 선탠 같은 것도 하면서 기분을 좀 내볼까. 안 그래도 주방이랑 실내에만 있어서 비타민D 합성이 절실하기도 하고…….

피로에 절은 머리가 제멋대로 계획을 짜기 시작함과 동시에, 내 시야도 먼저 꿈나라로 여행을 떠난 룸메를 따라 천천히 암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귀에서 울리는 핸드폰 알람소리에 맞춰 침대에서 뻐근한 몸을 일으킨 난 묘하게 어둑한 시야에 잠시 당황했다.

'뭐지? 핸드폰 알람 시간을 잘못 맞췄나.'

그런데 알람은 평소에 맞춰둔 시간에서 건드린 적이 없으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무리 내가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곤 해도 이 초여름에 시야를 가리는 물체가 전무한 바다 위에서 이렇게 어두운 건 말이 안 된다.

막 잠에서 깨어나 뻐근한 목을 돌려 창문 바깥을 본 뒤에야, 나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 이건 또 뭐야."

창문 바깥의 하늘이 새까맣다.

밤이라서 그렇다거나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눈에 들어오는 하늘 전체를 메운 시꺼먼 먹구름.

가끔 대기가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구름 속에서 번쩍이는 정체 모를 섬광이 인간이 가진 어둠을 향한 섬뜩함을 부추기는 듯하다.

아니, 잠깐만. 이건 오바 아니냐.

이 사태에 이상을 느끼기 무섭게 옷가지만 대충 차려입고 객실을 나선 나는 가장 먼저 객실 구역에서 발코니로 나가는 통로를 확인하기 위해 발을 옮겼다.

그러나 그곳에 이미 통로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막혀 있었다. 통로를 통째로 막은 두터운 방화, 방수 셔터 앞에 떡하니 선 알림판에 적힌 문구가 내 시선을 잡아먹는다.

"오늘은 기상청의 예보로 악천후가 예상되오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부디 야외 출입을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통제에 따라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제스틱 퀸 호 알림……?"

영어와 한국어를 포함한 여러 나라의 언어로 적힌 그 경고문을 보고 잠시 머리가 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진짜, 미치겠네."

도통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 말뜻을 나는 새삼 느꼈다.

외딴 바다에 홀로 뜬 유람선, 그리고 심상치 않은 악천후.

거 씨, 어디서 많이 본 조합인데.

묘하게 식은땀을 나게 만드는 작금의 상황 속, 바깥에서 우르릉 쾅쾅 난리가 난 천둥소리가 꼭 나를 비웃는 것처럼 들리는 건 부디 내 착각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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