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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28화 (228/403)

228. Like DiCaprio.-5-

약 한 시간가량의 휴식을 가볍게 만끽한 뒤, 우리는 다시금 점심 준비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그만한 업무를 하고 고작 한 시간으로는 쉰 것 같은 기분도 안 드는 게 사실이었지만 별수가 없는 게 요리사라는 업종의 현실이다.

그나마 우리 학교 애들이야 대부분 가업 혹은 수업으로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있기에 별말이 안 나오는 거지, 평범한 애들 데려다 놓고 이렇게 굴렸으면 좋은 소리가 나왔을 리가 없겠지. 학생 본인한테든 학부모한테든.

뭐, 평범한 학생이 초호화 크루즈까지 와서 주방일 할 이유가 전혀 없긴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주방 업무에 제법 잔뼈가 굵은 성심고 학생들에게도 그 좁은 주방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인지 앓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으으, 죽을 것 같다……."

"좀 참아. 오늘 하루만 하면 남은 날은 전부 놀 수 있잖아."

"오늘 하루 뛰면 몸살 나서 남은 날 내내 누워 있을 것 같은데?"

"닌 남자가 돼가 엄살 좀 그만 부려라. 듣는 나가 다 힘들다."

"난 누구랑 달리 체력이 안 좋다고."

"그럼 철정이 너도 같이 운동하자. 운동을 해야 체력이 늘지."

"아니, 사양합니다."

"그럴 거면서 왜 체력을 걸고넘어져. 평소에도 시간 좀 생기면 게임부터 키는 놈이."

"나는 남고생 평균이고! 너네가 이상한 거라고! 너네 운동량을 내가 어떻게 따라가?!"

시작이 반이라는데 해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알아? 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저 말도 사실이긴 하다. 나야 그렇다 쳐도 나현주 얘 운동량이 평범한 수준은 아니지.

"그나저나 우리 점심에도 아침처럼 일하려나?"

"글쎄다."

"메뉴는 달라지는 거 아냐?"

"문디야. 그런 말이 아닌 거 모르나."

"농담이야, 농담."

저게 정말 농담이었는지 아닌지의 진위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업무 내용에 대해선 나도 호기심이 들었지만, 이내 가만히 접어 내려놨다.

"뭐, 곧 알게 되겠지."

어차피 당장 일하러 가는 길인데, 싫어도 알게 될 거 아닌가.

정보가 없는 상태에선 대책을 세워도 별수가 없으니까, 군대 마냥 식단표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일단 지금은 몸으로 부딪치는 방법뿐이다.

아침에 일할 때랑 비교해 크게 달라질 것도 없기야 하겠지만, 김철정 말마따나 메뉴가 달라지면 일하는 방식도 전혀 달라지는 건 사실이니까.

결론은 이거다. 요리사란 건 어찌 됐거나 몸으로 때우는 직업이라는 거.

가끔은 머리를 굴려야 하긴 해도 우리 같은 막내 라인은 끝에는 자신의 몸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까.

오늘도 자기 몸뚱이 하나만을 믿고 얌전히 주방으로 향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묘하게 서글펐다.

***

유람선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철저하게 계획된 일정을 따라 바다 위를 운행한다.

총 무게가 10만 톤에 이르는 배가 각 나라 사이의 바다를 효율적으로 오가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항로를 운행해야 하고, 거기에 더해 승선과 하선이 고객의 가장 중요한 스케줄이기 때문이다.

이 마제스틱 퀸 호의 선장인 캡틴 앤드류 파커는 그런 일정과 환경을 고려하여 항해의 모든 사항을 결정하는 배의 통수권자이자, 각 바다의 사정에 통달한 세일러 맨이다.

항해에 필요한 온갖 전자장비가 가득한 마제스틱 퀸 호의 선교에는 수많은 베테랑 승무원들이 교신과 측량 등을 연거푸 되풀이하며 올바른 항로 위를 나아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선교의 창을 통해 가만히 창문을 바라보던 앤드류가 한껏 늘어졌던 의복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항해사. 보고."

"현재 항속 10노트. 서행 중입니다. 목표 지점까지 앞으로 약 500클릭. 3시간 후에 연안에 도착합니다.

"좋아."

마제스틱 퀸 호가 한국과 중국을 왕복하는 항로에 오른 지 약 하루.

비행기였다면 채 2시간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으나 마제스틱 퀸 호 같은 초대형 크루즈의 기본 시속은 비행기보다 훨씬 느리기에 이제야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또한 전부 계획된 일정에 따라 알맞게 도착한 것이었지만.

배의 선장으로서 승객 앞에서는 언제나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도착하려면 남은 시간이 제법 길긴 했지만 말이다.

목깃을 보는 사람이 다 답답해 보일 정도로 옥죄며 앤드류가 살짝 찡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중국에서 승객 이동 예정 좀 알려주게."

"하선 78명에 승선 214명입니다. 객실 이용률이 80% 위로 올라갈 예정입니다."

"이번 항해는 제법 단체 탑승객이 많은걸."

"그러게 말입니다. 백 명 단위 승객이 연달아 타는 건 오랜만이네요."

앤드류의 혼잣말에 마제스틱 퀸 호의 부선장인 1등 항해서 폴 베이커가 맞장구쳤다.

"중국인들이야 머릿수로는 알아주니 그렇다 치지만, 한국에서 탄 하이스쿨 애들은 신기하네요. 여행 가는 길에 잠깐 타는 거면 모를까 아예 여기서 한 주 동안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여기서 식당 일을 배운다고 한 것도 그래. 본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런 꼬맹이들이 배에서 뭘 할 수 있다고."

성심고의 선상 수학여행과 그에 따른 현장학습은 마제스틱 퀸 호의 소유주인 오션즈 브리타니아 사와 성심고 사이의 제휴로 체결된 내용이었으나, 정작 선장인 앤드류는 그것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골이 장대한 장정도 쉽게 버티지 못하는 것이 뱃일이다.

그런데 학생이라니,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니고 백 명씩이나!

경험을 쌓게 하자는 의도는 좋지만 앤드류는 그것이 꼭 현장에서 뛰는 뱃사람을 무시하는 처사처럼 느껴졌다.

"우리 앞가림하기도 바쁜데 애들 엉덩이나 닦아주고 있다니……."

"그래도 제프리 총주방장 평가는 나쁘지 않던데요?"

"고작 아침 한 번 넘긴 것 갖고 평가하긴 너무 이르지 않나?"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앤드류의 냉랭한 눈초리에 폴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는 수 없지. 그 외에 각 부서에서 특별한 보고는?"

"기관실 쪽은 올 그린, 접객부서도 예정대로 진행하면 된다고 합니다. 아, 주방 측에서는 요청이 몇 가지 있습니다."

"말해봐."

"식료품 적재에 교대 인력을 더 당겨써야 할 것 같다는 요청입니다. 승무원 초과근무 보고계가 올라왔습니다."

"음? 왜?"

"사유가…… 아, 조만간 있을 선상 파티에서 사용할 식료품 및 추가 식료품 소요가 예상된다고 합니다."

"추가 소요?"

미심쩍은 단어선택에 앤드류의 눈꼬리가 살짝 위로 솟았다가, 이내 이유를 알겠다는 듯 가라앉았다.

"아하, 중국인 승객이 많아서 그러는 건가."

앤드류는 예로부터 중국에서 많은 승객이 탑승할 때에는 항상 식자재의 소모율이 엄청난 수치로 치솟았던 것을 떠올렸다.

"크루가 돼선 게스트를 보고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솔직히 그 나라는 식습관이 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은 폴은 이전 우연찮게 보았던 중국 쪽 단체승객의 식사 풍경을 떠올렸다.

접시 위에 탑을 쌓을 기세로 퍼담은 음식을 전부 먹지도 않고 게걸스레 먹고 테이블 위에 그대로 버리고 떠나거나, 봉투 따위에 뷔페 음식을 담아가더니 자신의 객실까지 가져가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놨다며 울상이던 룸서비스 부서의 모습이 생생하다.

아마 평범한 게스트 너덧 명이 먹을 수 있을 양의 음식을 혼자 소모하고, 일거리는 그 이상으로 남기는 게 그들이었다.

'그 나라 사람을 전부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워낙 선례가 많으니 마냥 부정할 수만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제프리 그놈. 고생깨나 하겠군."

마제스틱 퀸 호가 처녀 출항을 할 때부터 함께 근속한 10년지기 직장동료의 고생길이 훤히 보여 앤드류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 웃음에 '고생하는 건 아랫사람 아닐까요.'라고 딴지를 걸지 않은 것은 여태껏 폴이 기른 인내심 덕분이 아닐 수 없었다.

"좋아. 그럼 그건 알아서 처리해서 장계 올리라고 하고, 또 다른 사항은?"

"예. 본국 기상관측소에서 연락입니다. 복귀 항로 중간에 악천후 발생 징후가 포착됐다고 합니다."

"악천후? 얼마나?"

"다른 나라의 기상청 교차 관측 결과 규모가 크진 않다고 합니다만……."

"선상 파티 일정에는 문제없겠지?"

"예. 파티 예정일은 악천후 예상 발생 지역을 지난 다음 날입니다."

"알겠네. 항해일지에 기록하고 각 팀장급에 전달해서 주의하라고 전달하게."

"넵, 캡틴."

선교 앞쪽 방향만을 바라보던 앤드류의 고개가 반대편을 향해 돌아갔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하얀 포말. 발자취처럼 남은 항적이 저 멀리 수평선 저편까지 이어졌다.

한국과 중국 사이를 오가는 왕복 항로. 돌아가는 길에 미약하나마 악천후가 발생한다면 저 항적이 남은 바다 어딘가, 머지않은 곳이겠지.

"…… 흥."

하지만 앤드류는 그다지 깊게 걱정하진 않았다.

3국의 기상청으로부터 교차 관측한 정보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배, 마제스틱 퀸 호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 위의 움직이는 섬. 배수량만 9만 톤에 이르는 이 강철 아가씨는 미약한 악천후 정도에 어찌 될 만큼 만만하지 않다.

정절 하나는 철근보다 대 쪽 같은 아가씨다. 고작 헛바람 든 추파 따위엔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모든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는 것 또한 선장의 마음가짐이겠지.

충분히, 그러나 너무 과하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기로 다짐한 앤드류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지금은 나중 일을 걱정하기보다 코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각도 1도만 틀어져도 대형 참사가 나는 항구 정박.

지구 최대 사이즈의 파킹을 앞둔 승무원들이 오늘도 긴장 어린 얼굴로 조타륜을 돌린다.

***

뭐지? 무엇이지?

점심 뷔페 업무를 끝낸 나는. 아니, 우리는 요상하리만치 난이도가 올라간 업무에 서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새된 숨을 몰아쉬었다.

나 정도면 제법 상태가 좋은 편이다. 몇몇 아이들은 진땀을 흘리며 간신히 주방의 식수용 수도꼭지로 목을 축이는 모습이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이상한데.'

아무리 점심시간에 준비한 메뉴가 아침보다 복잡했다곤 해도, 이번에 우리가 치른 업무는 이상할 정도로 난이도가 달랐다.

아침에 한 게 보조바퀴를 단 자전거로 집 앞 산책로를 돈 느낌이라면, 이건 기어를 빡세게 조인 자전거로 오프로드를 질주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이 급격한 상황 변화에 모두가 당황스러워하고 있을 때, 우리의 사수인 임재후 쿡이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자, 점심 준비는 아침보다 좀 힘들었지? 아침에 보니까 다들 업무에 익숙해지는 속도가 엄청나길래 내가 조금 일을 조정해봤거든. 할만하지?"

찾았다. 범인.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원래 이 정도면 업무면 우리 크루 한 팀이 나서서 해야 할 분량이거든. 그걸 별 실수도 안 하고 가뿐하게 해내다니. 선배로서 아주 자랑스러워."

가뿐? 가뿐하게라고 한 건가?

눈이 있으면 제발 주변을 둘러보라고 하고 싶은데. 아니, 대체 교육을 어떻게 받았으면…….

"…… 아.'

생각해보니 우리 선배님이지. 하긴, 이 정도면 평소에 학교에서 우리 굴리는 거랑 크게 차이가 없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아이들의 원망스런 눈초리에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웃고 있던 임재후 쿡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말을 이었다.

"미안해. 근데 이렇게 억지로라도 빨리 일을 손에 붙여야 할 이유가 생겼거든."

"?"

학생이 배우는 거야 필요한 일이라지만, 사람을 이렇게 굴릴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호기심 어린 40쌍의 눈빛을 받으며 임재후 쿡이 곤란하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후에 단체 게스트가 승선한단 소식이야. 중국 쪽 여행사 게스트 200분 정도."

그 말이 내 귓구멍으로 들어와 고막을 흔들고, 공기의 진동이 뇌의 신경을 타고 말로 번안된 그 순간, 내 입에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시바, 조졌네."

뷔페에서 일할 때 가장 만나기 싫은 유형의 손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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