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22화 (222/403)

222. 발런티어 사가.-5-

다음 날. 나는 어린 친구와 나눈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교장실을 찾았다.

교장 선생님과 담판을 짓기 위해서다.

"재미있네요. 진행해요."

"예?"

경영이 형……? 아니, 이게 아니라.

"왜 그러나요? 허락이 필요한 거 아니었습니까?"

"아뇨. 그게……."

담판, 이라고 말은 했지만 그 내용을 말하자면 쉬이 허락을 맡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주 서산희망원에 봉사 활동을 가는 날, 내 출석을 현장학습으로 대신하고 대회반 재료를 사용해도 되느냐는 것이 내가 허락 받고 싶은 내용이었으니까.

"급식업체와 제휴해서 현장 일을 하겠다는 건 분명 현장학습이고, 대회반 재료야 대회반이라면 누구든 연습에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으니 아무것도 문제 될 게 없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사실상 말장난 아닌가? 아니 뭐 이렇게 쉽게 넘어 가주시면 저야 감사합니다만.

뭐가 그리 걱정이냐는 듯 되묻는 교장 선생님의 태도에 오히려 내가 괜히 오버했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어라? 이거 내가 비정상인가? 애꾸눈 마을에서는 눈 두 짝 달린 놈이 장애인이라는 그거야?

"학생이 좋은 일 하겠다는데 막을 교사는 없어요. 이야기를 들으니 납득 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고요.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그에 맞는 대처를 해줄 뿐이에요."

대신 사진 기록 등은 반드시 남겨오라는 교장 선생님의 충고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해야 할까. 과연 폼으로 이런 학교에서 교장 역할을 맡고 계신 건 아니구나.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해요. 오늘은 특별교육을 하는 날이었죠? 봉사 활동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교육에 먼저 집중하도록 합시다."

"아, 옙.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

단단히 마음먹고 온 교장 선생님과의 면담 시간은 허무하리만치 간단하게 끝났다. 그것도 내가 바라던 조건은 무엇 하나 빠짐없이 허락받고 말이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건가 싶은 기분이 들 정도였지만…….

"그래 뭐, 아무렴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가장 힘들 거라고 예상했던 부분이 생각보다 훨씬 쉽게 끝났으니, 이제 원정율 영양사에게 전화해서 개요를 정리해주면 사전 준비는 끝난다.

"나머지는……."

다음 주. 당일에 모든 게 달렸다.

오랜만에 그걸 만들 생각을 하니 벌써 어깨가 결리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장래 유망한 어린아이들을 위한 일이다. 조금 정도는 힘들어도 견뎌내야지.

그래. 내가 존경하는 그 사람들처럼 말이다.

***

일주일이란 시간은 말 그대로 시위를 떠난 화살마냥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쯤 되니 봉사 활동에 나가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고, 조금은 다른 사람들과 손발을 맞춰가며 여유롭게 요리하는 법을 익혔다. 평소에는 빠르고 정확하게 하는 것만 연습했더니 오히려 느리게 하는 게 더 어려웠다.

가끔은 너무 빨리해서 서산희망원 때처럼 원정율 영양사와 함께 배식 현장까지 출장 나간 적도 몇 번 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나와 원정율 영양사는 보다 깊은 교우를 나눌 수 있었다.

서로 궁금했던 점이나, 혹은 사적인 이야기를 제법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이다.

"원정율 영양사님도 보육원 출신이셨다고요?"

"응. 보호 기간이 끝나서 독립한 케이스야. 나도 시설에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거든. 이런 봉사 활동에 목매다는 것도 그런 애들을 조금이나마 돕고 싶어서고."

어쩐지. 먼저 하늘이와 현우의 상태가 이상하단 걸 깨닫고 말한 건 나였지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파고든 건 원정율 영양사였다.

아이들의 추억을 나쁜 기억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던 말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단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 사람 본인도 결코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을 텐데, 대단한 사람이다.

"그나저나 대체 현우 걜 어떻게 구슬렸기에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어준 거야? 하늘이야 평소에도 말을 잘 듣는 순한 애라 그렇다 치지만 현우 녀석 고집은 쇠심줄 저리가란데."

"저하고 말이 통하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그 덕분이죠."

"영업비밀은 안 가르쳐준다 이거지? 뭐, 좋아. 그건 둘째 치고 선물은 또 뭐야? 말해두겠는데 우리 시설도 그다지 자금 사정이 넉넉한 건 아니라 애들마다 일일이 선물 같은 건 못 줘."

"알고 있어요. 걱정마세요. 제가 책임지고 반드시 준비할게요."

"뭐야, 너 혹시 돈 잘 버니?"

"에이, 아직 학생 딱지도 못 뗀 요리사가 무슨 돈을 잘 벌겠어요. 하루 연명하는 것도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하긴 그도 그렇지."

사실 대회니 뭐니 해서 쟁여놓은 상금은 꽤 많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것도 애들 선물을 서른 개씩 챙겨주다 보면 얼마 안 가 빈털터리가 되고 말거다.

"그럼 선물은 대체 어떻게 준비하려고?"

"제가 생각해둔 게 있어요."

그래서 내가 학교에 조퇴 계획서까지 낸 것 아닌가.

"저는 요리사잖아요.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죠."

나를 바라보는 원정율 영양사의 의아한 눈길을 느끼며 나는 빙그레 웃었다.

***

내가 회귀 전에 일했던 연회 주방의 업무는 기본적으로 파티 준비다.

파티라고 해도 종류는 다양하다.

어떤 때는 거부들의 연말연시 파티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회사에서 보너스 식으로 자리를 만든 파티일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결혼식이 끝난 뒤의 피로연일 때도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유 중 하나가 '파티를 열고 싶어서 파티를 열었다.' 였더랬지. 부자의 생각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아무튼, 그런 파티를 하다 보면 그때마다 빠질 수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다.

파티는 단순한 식사 자리가 아니다.

음식 자체가 식사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장식품으로 기능하는 것. 그게 바로 파티다.

테이블 위에 올라간 뷔페 음식의 퀄리티는 당연히 누가, 언제, 어느 각도에서 살피든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어야 하는 건 기본.

거기에 더해 웨이터의 매너나 접객 예절까지, 그 모든 것이 호텔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시그니처 푸드.

이름만 듣고 무슨 햄버거 프랜차이즈 60년 전통의 계란후라이 들어간 치즈버거 같은 걸 생각하면 곤란하다. 우리 호텔의 시그니처 푸드라는 놈은 정확히 말하자면 '호텔의 시그니처 푸드'가 아니라 '고객의 시그니처 푸드'였으니까.

뭐, 요컨대 오더 메이드라는 거지. 이 시그니처 푸드란 놈은 만들기도 더럽게 까다로운 메뉴가 주문으로 올 때가 많아서 한 번 까다로운 주문이 들어왔다 하면 그 메뉴를 담당하는 파트는 죽었다 복창하고 굴러야 할 때가 많았다.

어떤 때는 속을 여러 과일과 향신료로 채운 새끼 돼지 통구이였고, 어떤 때는 크라운 양갈비 구이 같은 거였지.

그리고 그런 시그니처 푸드 중에서도 특히 내 기억에 강하게 남은 어느 메뉴가 있다. 지금부터 내가 할 것은 그 메뉴의 재현이었다. 다만, 내 레시피 개량을 조금 섞어서.

원본에 해당하는 레시피가 쓰인 파티는 다름 아닌 피로연.

그리고 그때 우리 호텔의 제과제빵 파트에서 설계에만 사흘, 만드는 데에는 반나절을 쏟아 부은 그 메뉴의 정체는 바로…….

"케이크지."

또한 당연하게도, 이건 결코 평범한 케이크가 아니다.

살면서 평생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최고의 케이크.

이걸 만들며 고생할 내 자신의 미래, 그리고 이걸 받고 기뻐할 아이들의 모습이 절묘하게 오버랩 되는 느낌에 나는 살짝 몸을 떨었다.

"실패하지 말아야 할 텐데……."

실패했다간, 뒷수습 같은 건 정말 꿈도 꾸지 못할 테니까.

가볍게 심호흡을 끝내고, 나는 조리복의 앞치마 끈을 조였다.

파티시에 중에서도 프로 중의 프로가 몇 명이나 달라붙어 반나절이 걸려 간신히 만들어낸 이 레시피.

앞으로 다섯 시간 안에, 나는 그런 메뉴를 나만의 색채로 다시 물들여 만들어야 한다.

"…… 시작하자."

손끝부터 슬금슬금 나를 좀먹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비로소 조리를 시작했다.

***

이번 주, 평화 급식소에서 서산희망원에 보내기 위해 준비한 메뉴는 몇 달 만에 돌아온 치즈 스파게티와 피자 등으로 구성된 양식 메뉴였다.

아이들은 보기 드문 양식 메뉴에 환호했다.

한국에서 밀가루 음식은 특히 비싼 편에 속한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순수하게 밀가루값이 제법 비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런 양식 계열의 메뉴는 이전에 가져온 통상 급식보다 자금 대비 효율이 그렇게 좋지 않고, 그나마도 메뉴의 대부분이 공산품으로 만들어져 특히 맛이 대단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몇 달에 한 번 보기도 힘든 메뉴라는 특수성과 겹쳐, 아이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한 상태였다.

"나 한 번 더 먹을래!"

"나도! 판다 아저씨! 나 더 주세요!"

"천천히 와, 천천히. 많이 있으니까."

이전에 서현우와 나눈 약속대로, 찬혁은 오늘도 원정율과 동행하여 서산희망원에 배식 봉사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

최근 찬혁의 합류로 평화 급식소는 퀄리티에 물이 올랐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으나, 정작 그 호평의 주인공인 찬혁의 얼굴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 괜찮은 거 맞지?'

옆에 선 원정율 부럽지 않은 기미가 잡힌 찬혁을 보며 서현우는 괜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날, 찬혁의 말을 듣고 서현우는 이하늘과 화해할 수 있도록, 적어도 최소한의 대화의 물꼬나마 틀 수 있도록 물심양면 노력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마다 누군가가 방해하거나, 혹은 자신이 실수하여 기회를 놓치기 일쑤.

일주일 전보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많이 누그러졌으나 싸우기 이전과 비교하면 여전히 냉전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식당에 앉는 자리가 조금은 가까워졌다는 것이 몇 없는 마음의 위안이었다.

하지만 그 위안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찬혁이 말한 '최고의 선물'이라는 말에 부합되는 무언가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먹었습니다!"

"아, 배부르다……."

"오늘도 되게 맛있었어. 그치?"

"응!"

점차 끝나가는 석식 시간. 테이블 이곳저곳에서 눈치게임을 하듯 터져 나오는 인사말이 서현우의 초조함을 부추겼다.

'이게 마지막 기횐데……!'

당장 내일 아침이면 이하늘은 이 보육원을 나가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곳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문득, 이전에 찬혁이 말한 이야기를 떠올린 서현우는 불안함을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었다.

만약 이렇게 서로 찝찝하게 헤어진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고 볼 수 없게 된다면?

그건 감히 후회라는 말로 끝내지 못할 사건이 될 것이다.

그때였다. 가만히 밥을 먹고 있던 보육원의 교사 중 한 사람이 식탁에 둘러앉은 아이들을 향해 흔치 않은 통제를 내린 것은.

"밥 다 먹은 사람은 잠시 제자리에 앉아서 기다려요. 오늘은 모두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어요."

뜬금없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일단은 다들 자리에 앉아 시킨 바를 그대로 따랐다. 그때쯤, 서현우는 아까까지만 해도 급식을 배식하던 찬혁과 원정율이 자리에서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설마 도망?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나, 다행히도 그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영양사님, 조심! 조심해서 가세요!"

"오케이, 천천히 와, 천천히!"

잠시 자리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한 두 사람이, 어느새 바깥에서 성인 남성의 몸뚱이보다도 더욱 커다란 박스를 함께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난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큰 것에 흥미를 느낀다. 그런 와중에 식탁 위로 올라온 그들 자신의 몸뚱이보다도 더욱 큰 상자.

호기심으로 들끓는 아이들 앞에서, 교사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건 학교에 오신 봉사자 분이 여러분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에요."

선물!

아이들의 눈이 번뜩였다.

생일이 되어도 그다지 변변찮은 선물 말고는 받아본 기억이 없는 그들에게 그보다 더 자극적인 단어를 찾는 게 오히려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모두가 열 준비를 마치고 다함께 열자는 제안 아래, 아이들이 상자 주변으로 둥글게 모여들었다. 어찌나 상반신을 앞으로 내밀었는지 다닥다닥 부딪히는 각자의 어깨.

마침내 보육원생, 교사, 그리고 찬혁과 원정율까지 자리를 잡자 비로소 학생들을 대표하여 교사가 상자로 손을 뻗었다.

각자의 심장박동이 하나로 합쳐진 것처럼, 멈추지 않는 고동이 기대감에 속도를 높인다.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까. 장난감? 핸드폰? 옷? 신발? 가방?

잠시 후, 교사의 손에 개봉된 상자의 내용물을 본 아이들의 눈빛에 감탄과 놀라움이 뒤범벅되어 빛나기 시작했다.

"케…… 이크?"

"케이크야?"

상자의 내용물은 바로 케이크였다. 다만, 평범한 케이크는 결코 아니었다.

"이런 거, 처음 봤어……."

"우와……."

식탁에 올라갔다곤 하나 어린아이의 앉은키를 가뿐히 뛰어넘는 높이.

손뼘을 활짝 피고 갖다 대봐도 지름의 반조차 채우지 못하는 길이.

그런 엄청난 크기의 3단 케이크가 그들에게, 그리고 차현우에게 말 그대로 형용조차 힘든 시각적 컬쳐쇼크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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