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Like DiCaprio.-1-
내 봉사 활동이 끝난 지 벌써 두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요즘 학교는 꼭 끓어오르기 직전의 냄비에 뚜껑을 덮어둔 것 마냥 조급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뭐, 이유는 알만하지만.
바로 얼마 전 있었던 중간고사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여기에 더해 과제 마감일이 거의 코앞에 닥쳤으니, 이럴 때 평범하게 지내는 놈이면 오히려 그쪽이 이상한 사람일 터다.
"뭐야, 언제부터 그렇게 자아성찰을 잘 하게 됐냐?"
"응? 뭔 소리야 또."
"방금 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이럴 때 평범하게 지내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근데 정작 넌 침대에 누워서 빈둥거리고 있네. 네 말대로면 네가 이상한 사람 아니냐."
"난 이게 평범한 게 아니잖아."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아무 할 일도 없이 지내는 게 거의 몇 달만인 것 같은데. 평범하단 단어를 깊게 따지면 나도 평범한 상황은 아니니 문제없지 않을까?
"궤변이 아주 그냥 탈지구급이야. 으아, 부럽다. 나도 눕고 싶어."
웬일로 번쩍이는 게임 화면 대신 문서 작업창만 가득 띄워둔 모니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김철정이 뾰로통한 얼굴로 등받이에 드러눕듯 몸을 기댄다.
"그러게 중간고사 끝냈으면 과제부터 하라고 했잖아. 마감이 당장 내일 모렌데 뭐 하는 짓이야 이게."
"아아니, 어떻게 과제를 마감 일주일 전에 끝낼 수 있는 것이지? 저건 사람이 아니다. 과제의 망령이지."
"그럼 넌 사이버 망령이냐."
"난 정상인인 거지. 시험 끝난 날에 게임 한 판 안 돌리고 공부하는 남고생이 있다? 뿌슝빠슝!"
"…… 쟤도 정상은 아니야."
"내가 보기엔 네가 더 비정상이야."
서로 시원하게 디스 난타전을 날린 우리였으나, 그에 소모한 몇 분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양측 다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했다.
아니, 내 경우엔 소득만 없는 걸로 끝났지만, 저 녀석은 지금 실시간으로 카운트다운이 깎이고 있으니 아예 손해다. 딜교 압승. 딜량 1등. 달달하다, 달달해!
"넌 게임도 안 하는 놈이 그런 소리 하면 이상하단 생각 안 드냐?"
무슨 섭한 소릴. 나도 자주 안 할 뿐이지 평범한 한국 남자답게 게임은 상당히 좋아한다. 다만…….
"요즘 게임은 좀……."
"뭐?"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생각해봐라. 내가 회귀 전에 가끔 즐기던 게임은 이 시대의 게임이 비비지도 못한다. 해상도만 16K에 달하는 VR고글을 쓰고 게임용 트레드밀 위를 실제로 뛰어다니며 총과 검을 휘두르고 다녔는데 마우스 딸각딸각하는 게임에 감흥이 생길 리가.
물론 과거의 명작이 재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지금 와서 흥미를 갖긴 좀 그렇다는 거지. 예를 들어 파이널 퀘스트7이 그렇게 명작이라지만 지금 와서 굳이 찾아서 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부분을 김철정이 이해해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나도 나름 사정이 있다 이거다.
"그런 이야기 할 시간에 과제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냐?"
"으으음…… 아, 안 되겠다! 잠깐 쉬자!"
"아이고."
결국 그렇게 나오는 거냐며 혀를 차주니, 녀석은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나섰다.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주말도 남았고! 남은 과제 정도는 주말에 몰아서 정리하면 별거 아냐!"
목청껏 웃는 녀석을 보니 측은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래 누구나 계획은 갖고 있는 법이지. 과제에서 막히는 부분이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야.
"기왕 말 나온 거 같이 게임이나 돌릴래? 마침 코옵 되는 게임 시리얼 키 남는 거 있는데 하쉴?"
"…… 그래, 하자, 해."
녀석이 후회하리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겠으나, 그렇다면 적어도 후회 없는 후회를 할 수 있게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데없이 시작한 게임 시간은 우습게도 대략 9시간에 걸쳐 이어졌고. 아침 해와 함께 올라오기 시작한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며 나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아, 진짜 재밌는 게임은 아무리 후달려 보여도 재밌구나.
그리고 또 하나.
아, 김철정 이놈 과제 조졌다.
***
켠김에 왕까지 사건은 김철정에게는 주말 철야라는 처벌과 함께 할 일을 놔두고 딴짓하지 말라는 교훈을 안겨주었지만, 나에게는 제법 괜찮은 재충전의 시간을 선사했다.
안 그래도 요즘 좀 무거운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난 탓에 기분이 좀 꿀꿀하던 차였는데 잘된 일이다.
거기에 더해 주변에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BGM처럼 깔린 이 소리가 특히 상쾌하다.
"으으…… 제발, 제발 점수 잘 나오게……."
"내일 모레가 마감인데 이제야 반 조금 넘게 썼어……."
"요리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우욱, 어제 먹은 커피가 올라온다."
수면부족과 과제걱정에 파묻힌 학생의 신음이란 어쩜 이리 감미로운지! 아주 천상의 울림이 따로 없다. 아주 그냥 박하스 그 자체야!
"니, 가끔 보면 되게 인격파탄자 같은 거 아나?"
"에이, 당연히 농담이지."
"아니, 농담하는 얼굴이 아니었어."
양희연과 나현주가 질린 표정을 짓는다. 그나마 이 녀석들은 알아서 해결하는 부류니까 딴지라도 거는 거지, 김철정 같은 경우를 보면 벌써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잠든 지 오래다. 하긴. 어제도 밤새 과제 하느라 바빴으니 별수 있나.
첨삭 정도는 도와주겠다는 것도 마다하던 걸 생각하면 책임감은 있는 녀석이다. 저울질을 못 해서 문제지.
"그나저나 과제 끝나면 이번 학기는 슬슬 풀리겠네."
"뭐, 그렇지 않겠나? 현장학습 이야기도 아직 없고."
"2학년 된 뒤로는 오히려 실습 시간이 줄어든 것 같아."
"지금은 재량에 맡기는 시기니까. 실습 덜 한다고 연습 손 놓고 있다간 2학기 때 코 박고 죽을걸."
애당초 1학기 때 선택할 수 있는 수업을 보면 의외로 실습수업이 커리큘럼에 포함된 수업이 많지 않았다. 회귀 전에는 2학년 때 전학을 갔던지라 수업 내용에 대해선 모르는 게 많았는데, 처음 봤을 때는 제법 놀랐었지.
필수 과목도 대부분 교과목이고, 실기 점수를 얻겠다고 해봤자 동아리 활동 아니면 심화 강의 말고는 마땅한 수업이 없었을 정도니, 확실히 1학년 때에 비하면 실기 수업의 빈도가 제법 줄었다.
'그렇다고 수업이 편해진 건 또 아니지만.'
아니, 이 경우에는 내가 과다하게 많은 수업을 듣고 있어서 그럴 뿐일지도. 양희연이나 나현주 같은 녀석들을 보면 1학년 때에 비해 확연히 안색이 좋다. 2학년이 되면서 적응력이 늘어난 덕도 있겠지만, 1학년 때보단 확실히 육체적으로는 편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게 이 학교의 방식이다.
초반에 바짝 조여 매서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놈들은 하루라도 빨리 다른 길을 찾을 수 있게끔 해주고, 조금 익숙해졌다 싶을 때 조인 매듭을 살짝 풀어 숨통을 열어준 뒤…….
"그다음엔 단숨에 채가지."
"뭐? 뭐라카노?"
"아니, 혼잣말이야."
아마 선생님들도 중간고사를 마무리 짓고 우리를 어떻게 굴릴지 이미 회의를 끝냈을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시킬지는 몰라도 시기는 대략 예상할 수 있다.
'대충 이번 주에 과제를 마감한다 치면…….'
다음 주에서 다다음 주 사이.
틀림없이 그때쯤 선생님이 폭탄 같은 소식을 하나 들고 나타나시겠지. 여태껏 그래왔듯이.
그리고 과제를 끝낸 아이들이 모처럼 찾아온 휴식기를 맞이하던 그때, 내 예상대로 선생님은 새로운 소식을 들고 우리를 맞이했다.
"수학여행 갑니다."
다만, 그 새로운 소식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예? 뭐라고요?
***
박예휘 선생님의 폭탄 발언이 터진 뒤로 한 달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중간고사도 끝, 과제도 끝. 휴식기의 물살을 타고 순식간에 풀린 학교의 분위기. 늦봄을 지나 초여름으로 막 들어가기 시작한 햇살이 유난히 따가운 오늘 나는…….
─끼룩! 끼룩!
"실화냐……."
바다에 왔다.
바람에 실려 비강을 가득 메우는 소금기 어린 물 냄새.
방향을 가리지 않고 들리는 갈매기의 울음소리.
작년 부산에 갔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다른 공기가 우리를 반기는 듯 수평선 건너 바람을 우리에게 불어온다.
엄청난 속도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여러 의미로 말이다.
수학여행 시기가 정해진 것도, 일정이 정해진 것도, 실행에 옮겨진 것도.
아니, 보통 수학여행 같은 건 적어도 몇 달 전에는 통지서가 나오는 거 아닌가? 무슨 번갯불에 콩 볶아먹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급박한 수학여행 같은 건 회귀 전, 후를 통틀어 처음이다.
그래, 후우. 이렇게 불평해봤자 어차피 이미 늦었다.
이미 난 바다. 정확히는 항구에 와버렸으니까. 나를 포함한 2학년 전체가 말이다.
"줄 똑바로 서고! 반에서 떨어지지 않게 잘 붙어라!"
"네에!"
저 앞에서 학생을 선도하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작게 한숨을 내뱉고 흐트러진 줄 뒤로 흐느적흐느적 걸음을 옮겨 따라붙는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냐고?
항구에 왔으면 당연히 그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배 타러 간다. 물론, 평범한 배는 아니지만.
***
마제스틱 퀸.
그것이 바로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녀, 라고 하면 사람 이름이 굉장히 전위적이구나 하는 느낌도 들 수 있겠지만,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과연 그녀에게 그만한 이름이 또 없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수용 게스트 약 1000명.
무게가 9만 톤에 달하는 괴물 같은 철괴.
내부에는 야외 수영장, 워터파크, 레스토랑, 게임장, 헬스장, 극장, 거기에 호텔이 부럽지 않은 객실까지.
이 모든 것을 갖춘 그녀는 그야말로 바다 위를 떠다니는 도시다.
그렇다. 마제스틱 퀸. 영국의 주문으로 한국의 조선소에서 태어난 그녀의 정체는 바로 배였다.
물론, 앞서 말했다시피 결코 평범한 배가 아니다.
1박 가격이 약 100달러를 넘어가는 최고급 크루즈. 해양여행사 오션즈 브리타니아의 간판스타. 이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엄청난 스펙의 몬스터 머신.
지금 우리가 디딘 발밑이, 머리 위로 펼쳐진 샹들리에 조명이 가득한 끝없이 넓은 천장이, 양옆으로 뻗어 나간 크리스탈 장식이 가득한 매끈한 내벽이.
이 모든 것이 바로 마제스틱 퀸, 그녀 본선本船인 것이다!
"…… 라고, 말은 했지만 말이야."
물론 이건 내가 따로 알아낸 건 아니다. 여기 탑승한 뒤에 선장이라는 분이 직접 나와서 설명해주신 거지.
마제스틱 퀸 호는 바다 위를 떠다니는 크루즈. 유람선이다.
우리가 탔을 때처럼 항구에 정박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음 손님을 태우고, 탑승한 손님이 하선하기 위한 정박일 뿐. 이 배의 목적은 고객의 운송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 성심고 2학년 일행은 이 배를 탔으며, 성심고의 교사진은 어째서 이 배에 우리를 태운 걸까.
그래. 거기에 바로 요점이 있다.
우리들의 4박5일 수학여행.
이 배는 우리를 여행지로 보내주기 위한 배가 아니다.
이 배 자체가, 우리의 여행지다.
4박5일의 '해상' 수학여행.
그것이야말로 성심고가 올해 준비한 2학년 수학여행의 본질이었으며, 그 속에는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함정이 숨어 있었다.
"배에서 조리…… 란 말이지."
다시 한번 말한다.
마제스틱 퀸 호의 수용 게스트는 대략 천 명. 탑승 승무원 또한 대략 천 명.
승무원을 제외한 게스트 천 명 분의 식사.
그게 바로 우리의 현장학습 과제이자, 수학여행의 난제였다.
"진짜, 참."
어이가 없어갖고.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학교 교사 양반들은 절대 제정신이 아니다. 내 속에 그런 신념이 싹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