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13화 (213/403)

213. 패스트 체인.-2-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눈에 피로를 주지 않을 정도의 밝기로 켜진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교장실.

접대용 테이블에 놓인 원목 소파에 앉은 안영길은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철을 보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서류철의 표지에 적힌 류찬혁이라는 세 글자.

그렇다. 이 서류철의 정체는 다름 아닌 찬혁의 중학교 생활기록부. 아침 일찍 찬혁의 중학교로부터 팩스로 받은 사본이다.

내용은 이전에 전해 들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회반에 들일 학생은 특별관리 대상. 생활기록부는 입부 전 가장 먼저 살피는 자료 중 하나다.

'다시 봐도 신기해.'

류찬혁의 생활기록부는 총 세 장. 당연히 중학교 3년 동안 바뀐 세 명의 담임이 각각 적은 것이다.

그런데, 찬혁의 생활기록부는 이영길이 아는 평범한 그것과는 어딘가 다른 점이 있었다.

본업은 요리사였다곤 하나 이영길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아이를 가르치며 살아온 베테랑 교사. 당연히 생기부를 본 적도, 쓴 적도 셀 수도 없이 많다.

생활기록부에는 규칙이 있다.

'생활기록부를 쓰는 규칙'이 아니라 '생활기록부 안에 생기는 규칙'이.

아이는 한 번 눈을 떼면 다음에 만날 때에는 괄목상대해야 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인 이상 변하지 않는 부분은 있다.

예를 들자면 평균적인 성적이나 주변 아이의 평가, 담당 교사의 평가 따위가 생활기록부에서 특히 잘 변하지 않는 것 중 하나다.

하지만 가끔은 그게 확 뒤바뀌는 아이도 있다.

작년에는 뒤에서 세는 게 훨씬 빠른 등수에 자리하던 아이가 그다음 해에는 어느새 상위권으로 올라가 있다거나 하는 일이다.

결코 흔한 일은 아니지만, 유난히 지원자가 많은 성심고라면 해에 몇 번 정도는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환경의 변화, 사교육의 시작, 학부모의 종용.

하지만 이런 특이한 변화가 드물게 일어나는 이유는 한 가지. 그건 본인 스스로가 바뀌고자 하지 않는다면 변화 같은 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순적인 일이지'

사람은 언제고 바뀌고자 한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의 자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자신을 꿈꾼다.

하지만 그건 말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게 간단한 일이었다면 이 세상에 금연, 금주, 다이어트 등을 실패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끊임없이 누군가와 경쟁해야 하는 세상. 하지만 남을 이긴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언제 어느 때고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 바뀌고자 생각하여 실제로 바뀐 사람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찬혁의 생활기록부는 그야말로 승리의 기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협동심이 모자라며 말 수가 적음. 교우 관계가 좋지 않음. 협조성이 부족함.'

찬혁의 1학년 때 담임이 생활기록부에 첨언한 문장.

학생의 앞날을 위해 최대한 좋은 말만, 없어도 지어내서 적어준다는 생활기록부에 이런 평가를 남겼다는 건 이 시기의 찬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나타내는 증거였다.

성적은 좋게 말해도 하위권. 그나마 평균 이상인 건 해봤자 체육 정도.

어딜 어떻게 봐도 모범적인 학창생활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있는 숫자와 문장의 나열.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문장에 조금씩 변화가 찾아온다.

2학년 2학기를 기점으로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등수 칸을 차지한 숫자가 보다 작아지고, 끝끝내 3학년 담임교사는 이러한 평가를 남겼다.

'학업태도가 아주 우수하며 수업 협조성이 뛰어남. 그러나 교우관계에는 개선이 필요. 말수가 적어 사회성을 키우는 게 바람직함.'

이후의 찬혁은 이 교사보다 안영길이 더욱 잘 안다.

학업 우수, 교우 원만, 예의가 바르며 어지간한 프로 수준을 뛰어넘는 실무 능력과 팀을 이끌 줄 아는 리더쉽을 갖춤.

이 정도면 생긴 것만 닮은 다른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과거의 자신보다 나아지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그야말로 연전연승을 이루었다고 해도 좋겠지. 훌륭한 쾌거다. 지금처럼 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생각하면 갈채를 쳐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지금보다 분명 어딘가 못난 점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뜻.

지금까지는 그 과거가 류찬혁이라는 이름의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호수의 물을 퍼내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고 그 수위가 낮아지며 가라앉은 과거가 드러나고 말았다.

과연 수년 만에 바깥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과거엔 어떤 사정이 숨어 있을지. 그건 이제 곧 찾아올 찬혁이 그에게 설명해주겠지.

안영길은 부디 그것이 최악의 사태로는 이어지지 않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똑똑

"실례합니다."

마침 찻물을 끓이려 일어나던 찰나, 교장실의 문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온 찬혁의 목소리에 안영길은 착잡해진 표정을 가다듬었다.

교사란 학생의 기둥. 과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좋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들어와요."

안영길의 부름에 찬혁이 문을 열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그런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영상의 게시일은 이틀 전. 그리고 영상에 쓰인 글의 게시일은 거기에서 사흘 더 전. 그리고 바로 어제부터 소식이 빠른 학부모님 몇 분의 연락이 왔었습니다. 미디어라는 건 굉장하지만, 가끔은 무섭기도 하네요. 이렇게 빨리 퍼질 줄은 몰랐거든요."

"……."

"학교 홈페이지도 몇 차례 다운 됐다고 하더군요. 저는 컴퓨터는 잘 모르지만 다른 선생님들 말을 들으면 꽤 심각한 것 같네요. 지금은 소식의 진위 조사 중이라는 말로 어떻게든 시간을 벌었지만, 이 이상 시간을 끌면 해결은 더 힘들어질 겁니다."

말 그대로 안팎으로 공격을 받고 있단 소리다.

이거 참, 안 그래도 학기 초는 학교도 바쁘게 돌아가는 시즌인데, 하필이면 이럴 때 사건이 터져서 선생님들을 더욱 바쁘게 만들고 있다니.

"죄송합니다."

정말 이 말 외에는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류찬혁 학생이 미안할 일은 아니에요. 물론 책임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이 일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건 전후 사정 파악도 하지 못하고 학생을 지켜주지도 못하는 저 같은 교사겠죠."

옅은 한숨을 내뱉은 교장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다만 이 소식이 이미 널리 퍼진 이상,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선 확실한 사정 파악이 가장 필요한 시점입니다. 저희가 따로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류찬혁 학생의 설명을 듣고 싶어요. 류찬혁 학생?"

"예."

"가능하다면 이 사태에 대해, 정확히는 영상에 나온 제보에 대해 설명해 줬으면 합니다. 이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 만약 사실이라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그걸 상세히 알려줘야 저희도 류찬혁 학생을 보호해줄 수 있어요."

교장 선생님의 말에 나는 무어라 답변을 돌려줄 길이 없었다.

문제는 이거다. 어떤 일이 있었든 내가 과거에 그 영상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행동을 했단 건 사실이고, 그건 학교라는 시설에서는 특히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라고 그냥 그 시절을 유야무야 덮어 버릴 생각은 아니다.

그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실제로 일이 일어났음에도 성심고가 나를 보호하겠다고 나선다면 성심고가 매우 곤란해지리라는 건 자명한 일이다.

합당한 이유가 있는 폭력도 지탄하는 사람은 분명 있을 진데 그런 것도 없는 나를 학교가 감싼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비난을 듣겠는가.

"……."

나는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입을 달싹였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교장 선생님에게 숨겨진 사정까지 모두 설명하고 학교의 보호를 받느냐.

아니면 잠잠히 모든 걸 사실이라 인정하고 학교의 징계를 받느냐.

극단적인 양자택일이다.

전자를 선택하면 나에게만 향할 지탄을 학교가 나눠 받아 내 부담은 줄겠지만 학교와 학생이 분명 피해를 볼 것이고, 사건이 좀 더 커질지도 모른다.

후자를 선택하면 학교는 무사하겠지만 내 꼴이 말이 아니게 되겠지. 내가 여태껏 쌓은 커리어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전보다 분명 가까이 다가왔다 생각했던 꿈을 다시 저 멀리 떠나보낼지도 모른다.

그건 싫다. 싫지만…….

"……사실이에요."

"……다시 한번 말해보겠니."

"그 영상에 언급된 내용, 대부분 사실이 맞습니다."

나 한 사람의 꿈을 위해 이 학교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꿈에 오점을 남길 수는 없다.

그런 선택지를 고르는 건 내가 과거에 했던 짓을 되풀이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러면, 내가 여태까지 한 모든 일이 아무 의미도 없게 되고 만다. 그럴 수는 없다. 결단코.

"이 일로 징계를 받게 되면 쉽게 넘어갈 수는 없을 거다."

"……."

"대회반에서 나가야 하는 건 물론이고, 회의 내용에 따라선 정학을 당하거나 자칫 잘못하면 강제전학, 혹은 퇴학까지 당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말 괜찮니?"

괜찮다. 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이 학교에 붙어 지금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쏟았는데, 이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된다면 피눈물을 쏟고도 모자랄 만큼 가슴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예. 괜찮아요."

어쩌겠는가. 먼저 남의 마음에 흉을 새긴 건 나다. 설령 직접 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그 모든 걸 멈출 수도 있었을 위치에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나에겐 그만한 도의적 책임이 분명히 있다.

어린아이에게 무슨 책임이냐 싶겠지만, 피해자 또한 어린아이다.

어른에게는 어른의 세계가 있듯, 아이에게는 아이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어른도 쉬이 참견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세계는 폐쇄성이 짙다. 이건 아이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학교라는 하나의 건물. 평방 30평 남짓의 교실이 어린 학생에게는 세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공간이 된다. 그리고 그 작은 세계에서 생긴 사건은 그 사람의 평생을 뒤쫓는 족쇄가 된다.

누군가에게 족쇄를 단 사람이, 자기한테 달린 족쇄를 멋대로 풀 수는 없는 법이다.

거기다 만약 이 기회에 그 족쇄를 어떻게 풀어낸다고 하더라도, 사실 그건 풀린 게 아니다. 그 족쇄는 풀린 척 내 뒤를 졸졸 쫓다가 더더욱 몸집을 불려 다시 내게 들러붙을 테니까.

"……그렇다면, 저도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네요. 그게 류찬혁 학생이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라면, 좋습니다. 이만 나가보도록 하세요. 근신은 유지. 이후 사항은 회의 후 통보될 겁니다. 이만 가도 좋아요."

"예."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은 교장 선생님의 축객령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마 후회는 분명 하겠지. 하겠지만, 적어도 끝 맛이 나쁜 후회보다는 후련하게 털어낼 수 있는 후회가 더 낫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 생각은 그렇다.

"자, 이제 어떡한다……."

이거 참,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싶었는데 앞날이 다시 불투명해지고 말았다.

인생 진짜 요지경이다.

***

"……후."

안영길은 교장실을 나서는 찬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다.

그는 찬혁이 무언가 변명이라도 하거나, 혹은 도움을 구하진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찬혁은 놓치기 너무 아까운 인재다. 설령 변명이라도 앞뒤가 맞으면, 그리고 반성의 여지가 있으면 어떻게든 보호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상황이 영 다르다.

변명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성은 한다.

담담히 자신이 저지른 일을 받아들인다. 어른에게도 어려운 일을 이제야 18세가 된 아이가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해낼 줄이야. 다른 의미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곤란하게 됐어.'

본인은 무슨 징계를 받든 납득할 셈이다.

외부는 찬혁의 징계를 종용하고 있다.

외부와 본인의 이해가 일치해 버린 이상, 정말로 무언가 액션을 보여주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다. 차라리 저토록 어른스럽지 않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랬다면, 찬혁은 지금 같은 사람이 아니었겠지.

참으로 골머리를 썩이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이게 다 뭐라고……."

안영길은 핸드폰을 들어 올튜브를 실행했다.

여전히 그의 폰에 남은 이력이 문제의 영상을 강조하여 보여준다.

"……응?"

그런데, 어째 강조된 영상이 하나 더 있었다.

같은 개인방송인이 올린 영상. 그 제목을 본 안영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추가 제보라고?"

실시간 인기 영상 순위에 올라갔던 영상의 후속 제보가 들어왔다는 제목.

참으로 전형적인 어그로에, 아직 이런 방면에서는 면역이 부족한 안영길의 손가락이 저절로 그 영상의 제목을 탭했다.

그리고 잠시 후, 몇 분의 시간이 흐른 뒤, 재생시간이 끝나 까맣게 물든 화면 앞에서 안영길은 저도 모르게 폭소를 뱉었다.

"하, 하하하하하!"

찾아냈다. 이번 사건의 여파를 줄이고 찬혁을 지킬 방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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