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16화 (216/403)

216.패스트 체인.-5-

교장 선생님과의 면담 이후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아직 내가 받을 징계에 대한 교직원 회의가 끝나지 않았는지, 나는 그날 이전에 받은 근신 이외의 어떤 처벌도 아직 받지 않았다.

'뭔가 이야기가 진행 중인 것 같긴 한데…….'

나한테 오는 알림이 있어야 뭘 알든 하지, 지금은 말 그대로 오리무중이다. 궁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알아볼 방도도 없고, 회의 내용 자체가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이상 극비사항이니까.

꼭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울창한 밀림 한가운데에 있는 늪에 빠져드는 것 같은 기분이다.

우스운 사실이 하나 있다면 그런 상황임에도 몸은 편안하다는 거겠지.

"뭔가 오랜만이네."

"뭐가?"

"아니, 학교 끝나자마자 기숙사 와서 저녁 먹는 거."

"그게 뭐가 오랜…… 아, 맞다. 너 맨날 대회반 있다가 새벽에 왔었지?"

철정이 녀석의 말을 들으면 알 수 있다시피, 요 근래 대회 준비 기간 동안 나를 비롯한 대회반 아이들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 같은 꼴로 살았다.

가장 빠른 귀가 시간이 대략 자정 근처였으니, 정말 어지간했지.

그런 의미에서 자의는 아니라지만 이렇게 대회반에 들르지 않고 기숙사에 와서 남이 해준 저녁밥을 먹고 있자니 정말 몸만큼은 편하다.

'어째 내가 말한 걸 실천하고 있는 중인 것 같기도 하고…….'

누워 쉬는 건 관짝에 들어간 다음이면 족하다고 허세를 부리고 다니긴 했는데, 설마 정말로 관짝에 못이 박히기 직전이 돼서야 이런 평안을 느낄 줄이야.

방학 때도 누리지 못했던 힐링을 이런 상황에 하고 있다. 육체적인 쪽으로만 한정되긴 했어도.

솔직히 지금 내 심정은 꼭 생각지도 못한 휴가를 따낸 회사원의 그것이었다. 자의가 아니란 게 문제지만. 무급휴가가 언제 무직해고로 변할지도 모르고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니. 진지한 상황이었다면 내 정신이 이상해졌을지도 몰라. 아니, 진지한 상황이 맞긴 하지만.

당장 내 미래가 걸린 문제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이때 진지하지 않으면 언제 진지할까.

라고 해도, 뭐. 결국 그거다.

마음은 몸의 상태를 따라간다고. 간만에 찾아온 휴식을 떠나보낼 생각이 없다는 듯, 내 몸은 이때를 틈타 여름철 뙤약볕 아래 놓인 초콜릿마냥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좀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몸이 늘어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시간이 넘쳐나니 각 과목의 상반기 과제는 요 며칠 사이에 거의 끝냈고, 그 이후로는 할 짓이 없어 이렇게 이른 저녁부터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

여태껏 고삐에 묶인 우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나답지 않게 풀어진 모습이었다. 오죽하면 김철정이 나를 보고 벌써 죽을 때가 됐냐며 호들갑을 떨 정도였다.

…… 아니, 누가 보면 내가 뭐 자살기도라도 한 줄 알겠다.

녀석의 저런 반응을 보니 괜히 내가 다 찔린다. 얘 눈에는 내가 얼마나 공부와 요리에 미친놈처럼 보였으면 고작 며칠 침대에서 뒹구는 것 갖고 이럴까.

"넌 평소에 널 좀 돌아보고 살아. 세상에 모의고사 앞둔 고3도 일주일 내내 자정 넘어서까지 공부 안 해."

"수능은 좀 그럴만하지 않을까."

"너는 인생 1년 365일이 죄다 수능 D-1이냐?"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릴.

사람이 그렇게 살면 일주일도 안 돼서 노이로제에 걸려 미칠 게 분명하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설득력 진짜 쥐뿔도 없는 거 알지?"

얘는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양치기 소년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인 걸까.

"아무튼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피서 나왔다 생각하고 푹 쉬던가. 대회도 끝났잖아? 주말에 바깥에 놀러가실?"

"딱히 생각 없는데. 그냥 침대에서 안 나오고 하루 종일 자면 그게 휴식 아냐?"

"인생 삭막하게 사네. 사람이 같은 공간만 계속 보고 살면 뇌가 일을 안 해서 썩는다고."

그건 또 무슨 유사과학이냐.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바라봐도 녀석은 천상 웃는 낯으로 외출을 종용할 뿐이었다.

"……가자, 그래."

이걸 가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얘 나름대로 나를 이전처럼 대하기 위해서 노력한 걸 텐데, 그걸 밑도 끝도 없이 거절하기에는 마음이 안 좋다. 거기다 이번 학기엔 제대로 외출을 해본 기억이 거의 없으니, 마침 한 번쯤 나가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다.

'거 참, 그렇게 쉬고 싶을 때는 그 난리를 쳤는데, 정작 한창 달려야 할 때 기회가 오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다. 당면한 상황이 그리 좋진 않지만 계속 같은 일로 골머리를 썩여서 꿀꿀한 기분으로 있는 것 보다야 마음만이라도 긍정적이게 먹고 있는 것이 좋으니까.

'잠깐 나가서 기분전환 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딱히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야 할 일은 진즉 끝냈으니 뭐. 나가는 김에 백화점에 들러서 조리도구 같은 거나 좀 알아볼까. 돈도 쌓이기만 하니 가끔은 쇼핑으로 자본의 순환을 좀…….

─지이이잉

그렇게 간만에 맘먹고 바깥나들이 계획을 머릿속으로 검토하던 그때였다.

평소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잘 울리지 않는 핸드폰에서 들려온 진동.

그 미세한 공기의 떨림을 고막으로 느꼈을 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 내가 쉬자고 마음먹으면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걸.

─류찬혁 학생은 지금 즉시 교장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그 단촐한 한 줄짜리 문장에도 그 법칙은 변함없이 통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

벗어뒀던 교복을 대충 차려입은 나는 서둘러 교장실로 향했다.

─똑똑

"실례합니다."

"들어와요."

여전히 묵직한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니, 교장실 안에는 날 호출한 교장 선생님 외에도 박예휘 선생님이 소파에 앉아 날 기다리고 계셨다.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의 조합이라. 제법 익숙한 조합이라 눈물이 나올 지경이네. 중학교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여기 앉아요."

"아, 넵."

교장 선생님의 손짓을 따라 박예휘 선생님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도 여전히 날이 선 표정이지만 이 사건이 처음 터졌을 때와 비교하면 분명히 예기가 줄어든 얼굴이다.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던 걸까.

"늦게 불러서 미안해요. 저녁은 먹었나요?"

"네. 방금 식당에서 석식 먹었습니다."

"잘했어요. 한창 잘 먹고 커야 하는 시기니까 밥은 잘 챙겨 먹어요."

'사회로 나가서 일을 시작하면 그때는 먹고 싶어도 못 먹을 때가 많을 테니까.'라는 말을 삼키며 표정으로만 표현하시는 교장 선생님이 살짝 무섭다.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나저나 나는 갑자기 왜 부르신 걸까?

"저, 선생님. 혹시 징계 회의 끝난 건가요?"

"징계 회의요? 아. 그건 아직 진행 중입니다. 학생의 처벌에 관한 사항을 고작 며칠 회의하고 정할 순 없으니까요."

징계 회의가 아직 안 끝났다고? 그럼 무슨 이유로 날 부르신 거지?

"거기다 아직 사건이 제대로 끝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뒷일을 정하겠어요. 과정이 계속 변하는데 결과를 먼저 내놔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죠."

"사건이 제대로 안 끝났다고요?"

"아, 혹시 아직 그 영상을…… 박예휘 선생님?"

"예. 류찬혁. 이걸 한 번 봐봐라."

"예? 아, 예……."

박예휘 선생님이 건네주신 태블릿을 받은 나는 이미 화면에 일시 정지 상태로 대기 중이던 영상을 시청했다.

영상의 등장인물은 이전에 봤던 폭로 영상에 나온 사람과 같은 사람이었지만, 내용은 판이했다. 심지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까지 담고 있어서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라?"

대체 이걸 어떻게 알고 있지?

영상에서는 익명의 제보자 다수가 보냈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실 지금 와서 들어도 뭔가 낯설게 느껴지는 이야기다. 거의 30년이 넘게 지난 일인데 그게 잘 기억날 리가 있나.

"70만 원…… 아, 저건 이희정이었나? 다음 건 권오혁이고, 다음은 누구더라……."

이래 봬도 동창회 초대장만큼은 자주 받은 몸이다. 해외에 있던 기간이 길어서 정작 참여한 건 몇 번 안 되지만 이름 정도야 대충 기억하고 있다.

특히 내가 찾아다니면서 사죄한 애들 이름은 기억하려고 제법 애썼는데, 이게 금액까지 전부 기억나는 건 아니라 다른 제보자가 누군지는 잘 알 수가 없다.

"류찬혁 학생. 그걸 다 기억해요?"

"예? 물론이죠.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군요."

아, 교장 선생님의 표정이 뭔가 흐뭇해 보이는 얼굴로 바뀌었다. 박예휘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예리한 날에 거친 숫돌을 수직으로 대고 그어 버린 것처럼 표정에 날이 죽었다.

"아무튼, 그 영상 덕에 학교를 향한 여론이 다시 회복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직 꼬리를 잡은 사람이 여럿 있긴 하지만, 그것도 얼마 안 가 세가 줄어들 것 같고요."

"그 말씀은 혹시……?"

"예. 류찬혁 학생에 대한 징계 수위를 대폭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허.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사실 근신이 휴가니 뭐니 말하긴 했어도 전부 허세에 불과했지. 매번 대담하게 연기하고는 있지만 나도 사람이다, 사람. 당연히 얻은 걸 단박에 잃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장학금이나 기숙사비 지원 같은 건 둘째 치고 대회반 자체의 네임밸류에 먹칠을 했다는 꼬리표가 붙기라도 한다면 국내에서 좀 친다 하는 주방은 사실상 물 건너간 거나 마찬가지라 이래 보여도 제법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그럴 걱정까진 안 해도 되겠네.'

이전에는 잘 나가는 스타 셰프를 보면 '저 사람은 유명해서 좋겠다…… 뭣도 안 남는 파인다이닝을 어떻게 유지하면서 돈까지 버는 거지?'라고 부러워했던 것이 참으로 부질없다.

회귀 전, 후를 통틀어 이렇게까지 유명세를 타본 게 처음이라 유명하단 게 이렇게 힘들단 것도 처음 알았으니까.

'역시 얼굴이 팔린다는 게 마냥 좋은 일은 아니야.'

이전에는 말로만 이해했다면, 이번에는 정말 마음으로 이해했다. 그야말로 뼛속 깊이 새기듯 이해했다.

날 아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일 줄이야. 지금껏 유명하단 이유로 득을 본 적은 그다지 없는 것 같은데 정작 득보다 먼저 찾아오는 게 이런 일이라니. 세상 참 무섭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저희도 회의를 통해 징계 수위를 조절할 예정입니다. 아직 근신은 유지되겠지만 대회반 자체에는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으니,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뭘요. 오히려 우리가 고마워요. 힘들 때 옳은 선택을 해준 덕에 이런 일도 생기게 되네요."

반개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 교장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일단 형식상 지켜야 하는 과정은 있습니다. 이대로 아무 말도 없이 바로 근신을 풀고 대회반으로 복귀하면 기껏 좋아진 인상도 다시 나빠질 거예요. 그러니 그 전에 조금 대외적인 이미지를 조금만 더 가꿀 필요가 있어요."

"대외적인 이미지요?"

대회반의 대외적인 이미지…… 라고 해도, 우리 학교는 딱히 외부와 적극적인 소통 창구를 가지고 있진 않다. 해봐야 학교 홈페이지 정돈데, 거기도 저번 사건 때 다른 사이트와 비교하면 얼마 안 되는 접속량으로 서버가 내려갔으니 대단한 수준은 못 된다.

어차피 우리 학교에 입학하는 사람은 이미 알려진 정보를 보고 오는 사람이라 더욱 그런 걸 수도 있고.

이런 와중에 대외적인 이미지를 가꾼다? 교장 선생님은 어떻게 하려는 생각이신 걸까.

의아한 눈빛으로 교장 선생님을 바라보자, 선생님이 말을 이으셨다.

"반성문을 하나 쓰도록 해요. 작은 과가 있더라도 그런 형식적인 과정을 거치느냐 거치지 않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인상은 곧잘 바뀌곤 한답니다."

"아, 예."

"그리고 그걸 공개적으로 낭송하도록 하죠."

"……예?"

"이번 사건을 계기로 좋은 생각이 났거든요. 저희도 외부와의 소통 창구로 인터넷 방송 채널을 하나 개설해서 사용해볼까 하는데, 그 첫 영상으로 류찬혁 학생의 모습이 담기면 좋을 것 같아요. 뭘, 걱정 마세요. 저희 교사진이 성심성의껏 수정 및 개찬을 도와드릴 테니, 걱정 말고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아낌없이 꺼내도록 하세요."

우리 교장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나는 전혀 모르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