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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10화 (210/403)

210. 신학기.-4-

대회준비를 시작한 지 어언 보름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

보름. 15일. 2주. 약 360시간.

누군가에겐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는 시간이지만, 적어도 정도준을 비롯한 대회반 1학년 일행에게는 그야말로 끝나지 않는 영겁처럼 너무나 기나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막 팀을 나누고 연습을 시작했을 때, 최초 그들이 한 것은 메뉴의 구상이었다.

전시와 라이브는 다르다.

만드는 과정이 아름다우며 멋들어진 요리가 있고, 만든 다음에 보아야 보기 좋은 요리가 있다. 물론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되겠지만.

그런 조건과 더불어 모양의 유지력이나 맛 같은, 또 다른 관점에서 중요한 요소를 만족하는 메뉴를 고안하는 게 상상 이상으로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라는 것을 1학년 일행은 새삼스레 깨달았다.

"여긴 그 메뉴 말고 이걸 넣어보는 건……."

"아, 난 반대. 다음 메뉴랑 안 맞아. 꼭 바꾸고 싶으면 그것도 같이 조정하는 게……."

"공개된 심사위원 알레르기 식재 체크 리스트 잘 확인하고……."

기실, 1학년 일행은 섭내들이 하는 대화의 절반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딱히 고학년이 그들을 따돌렸기 때문이 아니다. 단순한 실력차이 때문이었을 뿐.

고학년은 말하면 얘들도 대충 이해하겠지 싶은 안일함에 회의 진행을 너무 가속하는 와중, 저학년은 마치 수업시간 도중 이해하지 못한 내용에 대해 손들어 묻기를 꺼려하는 학생처럼 쉽사리 질문을 꺼내지 못했다.

여기서 이들의 재능에서 비롯되는 나쁜 점이 다시금 발휘됐다.

설령 구두로는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막상 머리를 박다 보면 몸이 제 요량껏 이해를 시작한다는 것이 말이다.

그건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1학년 일행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머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몸이 따라잡아주는 건 좋지만, 정작 그 과정에 드는 체력이 어마무시하게 소진되었으니까.

거기다 고학년 쪽도 체력으로는 어디 가서 밀리지 않는 강골뿐이었다.

대회 일정이 발표된 뒤부터 그들에게 휴식이란 사치스런 단어로 전락했다.

방과 후부터 시작하여 밤늦게까지. 아슬아슬하게 막차가 끊길 시간이 돼서야 끝나는 연습. 심지어 기숙사에 사는 인원은 막차는커녕 자정이 넘은 다음에야 끝날 때도 있었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학교 실습실에 나오는 게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고, 하루하루 날자가 지나갈수록 몸은 오장육부 부위를 가리지 않고 무게추를 매단 듯 나날이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대회반이 거저먹는 자리가 아님을 그들은 새삼 실감했다.

한 발 한 발. 아니. 아예 미끄럼틀을 타고 지옥의 구덩이 아래로 하루하루 낙하하는 것 같은 일상을 보낸 지 벌써 보름.

이미 감정의 기복이 올 단계는 한참 전에 지났을 만큼 지친 1학년 일행이었으나, 그런 와중에도 그들을 경탄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 있었다.

"지영아, 어제 드라마 봤어?"

"봤어봤어! 와, 어떻게 사람 얼굴이 그렇게 잘생겼지?"

"그래? 난 스토리에 집중해서 잘 모르겠던데."

"그건 님이 그 급에 계시니까 그런 거고요…… 아, 그러고 보니 찬혁이 TV 나왔었지? 찬혁이 너 혹시 방송국도 가봤어? 연예인 봤어?"

"내가 못 봤다고 한 번 더 말하면 백 번이다. 당장 박종원 선생님 말고 다른 MC도 못 봤는데 무슨 방송국이야."

"박종원 봤으면 됐지. 뭘 더 바라."

"그러는 지는 조수아 사진 없냐고 제일 먼저 들이댔으면서."

"아니 그건……!"

오늘도 어김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실습실로 출근한 1학년 일행은 여느 때처럼 그들보다 먼저 실습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들의 선배를 황망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떻게 저 사람들은 저렇게 쌩쌩한 거야……."

"왜지…… 분명 똑같이 연습하고 있을 텐데……."

1학년 일행을 충격에 빠트린 것은 연습이 시작되기 이전인 2주 전과 비교해도 흐트러짐이라곤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선배들의 모습이었다.

'인간적으로 저게 말이 되나?'

말이 똑같은 연습이지,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1학년도 연습 때 요리에 참여하긴 하나 그것도 결국 보조에 그치는 수준.

당연한 이야기지만 재료의 손질이나 비교적 간단한 조리를 맡은 1학년들과는 달리 그들은 보다 난도가 높은 조리에 더해 개인이 맡고 있는 업무의 양 또한 훨씬 많다.

당연히 같은 시간 동안 연습하면 연습할수록 더 빨리 지쳐야 하는 건 당연히 그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정작 고학년은 연습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는 듯 체력과 여유가 가득하다 못해 넘쳐흐를 지경이다.

연습을 대충 한 것도 아니다.

연습량이 적은 것도 아니다.

땀으로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한 끝에 조리복 위로 소금이 일 정도의 연습을 매일같이 하고 있다.

심지어 부장인 찬혁의 경우엔 누구보다 늦게까지 남아 실습실을 점검하고, 누구보다 일찍 와서 재료 등의 연습 준비가 확실히 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역할마저 도맡고 있다.

이쯤 되니 정도준은 과연 찬혁을 비롯한 그의 선배들이 과연 자신과 같은 인간이 맞긴 한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의문과 피로로 뒤죽박죽 잡탕 범벅이 되어 버린 심신.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심정 사이에서 싹을 틔운 희망이 있다.

'역시, 대회반에 오길 잘했어.'

지옥이 따로 없을 만큼 힘들고, 선배란 양반들은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현장은 이곳보다도 더 지옥 같다.

거기다 정상頂上에 있는 사람이 꼭 정상正像이란 법은 없다.

'왜, 위인은 다들 어딘가 또라이 같은 기질이 있다고 하니까.'

아마 자신의 선배들도 그런 타입의 인간인 것이리라.

특히 부장이란 양반은 그중에서도 한술 더 뜨는 정신 나간 또라이일 수도 있다.

그 기이한 믿음에 위안을 받는 것 같은 요상한 기분을 느끼며 정도준은 오늘도 조리복을 입는다.

***

요즘 들어 대회반의 분위기가 좋다.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뭐, 애당초 불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지만 1학년 후배들의 단결력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게 이전보다 훨씬 나아진 느낌이 들었다.

'……아.'

생각해보니 이런 생각을 작년에도 했던 것 같은데.

작년에는 저 후배들 자리에 우리가 있었지만.

'역시 사람 마음 합치는 데에는 같은 목표가 생기는 것만 한 게 없지.'

왜, 누군가 이르길 '어떤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면 그 사람이 욕하는 사람을 함께 욕하라.'고 하지 않던가. 조금 쓰임새가 다른 것 같긴 하지만 대충 뜻 통하면 됐지 뭐.

아무튼, 대회라는 공통된 목표 아래에 모두가 다 함께 고생하다 보니 후배들 사이의 마음에 벽도 조금이나마 얄팍해진 것 같다.

아니면 계속 벽을 세우고 있을 체력마저 연습에 사용하기 위해 온존하고 있을 뿐인지도.

그건 그것대로 좋다. 이른바 말하는 해병대식 훈련의 골조가 그런 거니까. 전우애를 기르려면 그보다 나은 방안이 없다고 했나.

어떤 사람이든 자신이 갇힌 알껍데기를 부수고 나와야 세상을 맞이하는 법. 대회라는 이름의 충격이 그들의 알껍데기에 균열을 만들어 자극했으니, 그걸 깨고 나오는 건 본인에게 달린 일이다.

마음의 문제는 이쯤이면 됐다 치고, 이제 실무의 영역으로 넘어가 보자.

내가 판단한 바에 따르면, 지금 우리의 페이스는 딱 좋은 궤도를 달리고 있다.

연습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엔 잘 적응하지 못해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이던 후배들도 지금은 제법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 눈에 보인다.

함께 요리를 할 때 중요한 건 몸이 아니라 머리를 쓰는 것.

내 팀이 앞으로 어떤 과정을 수행할지, 나는 그에 맞춰서 어떤 역할을 해내야 할지. 머리를 굴려 그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앞서 움직이는 센스가 필요하다.

그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에 따라 메뉴 하나를 더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가 정해진다.

요 보름간의 연습은 팀이라는 연계된 집단의 톱니바퀴가 되는 방법을 익히게 하는 겸, 나 같은 고학년 라인이 후배라는 새로운 부품에 대한 호환성을 기르기 위한 훈련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훈련을 슬슬 끝마쳐도 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톱니가 비로소 모양을 갖추고 다른 톱니바퀴와 톱니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직 기름칠이 안 되어 종종 삐걱대긴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약간의 기름칠과 손질만 가미되면 충분히 하나의 유기적인 집단이 될 수 있으리라.

그런고로.

"자, 다들 주목."

슬슬 피치를 올릴 때가 됐다.

"연습 시작한 지도 벌써 보름인데, 전달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각 팀 메뉴회의가 막 끝났거든요. 그래서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대회에 대비한 연습을 시작해볼까 합니다."

라이브 팀은 시간제한을 두고 각 메뉴가 최대한 빨리, 최대한 완성도 높게 요리를 만듦과 동시에 퍼포먼스를 섞는 연습.

전시 팀은 라이브 팀과 마찬가지로 시간제한을 두되 코팅까지 마치는 연습.

모든 상황을 최대한 대회 현장의 설비와 규칙에 맞춰서 연습을 진행한다.

대회반에 있는 설비를 일부러 쓰지 않는다는 제약이 있는 상태로 진행하는 연습. 모르긴 몰라도 분명 여태까지 해온 연습보다 힘들면 힘들었지 쉽진 않으리라.

'거기다 메뉴도 조금 복잡한 게 아니니까…….'

작년과는 달리 우리가 입학한 뒤로 대회반의 전력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최초의 기회인 만큼 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다. 내 입에서 이거 무리 아닌가? 싶은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극한까지 우리의 역량을 쥐어짤 예정이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조금 폭주가 심한 것 같은 느낌도 있긴 한데…….

'뭐, 다들 이해하겠지.'

혼자 고안한 레시피라면 모를까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것이지 않은가. 어딜 어떻게 봐도 불합리한 구석이라곤 단 1도 없는 완벽한 플랜이 아닐 수 없다!

"이제까지 연습한 것보다 훨씬 힘들긴 하겠지만, 다들 잘 따라와 주리라 믿습니다."

이 순간, 나는 내가 미처 염두하지 못한 사실이 있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대회용 레시피를 결정하는 작금의 사항에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거부권조차 없는 존재가 있단 사실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

무엇이지? 지금 저 부장이란 양반 입에서 대체 무슨 망발이 튀어나온 것이지?

'지금보다…….'

'더…….'

'힘들어진다고……?'

그것도 훨씬?

1학년 일행은 저 거대한 외우주의 두족류를 제 눈으로 직시하기라도 한 것 마냥 동시에 같은 감정을 느꼈다.

동공이 풀리고, 조리복 매듭을 고치던 손에서 힘이 빠진다.

앞으로 닥칠 끔찍한 미래를 상상한 몸뚱이는 무릎을 부들부들 떠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대신 표명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저 레시피를 짜는 데에 딱히 도움을 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이 너무 많아지는 거 아니냐며 대들기엔 이미 저 선배라는 작자들이 맡는 업무량이 훨씬 더 많이 늘어났음을 안다.

반박도, 거부도, 그렇다고 순순히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 머리 위와 아래가 동시에 꽉 틀어막힌 것 같은 기분에 그들의 가슴이 제 몸뚱이의 주인을 위한 곡소리를 읊는다.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력감 속, 1학년의 마음은 기적적으로 하나가 되어 한 명의 희생양을 향해 쏘아졌다.

'저…….'

'미친…….'

정신 나간 또라이 양반.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울분을 푸는 방법이라곤 오직 그것뿐이 없었기에.

그렇게, 찬혁은 본의 아니게도 1학년 일행의 단결을 위한 희생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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