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18화 (218/403)

218. 발런티어 사가.-1-

정도준이 대회반에 들어오고 대략 세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보름달이 세 번을 뜨고 지는 시간. 아무리 적응이 늦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 여유가 있다면 무엇에든 이미 익숙해질 시간이다.

세 달이면 작대기 하나만 단 이등병이 그 위로 작대기 한 줄을 더 긋고 짬 찬 행세를 할 수 있는 시간 아닌가.

거기다 어릴 적부터 영민했던 정도준이라면 세 달의 시간은 성심고, 그리고 대회반이라는 단체의 구조에 충분히 익숙해지고도 거스름이 남았다.

다만 그런 정도준조차 모든 일에 태연자약해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대회반 고학년들의 일상생활과 요리 연습 때 보이는 갭이 그러하겠지.

평소에는 하굣길 분식집에서 옹기종기 모여 수다나 떠는 평범한 친구들처럼 보이는 학생무리가 전력을 다해 요리 연습을 시작하면 코에 직빵으로 스팀팩이라도 주사한 사람 마냥 광기에 취한 광인 집단으로 변하는 걸 보고 그 누가 익숙해질 수 있을까.

그러나 정도준을 비롯한 1학년들은 그마저도 그 광인 집단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이해를 건너뛴 공감을 체득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여전히 정도준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이러한 사정으로 나는 당분간 대회반 활동에 전념할 수 없게 됐어. 미안해."

"미안할 건 뭐야. 어차피 1학기 할당량은 채웠으니 딱히 모일 일도 별로 없잖아."

"그래도 아주 연습이 없는 건 아니잖아. 봉사 활동 시작하면 그런 것도 봐줄 시간이 부족해지니까."

"굳이 무료 급식소 말고도 편한 데도 있지 않아? 공공시설 청소 같은 건 편하고 시간도 많이 주는데."

"편한 곳만 찾을 거면 왜 봉사라는 말이 붙었겠냐. 이런 것도 다 경험이야. 해두면 인생에 언젠가는 도움이 된다고."

"아, 혁이 또 아저씨 같은 소리 하고 있어."

'봉사?'

류찬혁. 대회반의 부장인 그에 대해 정도준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솔직히 쫄았다.

잘 생긴 사람도 얼굴 근육의 조화에 따라 어지간한 호러 무비의 괴물보다 무섭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을 정도로.

다행히 그건 연기였고, 그 뒤로는 평범한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다닌 찬혁이었으나 정도준을 비롯한 1학년 일행은 찬혁의 웃음 위로 몰래카메라를 할 때의 얼굴이 계속 오버랩 되어 한동안은 그와 마주칠 때마다 움찔움찔 몸을 떠는 버릇이 생겼더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대회 연습을 거쳐 대회를 마무리 지었을 때쯤엔 더 이상 그를 보고 놀라는 일은 없었다.

몰래카메라 때의 기억이 희미해질 정도로, 찬혁의 리더십과 요리 솜씨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니 고작 우리보다 한 살 많은 나이에 저렇게 엄청난 커리어를 쌓고 있는 거구나. 본받을 곳이 많은 선배다.

…… 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대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터진 학폭 사건에 연루되어 정작 찬혁의 얼굴조차 보기 힘들게 된 상황 속에서 1학년들은 저도 모르게 납득하고 있었다.

"어쩐지 좀 얼굴이 무섭긴 했어……."

"솔직히 과거가 아예 깨끗한 사람이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 같기도 해."

"나 방금 올튜브 보고 왔는데 경찰서까지 갔음 대체 몇 대 몇으로 싸운 거야? 1대 17쯤 했나?"

엄청난 대형 사건에 연루된 선배를 향한 말이라고 보기엔 조금 매정하지 않나 싶겠지만, 적어도 그들은 찬혁이 아직 오해인지 진실인지 모를 사건을 금방 마무리하고 복귀하리라 믿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믿을 수 있었느냐 물어도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냥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아는 방법이(@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도자기 장인이 점토를 주무르는 손에서 그 사람의 속내를 가늠하듯, 요리의 세계에 일가견이 있는 그들도 누군가가 요리에 집중하는 모습에서 적게나마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요리에 전념하는 찬혁의 모습은 그 영상에서 말하는 무뢰배 양아치로는 결코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뿐인 이유지만, 그들에겐 그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유도 없었다.

"혁이는 뭐만 하면 난리가 나더라."

"놔둬. 하루이틀도 아니고."

"창민이는 쌀쌀맞네."

"근데 맞는 말이긴 하잖아."

"그건 그래. 아, 나도 쿠키 좀 더 주라."

"기다려. 아직 조금 더 구워야 돼."

학교가 통째로 뒤집힐 것 같은 상황 앞에서도 여느 때와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을 만치 태연한 고학년들의 태도도 그 근거 중 하나였지만.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의 믿음대로 찬혁은 금방 원래 자리로 복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며 자리를 비운다니, 그것도 봉사활동 중에서도 제법 힘든 축에 속하는 무료 급식소다. 학교에서 내린 징계라고는 해도 다른 방식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을 굳이 고생할 게 뻔한 길을 고르다니, 여전히 조금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현장 경험은 다른 걸로도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

징계를 수행하러 가는 것임에도 어딘가 들뜬 것처럼 보일 정도로 평소보다 웃음이 짙어진 그를 보고 있노라면 꼭 징계를 받으러 가는 게 아니라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잘못을 저지르고 솜방망이 처벌로 꿀 빨러 가는 거면 또 모를까, 그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상황에서 저러고 있으니 꼭 이상한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이상한 사람이 맞나?'

아무래도 이 집단에 섞여 있다 보니 자신도 점점 깊게 물들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그때, 동급생들과 대화를 나누던 찬혁이 다시금 공지를 이었다.

"내 자리는 일단 부부장인 창민이가 잠시 맡아서 하게 될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대회반 시설은 뒷정리만 제대로 하면 언제든 쓸 수 있으니까 연습 열심히 하고. 대회 끝났다고 얘 같이 모이 받아먹는 병아리처럼 입 벌리고 쿠키나 먹고 있지 말고."

"아, 혁이가 나 디스했어."

"싫으면 그럴 짓을 하지 말던가. 아무튼 오늘은 여기까지. 나는 남은 과제 마무리하러 좀 일찍 가봐야 해서 이만 들어갈게. 다들 다음에 보자."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뜨는 찬혁의 뒷모습을 보며 정도준은 생각했다.

저 사람, 지금도 연습하고 있는 우리한테 여기서 더 열심히 연습하라는 건 대체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아마 본인 기준이겠지…….'

아무튼, 방면을 가리지 않고 좀처럼 따라가기 힘든 부장님이었다.

***

학교 앞 정거장에서 버스를 타고 15분. 거기서 도보로 5분. 그리고 도착한 건물에서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20분을 더 이동한다.

깎아지른 빌딩과 거대한 광고판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지점. 도시의 외곽 부분에 그곳이 있다.

평화 무료 급식소.

"여기구나."

버스 입구 부근에서 북적이는 아줌마 집단의 틈새를 비집고 나오니 간신히 그 간판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아까 간 곳이 일종의 사무실이라면, 이쪽은 현장.

이곳에서 만든 도시락을 계약한 곳으로 배송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여기는 처음인데……."

그래도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인 건 매한가지니 이전이랑 비슷하게 생각하면 되겠지.

봉사시설 현장에서 일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물론 결코 쉽다는 건 아니지만.

다만 보통 나 같은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현장과는 굉장히 많은 차이가 있다는 거지.

우선 같이 일하는 사람이 그나마 편한 축에 속한다.

사람 속내야 아무도 모르는 거라지만 자기 시간을 써서 봉사활동까지 하러 온 사람은 다른 것 몰라도 겉치레만큼은 반드시 챙기는 습성이 있다.

나처럼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온 거라면 모를까, 아까 버스 안에서 날 귀찮게 하던 아줌마들 같은 경우라면 거의 십중팔구는 그렇다.

이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지 않는 이상 말도 조곤조곤, 일도 조곤조곤. 속도는 느려도 고함치는 사람은 없으니 편하다. 수다 때문에 귀가 아픈 적은 많았지만.

속도 느린 거야 내가 좀 서두르면 되는 일이고.

그다음으로 중요한 건 일이 의외로 많지는 않다는 것.

무료 급식이라는 특성상 결국 비용은 한정된다. 한 식판에 사용할 수 있는 가격은 평균적으로 1000원 남짓일까. 이것도 인건비를 아예 빼 버렸을 때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기부 자금으로 굴러가는 곳이니만큼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쪼들리는 신세를 피하지 못한다. 한 끼 비용을 더 절감할 순 없으니 결국 먹을 입을 줄일 수밖에.

결과적으로 무료 급식소의 1회 배식량은 50인분 정도를 넘나든다.

같이 셔틀버스를 타고 온 인원은 나를 합쳐 여섯 명 정도.

고작 50인분쯤 만드는 건 나 혼자서도 얼추 가능한데, 사람이 이만큼 있으면 뭔들 못할까.

그렇다고 불편한 게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일단 조리시설부터 그리 편리하진 않을 테니까.

이외에도 이래저래 편한 것도 있고 불편한 것도 있지만 결국 현장은 직접 뛰어본 다음에나 평가할 수 있는 것.

짐을 뒤져 봉사활동 신청서를 꺼낸 난 조리시설 입구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실내 공간은 단촐(@단출)하다. 봉사자를 확인하는 카운터. 양옆으로 나뉘어 들어가는 탈의실. 아마 저 안에서 조리용 위생복으로 갈아입고 소독 구역을 지나 주방으로 들어가면 되리라.

때마침 시의적절하게도 카운터에 대기하고 있는 사무원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다가가자, 사무원이 날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세요. 평화 무료 급식소입니다. 봉사 활동하러 오신 분이세요?"

"예. 여기, 신청서요."

"신청서 받았습니다. 잠시만요.…… 류찬혁 학생. 예. 확인됐습니다. 잠시 후 정각 전까지 들어가시면 돼요. 여기, 신청한 사이즈에 맞춘 위생복이에요. 좌측 탈의실에서 먼저 입어 보시고 사이즈 확인해보세요. 작거나 클 경우 탈의실 안에 있는 옷 수거함에 두시고 새로 받으러 오시면 됩니다."

마치 게임 속 튜토리얼 npc처럼 정해진 대본을 읊듯 랩 저리가라 하는 속도로 설명을 끝마친 사무원이 건네준 옷을 받아들었다.

"근데 류찬혁 학생…… 혹시 전에도 온 적 있었나요?"

"예? 아뇨. 처음 뵙는 건데요."

"이상하네,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 미안해요. 처음 온 거면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아직 시작하려면 시간도 좀 있으니 조금 더 설명을 듣고 가는 건 어때요?"

"어…… 예. 부탁드려요."

"잘 생각했어요."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사무원이 말을 이었다.

설명이라고 해도 대부분의 내용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시작 시간이나 마감 예정 시간. 오늘 만들 메뉴 따위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기 급식은 어딜 가나 호평이에요. 류찬혁 학생 같은 성심고 재학생이 자주 봉사 활동을 나오거든요. 같은 재료면 역시 맛을 가르는 건 인력이죠! 전국 어딜 뒤져도 인건비가 이만큼 의미 있게 쓰이는 무료 급식소는 여기 하나뿐일 거예요! 인건비는 없지만!"

봉사 활동이니까 말이지. 근거 있는 자신감이 가득한 미소에 나도 어설픈 미소로 답했다.

"저 혹시, 오늘 무료 급식이 배달되는 곳은 어딘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중요한 걸 물어보셨네요! 잠시만요…… 어디 보자…… 오늘은…… 아, 서산희망원. 여기가 오늘 배달 갈 예정지네요."

"……그렇군요."

보육원이구나. 이름을 듣고 대충 눈치챘다.

무료 급식소가 배달을 가는 대상은 보통 셋이다.

하나는 돌봐줄 자식이 안 계신 늙은 어르신들.

하나는 정처 없이 길을 방황하는 노숙자들.

마지막 하나가 바로 보육원이다.

보통 이 세 가지는 배달 장소의 이름으로 대충 구분할 수 있다. 실버나 요양원 같은 단어가 있으면 어르신들. 역 근처 이름이 나오면 노숙자들. 그리고 뭔지 잘 모를 이름을 가진 곳이면 대부분 보육원이다.

'그냥 보육원이라고 하는 곳도 있지만…….'

글쎄, 아이를 보호하는 곳 간판에 보육원이라는 이름이 너무 떡하니 붙어 있으면 안 좋게 보이기라도 하는 걸까. 나는 잘 모를 일이다. 그게 아이들 정서에 좋으니 똑똑한 사람들이 알아서 지은 거겠지.

이건 나도 알아야 할 정보다.

요리라는 건 누가 먹느냐에 따라 완성품을 어떻게 만들지를 결정할 수 있다.

아직 사리 분간이 안 되는 애들한테 먹일 거니 퀄리티가 떨어지게 만들어도 된다. 뭐 그런 소리는 당연히 아니다.

예를 들어 어르신 같은 경우 턱이 약한 분들이 많으니 어떤 음식을 만들어도 턱에 큰 무리가 안 가는 수준으로 부드럽게 조리할 필요가 있고, 질긴 식재료나 메뉴는 피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일정 나이를 지난 어린이 같은 경우는 조금 더 씹는 맛이 있는 편이 좋다. 막 성장할 나이. 턱이나 이와 같은 기관은 사용할수록 발달하니까.

물론 봉사 활동 하러 나와서 무급으로 그렇게 번거롭게 요리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건 말하자면 그냥 내 신념이다. 언제 어느 상황이든 타인이 먹을 것이라면 결코 어설프게 요리하지 않는다. 차라리 안 하고 말지,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할 거 아닌가.

"아, 미안해요. 설명이 길어졌네. 이제 슬슬 갈아입고 들어가면 딱 시간에 맞을 거예요."

"이거저거 많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가볼게요."

"그래요. 요리 열심히 해요.…… 근데 류찬혁 학생, 정말 어디서 만난 적 없어요?"

"없을걸요."

"이상하네……."

그야 만난 적은 이번이 처음이겠지.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날 봤다면 모를까.

아무튼, 대화를 마치고 자리를 옮겼다. 한 번 할 때마다 약 세 시간. 8번쯤 하면 딱 알맞게 징계 시간을 채울 수 있다.

앞으로 약 2주.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선은 다할 생각이다.

무료 급식을 먹은 사람이 당분간 외식은 생각조차 못 하게 만들겠단 각오를 가슴에 새기며, 나는 주방을 향해 걸었다.

…… 아니, 잠깐. 방금 그건 좀 느낌이 이상하지 않았나?

에이, 몰라몰라. 아무튼 그렇다는 뜻으로 알아서 알아듣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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