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Like DiCaprio.-3-
"뭔가 있을 것 같긴 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나도 나름 연식이 있는 요리사다.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형태의 주방을 경험했으며, 집 부엌만도 못한 수준의 주방부터 세계 최고 수준의 설비를 자랑하는 주방까지 가리지 않고 근무한 전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나라도 배 위에서 요리를 해본 적은 없다. 아니 뭐, 낚싯배에서 라면이나 매운탕 끓이는 것 정도야 아주 가끔 해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요깃거리를 만드는 수준이었지, 요리사로 일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런 와중에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선상 근무가 이런 초대형 크루즈였기에 내심 안도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 정도면 업계 최상타일 텐데 주방도 괜찮겠지?'
보통 주방의 질은 서비스하는 음식의 질에 비례해 올라간다. 설비가 없어도 요리야 만들 수 있지만, 장사라는 건 효율을 따질 수밖에 없으니 주방 설비에도 자연스럽게 투자를 하게 된다.
뭐, 고객의 눈에 보이는 부분에는 투자를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곳에는 투자를 안 하는 경영자도 제법 있으니 이것도 일반론은 아니지만.
그래도 끝끝내 성공하는 쪽은 변화와 성장에 발맞춰 내실을 꾸준히 다져온 업장이었다.
그렇기에 믿었던 것이다. 이 마제스틱 퀸 호를. 이 배의 주인인 오션즈 브리타니아라는 대형 여행사를.
하지만 그런 내 믿음은 지금 이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실제로 맞이한 마제스틱 퀸 호의 주방.
그곳을 처음 본 순간 느낀 감상은 이러했다.
'작아.'
아니. 작은 게 아니라 좁다가 더 어울릴지도.
키가 큰 사람이라면 곧바로 머리가 닿을 것 같은 낮은 천장. 사람 하나가 어깨를 펴고 걸으면 꽉 찰 것 같은 통로. 팬이나 국자, 주걱, 집게 따위의 도구가 벽을 빼곡하게 채운 그 모습은 꼭 내가 있는 공간이 주방이 아니라 어디 공작실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그 광경에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은 나를 포함한 40명의 학생 앞에서, 제프리 총주방장은 말을 이었다.
"이곳이 바로 마제스틱 퀸 호의 뷔페 주방입니다."
…… 과연, 이런 곳이란 말이지.
일행 사이를 무거운 침묵이 달린다.
오늘 하루는, 예상보다 훨씬 힘든 하루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게스트. 승객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없는 게 없을 것처럼 느껴지던 마제스틱 퀸 호였으나, 고객이 아닌 승무원의 시선으로 본 그들의 세계는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작았다.
제프리 총주방장이 말했다.
"이 배는 닫힌 세계입니다. 모든 게 풍족해 보이지만, 실상을 파고들면 그런 광경을 연출하기 위해 굉장히 많은 제약이 뒤따르죠."
닫힌 세계. 정말로 그 말이 딱 들어맞는 설명이 아닐 수 없었다.
무게가 9만 톤에 이르는 이 거대한 선박은 결국 커다란 배에 불과하다.
아무리 그 크기가 커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있다.
배의 자원은 며칠에 한 번 정박할 때마다 싣는 화물 뿐. 수원 정도야 배에 든 정수 시설로 해결할 수 있다손 쳐도 그 또한 배의 공간과 전력, 약품 따위의 리소스를 사용한다.
항해 중에는 줄어들기만 하는 자원. 한정된 리소스란 그 자체로 제약.
거기에 더해 이 배가 평범한 화물선이라면 모를까, 유람선인 마제스틱 퀸 호에게는 1박에 수백 달러의 요금을 지불하고 탑승하는 천 명의 게스트를 만족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물론 배의 크기가 크기인 만큼 자원의 총량은 개인의 잣대로 측정하기가 힘들 만큼 어마무시 하지만, 그와 반대로 하루하루 줄어드는 자원의 소모량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이 좁은 주방이야말로 설계자가 머리를 쥐어짜 내 만들어낸 대안 그 자체.
설거지를 제외한 모든 조리과정에 들어가는 수원은 청결한 식수탱크에 저장된 것만을 사용.
주방 내 산소 유지와 안전을 위해 열을 발산하는 모든 장비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오로지 전기로 돌아가는 것뿐. 배의 엔진에서 생산하는 전력의 여분을 낭비 없이 응용한다.
고객이 상주하는 구역의 크기를 최대한 확보하고, 승무원이 상주하는 구역은 과감히 축소. 덕분에 좁아진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다른 주방이었다면 그냥 벽이었을 공간까지 전부 조리도구 거치대로 쓰인다.
덕분에 벽 이곳저곳은 죄다 모난 철덩어리로 가득하여 자칫 잘못하면 다치기 쉬운 구조가 되지만. 이건 뭐, 어쩔 수 없이 승무원 개인이 알아서 주의해야지.
고객의 만족도를 위해 승무원의 편의를 거의 거세하다시피 만들어진 공간.
'이야, 이거…….'
마르크스 선생님이 보시면 아주 통탄을 금치 못할 근무환경인데.
프롤레타리아의 헌신 위에 만들어진 부르주아의 제국이지 않은가! 아아, 그립습니다. 마르크스 선생님. 기립하시오. 당신도!
…… 라고 해도, 뭐. 판이 자본주의인데 어쩌겠어.
이전에 경험한 주방은 모두 잊어야 한다는 제프리 총주방장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이 선상 주방은 내가 여태껏 경험한 어떤 주방과도 다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앞서 제프리 총주방장이 말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동작에 제약이 걸리는 건 물론이오, 그 외에도 발밑에서 종종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이나 시스템 에어컨과 환풍기를 아무리 돌려도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주방의 뜨거운 공기 같은 것이 꼭 야밤에 귓가를 날아다니는 모기 날갯짓 소리마냥 사람을 거슬리게 한다.
"빡세겠는데."
솔직히 상당히 진심이다.
주방일이라는 건 상상 이상으로 고된 육체노동이다. 흔히 말하는 3D 업종에 당당히 들어갈 정도니까.
그런데 그걸 당장 두 팔도 쉽게 펼치지 못하는 공간에서 하루 종일 하라고?
"이야, 용케 파업을 안 하네."
"페이가 쎄거든."
아, 그럼 인정이지.
내 혼잣말에 오늘 하루 동안 우리 조의 사수를 맡은 임재후 쿡이 웃으며 답했다. 주방에서도 유일한 한국계 쿡이었으며, 거기에 더해 놀라운 점이 또 하나.
"그나저나 설마 후배들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성심고 졸업생 출신. 요컨대 우리들의 선배 되시겠다.
"그리 대단한 선배도 아니지만. 필기 성적은 좀 됐어도 실기 성적은 중하위였거든."
반가워하는 우리 일행을 보며 그가 멋쩍게 웃었다.
해군 전역 후 '선상 레스토랑'이라는 단어에 로망을 느껴 여러 크루즈를 전전했다는 그는 태어난 지 이제 막 10년차에 접어든 마제스틱 퀸 호에서도 제법 긴 연차를 자랑하는 쿡이었다.
"배 위에서 요리한 지는 10년 좀 넘었을 거야. 여기 마제스틱 퀸 호에서는 5년쯤 됐고"
"대단해요!"
"멋지다……."
"별거 아니래도. 그냥 오기로 버틴 거지."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곤 제프리 총주방장은 그에게 좋은 인상을 가진 듯싶었다. 안 그러면 선상 요리라곤 한 차례도 경험한 적 없는 우리 40명에게 사수로 붙여줄 리가 없지 않은가.
"대신, 그만큼 선상조리에 대해서는 가르쳐줄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너희 중 몇 명이나 이런 환경에서 일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일하는 건 분명 좋은 경험이 되리라 믿는다."
그는 우리에게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가르쳐주었다.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많은 승무원 용 조리모는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쿠션이 들어가 있기에 올바른 방향으로 써야 한다는 것.
배는 워낙 큰 탓에 파도 따위에 밀려 흔들리는 일은 거의 없지만, 방향전환이나 높은 파도, 혹은 엔진의 구동 여부에 따라 가끔 흔들릴 수도 있기에 이동할 때는 최대한 빈손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
"가끔 물이 많은 음식을 조리할 때는 냄비가 흔들릴 수도 있으니까 불 위에 올라간 건 항상 손잡이를 잡고 있어야 해."
그 외에도 기름기를 약품으로 쉽게 지우기 힘든 밀폐 형식의 주방 구조 상 바닥이 미끄럽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 등의 간단한 주의사항을 가르쳐주었다.
"백문이불여일견, 백견이불여일행! 직접 해보면 어떻게 하는 건지 감이 잡힐 거야. 아침에는 익숙해지는 시간을 갖는 겸 간단한 업무만 할 테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아이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호탕하게 웃는 임재후 쿡이었으나, 아이들은 여전히 긴장 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뭐 별수 있나.
우리가 긴장을 하든 말든 시간은 간다. 밤늦게까지 논 승객들이 주린 배를 붙잡고 식당으로 몰려올 시간. 지금부터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승객의 식사 시간에 맞출 수 없다.
"자, 시작하자! 다들 위치로!"
오늘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려 퍼졌다.
***
임재후는 마제스틱 퀸 호에 승선한 지 햇수로만 5년을 넘긴 요리사다.
사실 그의 원래 근무처는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마제스틱 퀸 호에서도 따로 요금을 지불하고 이용해야 하는 레스토랑이기에 뷔페 주방과는 크게 연관이 없는 입장이었으나, 그의 후배인 성심고 학생들이 우연찮게도 이 배에서 수학여행 겸 현장학습을 한다는 말에 사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 뷔페 주방과 아주 무관한 사람은 아니다. 그도 처음 이 배에 승선할 적엔 뷔페 주방에서 먼저 일하다가 제프리 총주방장의 추천으로 레스토랑으로 근무처를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사실 뷔페 주방의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뷔페 주방은 엄밀히 말해 2차 조리장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조리는 대부분 지상에서 이루어지며, 이곳에서 조리하는 것은 지상에서 조리 후 냉동포장 되어 들어온 완제품을 가공해서 준비할 뿐이니까.
그렇다고 이곳 일이 편하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천 명 분의 식사를 뷔페식으로 만들어야 하는 곳이고, 샐러드나 어류, 난류 등의 신선식품이나 현장에서 만들어 사용하는 소스 같은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만들어야 한다.
조식이야 비교적 간단하다지만 어디까지나 '비교적'.
안 그래도 배라는 환경 자체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아이들이기에, 임재후는 그들에게 특별한 기대를 품진 않았다. 아무리 귀여운 후배들이라곤 해도 말이다.
'고생 좀 하겠지.'
오늘의 조식 뷔페 메뉴는 평범한 잉글리시 블랙퍼스트에 이런저런 샐러드와 몇 가지 육류, 어류 요리가 더해진 간단한 메뉴다.
하지만 선상에서는 제법 까다로운 메뉴에 속한다.
전날 밤부터 냉장 해동한 식빵 생지와 크로와상 생지 따위를 오븐에 구운 뒤 분류하여 식빵은 토스트.
계란은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프라이. 써니 사이드 업과 턴 오버, 스크램블로 나누어 조리한다.
베이컨은 완제품을 사용하기에 그나마 편한 측에 속하지만 프로슈토 같은 건식 햄은 새로 깔 때마다 겉의 딱딱한 부분을 제거하는 게 거의 중노동이나 다름없다.
그 외에도 샐러드를 만들 때도 물을 적게 사용해야 하니 훨씬 일이 까다롭다.
이런저런 불편함이 있기에 여타 주방보다 일의 난이도가 훌쩍 뛰는 선상 주방.
설마 사고라도 나진 않겠지 싶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언제든 돕기 위해 임재후는 뛰쳐나갈 채비를 단단히 갖췄다.
그런데…….
'…… 어라?'
뭔가 이상하다.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있던 임재후는 저도 모르게 그런 느낌을 받았다.
주방에서 문제가 일어나서가 아니다.
반대다.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라라?"
일을 시작한 지 대략 30분. 대략적인 업무 지시는 상부와 연결된 무전기를 착용한 임재후가 내리고 있지만, 상세한 업무에 대해선 직접 해보라는 의미로 거의 그의 후배들에게 일임한 상태다.
보통 처음 일하는 주방에서 신입끼리만 뭉치면 십중팔구는 사고가 난다.
뭔가를 깜빡 잊고 안 했다거나, 완성품을 검사하는 쪽에서 컴플레인이 들어오는 식으로.
그런데 요상하게도 하나 둘 뷔페로 음식을 올려 보내는 지금까지, 그 어떤 사고도 발생하지 않는다.
'아니, 이건 사고가 안 나는 수준이 아니라…….'
스무스하다. 마치 이 배에서 몇 달은 일해 본 사람들이 일하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어색한 주방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새된 신음이 들려오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 흘러가는 모양새 자체가 기시감이 들 정도로 매끄럽다.
임재후는 얼마 가지 않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다수의 인원이 업무를 할 때에는 반드시 머리가 있어야 한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만, 사공이 아예 없으면 배는 움직일 수조차 없으니까.
누군가는 노를 젓고, 누군가가 북을 울린다면, 누군가는 그 뒤에서 방향을 보고 키를 꺾어야 한다.
그게 바로 뱃사람의 규율이고, 주방의 규율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당장 사람 다섯만 모아도 누가 머리를 맡을지 한참을 다투기 바쁜데 40명을 이끄는 건 오죽할까.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주방에 모인 40인의 가운데, 키잡이 역할로 벌떡 일어선 사람이 있었다.
"오븐 팀 1차로 나오는 빵 간수 잘 하고! 샐러드 쪽은 한 번에 다듬은 다음 모아서 씻어! 계란 쪽 맡은 애들은 슬슬 철판 예열 시작해! 튀김기 맡은 애들은 기름 온도 유지하고!"
류찬혁.
그가 바로 선원 40인의 키잡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