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발런티어 사가.-2-
이전에 앞서 말했다시피, 무료 급식소의 업무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내 기준에서 내린 평가긴 하지만 아마 적당한 식당 주방에서 알바해 본 경험이 조금만 있다면 누구든 쉬이 해낼 수 있을 만한 일이 대부분이다.
언뜻 50인분이란 단어만 들으면 그 어마어마한 양을 어떻게 준비하느냐고 기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당장 초, 중, 고등학교 급식만 해도 배식하는 분들을 제외하면 해봐야 약 열 명 남짓한 수의 인원이 조리를 담당한다.
한 학교의 전교생 수백인 분을 준비하는 데에 고작 그 정도 인원으로 충분하단 거다.
이건 오히려 요리를 모르는 사람보다 약간이나마 아는 사람이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고급 요리라면 모를까, 급식 같은 요리는 기본적으로 만들어야 할 양이 늘어난다고 일까지 정비례로 늘어나진 않는다.
물론 재료 손질 따위에 시간과 인력을 더 많이 투자하긴 해야겠으나 결국 단순 노동이 좀 늘어나는 수준에 불과하단 거지.
왜 김장을 시기마다 나눠서 하지 않고 겨울에 몰아서 할까?
물론 김장한 김치를 보관하기 위함이라는 문제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한 번에 많이 해두는 쪽이 나눠서 하는 것보다 편하기 때문이다.
대규모 조리도 김장과 마찬가지다. 뭐, 물론 완전히 똑같다는 건 아니지만 얼추 비슷한 점이 있다는 뜻.
대규모 조리를 주특기로 둔 나다. 장담할 수 있다 이거야.
위생복을 입고 내가 쓸 조리도구를 정리하며 이래저래 조리과정을 정리하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나 다른 봉사자와 같은 위생복 위에 색이 다른 앞치마를 두른 30대쯤으로 보이는 남성이 주방에 들어섰다.
체구가 제법 있는 사람이다. 근육보다는 지방 쪽으로.
살짝 피곤한 듯 보이는 표정을 지은 얼굴. 눈가에는 옅은 다크서클이 보인다. 하지만 전체적인 인상이 서글서글한 덕일까, 묘하게 나쁘게 다가오지 않는 인상이다. 오히려 조금 호감. 살짝 판다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저들끼리 모여 수다를 떨던 아주머니들이 대화를 멈추자 남자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도 봉사 활동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화 무료 급식소 영양사 원정율. 그게 남성의 이름이었다.
'영양사?'
의외다. 보통 무료 급식소에서 영양사에게 의뢰하여 식단을 조율할 때는 있어도 아예 영양사가 직접 근무하는 일은 많지 않은데. 자금 사정이 생각보다 널널한 건가?
그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아주머니 일행. 서로 안면을 익히고 있는 걸 보면 다들 봉사 활동 단골인가보다. 뭐, 어느 현장을 가나 비슷한 느낌이긴 하다. 봉사 활동 같은 건 하는 사람만 하는 일이니까.
부산스런 분위기에서 인사를 끝마친 남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오, 처음 보는 얼굴이구나. 학생이니?"
"네. 외부 봉사 활동을 하러……."
"아, 그러고 보니 소장님이 성심고에서 학생이 올 거라고 하시던데."
"그게 저에요."
"그래, 잘 왔어. 편한 곳도 마다하고 힘든 일에 지원해줘서 고맙다. 이름이……?"
"류찬혁이라고 합니다."
"그래, 찬혁아. 나는 원정율이야. 영양사를 맡고 있다. 편하게 부르렴."
내민 손을 잡고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원정율 영양사가 손뼉을 치며 다른 봉사자에게 신호를 보냈다.
"여러분! 이제 시작할게요. 시작하기 전에 손 씻으시고 위생 장갑 꼭 착용해주세요."
합창하듯 동시에 돌아온 대답에 맞춰 나도 끼어들어 답했다.
단체급식은 위생이 최우선. 마스크, 장갑, 그리고 위생모까지 전부 준비 끝. 이제야 겨우 시작하는 건가 싶다가도, 시작이 반이란 말처럼 최선을 다해 임하도록 하자.
***
'뭔가 오랜만이네.'
칼을 잡은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근 들어 이래저래 일이 많아 좀 바빴던 탓일까. 요리를 하는 것 자체가 뭔가 반갑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아예 칼을 놓고 지냈던 건 아니라지만 이런 현장에서 일한 건 분명 꽤 오랜만이다.
현장의 감각이 다시 몸에 붙는 느낌. 음. 나쁘지 않다.
손에 익은 내 칼을 손아귀에서 한 바퀴 돌린다. 손잡이 중에서도 목제 손잡이는 비교적 빠르게 손의 형태에 맞춰진다. 쓰는 과정에서 조금씩 닳아서 내 손에 딱 맞는 모양이 된다고 할까.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진짜 내 전용이 되어가는 그 느낌은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평범한 가정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열 시간, 스무 시간으로 되는 간단한 일이 아니라.
손바닥에 빈틈없이 밀착하는 칼 손잡이의 감촉을 즐기며 나는 머릿속으로 오늘의 메뉴를 되뇌었다.
'밥에 감자조림, 떡갈비, 백김치, 양송이버섯 야채볶음, 계란국. 후식으로는 과일.'
무료 급식소의 식단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냥 끼니를 먹는 평범한 식단. 명절 등의 특별한 날에 먹는 특식, 그 외에도 면 식단, 빵 식단 등등. 오늘의 식단은 그중에서도 전형적인 급식 식단이다. 아이들 입맛에 맞춘 메뉴를 고른 게 티가 나는 걸 빼면 평범하다.
"실력이 좋네."
영양사의 센스가 돋보인다. 보육원, 즉 아이들이 먹을 식단이니 필요한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면서도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가끔 영양만 잘 맞추고 아이와 어른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사람도 왕왕 있는 걸 생각하면 이 원정율 영양사는 분명 실력이 있는 사람이다.
"좋아. 시작해볼까."
그렇다면 더 망설일 것도 없지.
우선 지금은 기초 준비를 하는 시간. 요리에 쓰일 식자재를 찾아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한다.
'일단 감자 먼저.'
조림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요리다. 대부분 메인인 떡갈비에 들어갈 고기를 준비하느라 이쪽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듯하니, 내가 알아서 일을 찾아 빨리 끝내두는 게 낫겠지.
원정율 영양사도 내게는 딱히 지시를 내리고 있지 않다. 성심고 학생은 알아서 하게 놔두는 건가? 나 말고도 다른 성심고 학생을 맞아본 게 한두 번은 아닌 것 같다. 이쪽이 나는 편해서 좋긴 하다.
학교였다면 감자 같은 식자재 껍질 벗기는 건 죄다 기계에 때려 박았겠지만 아쉽게도 이곳엔 그런 도구까지는 없다. 해봤자 필러나 연필깎이처럼 말뚝에 끼운 뒤 레버를 돌려 깎는 수동 껍질 제거기 정도.
'저걸 쓸 바에야 내 손이 더 빠르겠네.'
이건 농담이나 허세가 아니라 정말이다. 어쩌다 배운 돌려 깎기 기술은 멀쩡한 손과 잘 드는 칼 한 자루만 있으면 감자 껍질 정도야 기계 뺨치는 속도로 벗길 수 있으니까.
윗단과 아랫단을 잡고 돌리기 편하게끔 평면으로 살짝 자른 뒤, 그걸 한 손에 쥐고 칼을 리드미컬하게 그어 껍질을 깎아낸다.
꼭 흙탕물을 뒤집어쓴 유리창을 와이퍼로 닦아내는 것처럼, 칼이 지나간 자리엔 흙색 껍질은 사라지고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사이즈 마다 다르겠으나 주먹만 한 감자 하나의 껍질을 제거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대략 10초 미만.
'사실 겉멋이라고 배운 거긴 한데 말이야.'
이렇게 깎으나 필러로 깎으나 결국 결과물은 비슷하긴 하지만, 이게 또 완벽하게 숙달이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모양도 보다 예쁘게 깎이고 시간도 덜 걸린다.
이렇게 감자 서른 개들이 한 박스를 전부 깎는 데에 걸린 시간이 5분 미만.
순식간에 처리한 감자를 단번에 8등분 하여 전분기를 씻어내고 양념과 물을 충분히 넣은 냄비에 넣어 졸이면, 어머 놀라워라. 메뉴 하나가 순식간에 끝났다.
'다음은 양파지.'
계란국과 야채볶음에 들어갈 분량을 서로 나누어 준비. 어차피 채 써는 거야 똑같지만 굵기 차이에 신경 쓸 부분이 있다.
물론 이것도 금방 끝냈다. 벗겨낸 양파 뿌리와 겉껍질은 잘 세척해서 국물용 육수를 뽑는 냄비에 넣었다. 이러면 제법 깊이 있는 육수가 우러나온다.
그 외에도 파나 피망, 그 외의 잡다한 식자재를 그야말로 무아지경에 빠진 듯 손질, 또 손질한다.
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리는 꼭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와 닮았다.
몸은 요리를 하고 있는데 정신수양을 하는 것 같은 독특한 기분. 식칼이 내가 되고 내가 식칼이 되는 경지. 마치 손에서 뻗은 신경이 칼끝까지 닿은 것 같은 이 감각을 조금 더 맛보고 있자니, 어느새 조리대 근처에 옮겨둔 대부분의 식자재가 거의 사라져 있었다.
…… 아니, 뭔 무협지도 아니고.
요즘 심신이 피로하니 별 요상한 헛소리가 다 나온다.
사람이 뭘 어떻게 하면 주방 일을 하면서 심신의 안정을 얻는 걸까. 슬슬 나도 스스로가 미쳐가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점점 깊어지던 그때, 묘한 감각이 내 뒤통수를 찌르는 게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그 감각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
"……."
"와……."
샌, 아니 이게 아니라.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찌르던 감각의 정체는 다름 아닌 시선이었다. 그것도 한두 쌍 정도가 아니라, 같은 자리에 있던 모든 봉사자의 시선이 전부 날 향해 못 박은 듯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세상에. 저걸 다 했어……?"
"우린 이제야 고기 반죽 끝내고 김치 좀 썬 게 전분데……?"
누구 입에서 나왔는지 모를 높낮이 없는 감탄사. 너무 놀라 미처 감정이 섞이지 않은 듯한 그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제정신을 차리고 내 자리를 둘러봤다.
"아, 이런."
오랜만이라고 너무 흥을 탔다. 그것도 제법 과하게.
50인분의 급식을 만들 상당한 양의 식자재. 나는 저도 모르게 그 식자재의 대부분을 혼자 손질하고 만 것이다.
'아니, 나쁜 일은 아닌데…….'
그만큼 열심히 했으니 잘 한 거 아냐?라고 말하기엔 내가 봐도 이건 좀 많이 과했다.
원정율 영양사를 합쳐 일곱 사람이 할 일을 거의 혼자 다 끝내버리다니. 이러면 꼭 '같이 플레이하자!'라며 코옵 게임을 사놓고 혼자서 몰래 스토리 대부분을 깬 다음 생색내는 사람 같지 않은가.
"저기, 그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꼭 사고 현장을 들킨 견공처럼 살포시 고개를 돌렸지만 날 향한 시선은 여전히 거둬지질 않는다.
서로가 말을 잃고 눈만 깜빡이던 그때, 갑작스레 누군가가 이전보다 더욱 커다란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 대단해!"
이 시설의 영양사이자 실무 책임자 역할을 맡은 원정율 영양사였다.
"예?"
"이 짧은 시간에 저걸 다 마무리한 거야? 저 정도면 우리가 할 게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아, 예. 그렇죠. 제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 부분인데요.
감탄하다 못해 이제는 숫제 신난 것처럼 보이는 원정율 영양사에게 속으로 태클을 걸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봉사 활동은 그 과정으로부터 만족감을 추구하는 일.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내가 한 일은 다른 이가 만족감을 얻을 기회를 박탈한 것과 같단 말이지.
그러나 그런 내 불편한 심정도 모르고 원정율 영양사는 오히려 나와 주변인을 조금 더 재촉하며 요리의 완성을 서둘렀다.
"좋아, 이 정도면 남은 일도 훨씬 빨리 끝나겠어!"
그러니까 지금 내가 그렇게 될까 봐 걱정인 거라니까요.
곤란한데. 이대로 가다간 원래 계획한 봉사시간의 반도 못 받을 것 같고, 그렇다고 요리를 질질 끌면서 하자니 내 자존심이 용납 못 한다. 억지로 시간을 맞춰 만들겠다고 조리 시간을 늦추면 분명 급식의 퀄리티가 떨어질 테니까.
하는 수 없지. 나는 일단 준비가 끝난 식자재를 재빨리 사용해 요리의 마무리 단계로 들어섰다.
완성한 음식을 두꺼운 보온통에 넣고, 배식을 위한 식판을 챙긴다.
내가 일찌감치 준비를 끝낸 재료에 그 자리의 모두가 달라붙자 요리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끝났다. 기존에 서류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그날의 봉사 활동은 끝을 맺고 만 것이다.
아주머니들은 그걸로 만족했는지 잠시 멈췄던 수다를 재개하며 나를 종종 힐끗힐끗 바라봤다. 아무래도 저들끼리 날 품평하고 있는 것 같은데…… 좋은 이야기인지 나쁜 이야기인지는 알 수가 없구만. 내가 빤히 바라보는데도 오히려 날 보고 웃는 걸 보면 좋은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지만, 어느 쪽이든 어떠리.
아주머니 일행에게서 눈을 돌리고 바깥에 주차된 차량으로 조리가 끝난 음식을 옮겼다.
"아, 옮기는 거 도와줘서 고마워. 오늘은 덕분에 되게 빨리 끝났다. 안 그래도 오늘은 조금 서둘러야 했는데 네 덕에 살았어."
"별것도 아닌데요, 뭘."
"별거 아니긴. 엄청 도움 됐는데. 간도 최고더라. 분명 보육원 애들도 좋아할 거야."
"그랬으면 좋겠네요."
아이들 입맛은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까다롭다. 일반 성인보다 맛을 느끼는 미뢰의 수가 훨씬 많아서 약간의 떫은맛이나 쓴맛도 크게 느끼는 탓이다.
입맛에 맞추기 위해 조금 더 달달한 맛을 살리긴 했지만, 뭐, 부디 맛있게 먹어주길 바랄 수밖에.
"그나저나 곤란하게 됐네요."
"응? 왜 그러니?"
"요리가 생각보다 너무 일찍 끝나서요. 봉사시간을 예상한 거의 반도 못 받겠어요."
이런 일이 오늘로 끝나진 않을 텐데, 그랬다간 예상한 것보다 시일이 두 배는 더 걸릴 것이다. 계속 대회반 자리를 비우는 것도 좋지만은 않고, 이를 어쩐다…….
차의 트렁크 앞에서 턱을 괸 채 멍하니 서서 고민하던 그때, 원정율 영양사가 내게 뜬금없는 제안을 던져왔다.
"그럼 마침 잘 됐다. 혹시 시간 좀 더 내줄 수 있을까?"
"예? 예, 뭐……."
어차피 예상했던 소요시간의 반도 안 지났으니까, 시간이라면 얼마든 더 내어드릴 수 있긴 하다. 그렇게 대답하자 원정율 영양사는 크게 기뻐하며 내게 말을 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나랑 같이 가보는 건 어때?"
"가다니, 어디를요?"
"서산희망원."
그곳은, 우리가 만든 음식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던 보육원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