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신학기.-3-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도준은 한 가지 꿈을 갖고 있었다.
그 꿈이란 다름 아닌 성심고 대회반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정도준은 얼마 전 그 꿈을 실제로 이루었다. 대회반을 선발하는 시험에서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피, 땀, 눈물. 꿈을 이루기 위해 감내한 고통과 인내의 시간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정도준이 그만한 노력을 한 데에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만한 노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회반에 대한 열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도준은 입학시험에 앞서 성심고를 조사했고, 그 도중에 대외적으로 널리 퍼진 대회반의 이미지를 접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프로 지망생인 유소년 축구부 아이가 완벽한 훈련과 시설을 자랑하는 프로 유스 팀의 정보를 여과 없이 그대로 접한 것과 같았다. 동경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동경이야말로 정도준의 열정을 불태운 연료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요즘 들어 정도준은 자신의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자신도 쉬이 깨달을 만큼 실감하고 있었다.
"…… 뭔가, 상상하고 달라."
정도준은 대회반에 들어오기 이전, 대회반 소속 학생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대회반에 들어갔을 정도면 다들 엄청난 수준의 요리사겠지.
일분일초, 아마 깨어나서 잠에 드는 그 모든 순간을 요리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요리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지 않을까.
아마 그들은 분명 자신조차 놀라 뒤집어질 정도로 노력의 화신일 것이다.
"야야, 아니 장난 좀 그만하고 연습이나 해."
"에이, 혁이 공부하는데 어떻게 시끄럽게 요리연습을 하고 있어? 방해되게."
"그럼 장난은 방해가 안 되냐…… 게다가 연습은 창민이나 1학년 애들도 하고 있잖아. 시끄러워도 상관없긴 한데 하나만 해라 하나만."
"그럼 내가 애들 연습 끝내고 올게."
"네가 장난을 멈추는 게 더 빠르다는 생각은 안 해? 난방은 여기가 훨씬 잘 돼서 여기로 온 건데, 다음에는 그냥 방에나 박혀야지……."
"부장이 방에만 박혀 있게? 실습실 시설관리 1차 책임자는 부장이잖아?"
"…… 하, 젠장."
방과 후 들른 실습실에서 몇 가지 창작 레시피를 연습하고 있던 정도준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선배가 돼선 이 좋은 시설을 두고 한다는 게 저런 장난스런 대화라는 점이 못마땅했다.
물론 연습을 하는 선배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소수였고, 대회반 3학년은 정말 있는 사람은 맞는 건지 실습실에 얼굴을 내민 게 대체 며칠 전이었나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이다.
그 와중에 부장이라는 사람은 조리대 위에 교과서도 아닌 것 같은, 아니 그 전에 한글로 쓰이지도 않은 책을 잔뜩 쌓아두고 공부 중.
공부를 하는 게 나쁜 일이라는 건 아니지만, 정도준이 동경한 대회반의 모습과는 상당히 어긋나는 점이 많았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첫 미팅 후 어언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시점.
정도준은 환상이 깨진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점차 깨닫기 시작한 느낌이 들었다.
'나, 잘 들어온 거 맞겠지?'
분명 대회반에 들어와서 득을 본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비싼 등록금, 최고급 시설, 풍족한 재료, 수업에서는 듣지 못한 선생님들의 속성 강의.
그 외에도 여러 혜택은 좋다는 말만으로는 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 훌륭했지만,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가 '이건 아니다.'라고 되뇐다.
아직 다른 1학년 아이들과는 통성명 정도만 나눈 애매한 관계.
과연 이게 자신이 원하던 대회반 생활인가, 마음속에 싹튼 의문이 점점 줄기를 키워가던 그때, 그 사건은 시작됐다.
어느 날, 대회반 담당 교사 중 한 명인 박예휘가 실로 오랜만에 대회반 전원을 모았다.
여태껏 경험이 있어 적당히 눈치를 챈 2, 3학년 상급생들과, 반대로 갑자기 무슨 일인지 몰라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신입생들.
총 15명의 학생을 앞에 둔 박예휘가 평소처럼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담담히 고한다.
"대회 일정이 잡혔다. 개최일은 6주 후. 다음 달 중순쯤이다. 부장."
"네, 선생님."
"작년이랑은 다르게 이번에는 3학년도 같이 참가한다. 무슨 뜻인지는 알지?"
"네."
"좋아. 맡기마."
'대회?'
몇 가지 이해 못할 말이 섞여 있긴 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그들의 이름값을 할 시간이.
고조되는 흥분과 기대. 대회라는 것을 처음 접하는 정도준에게 있어 이 소식은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슴속 한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불안감이 그 불을 꺼트리려 든다.
자신이야 그렇다 치지만 과연 여태껏 못 미더운 모습만 보여주던 선배들. 그리고 팀웍을 기르기는커녕 아직 긴 대화도 몇 번 나눠본 적 없는 아이들과 잘 해낼 수 있을까.
"괜찮…… 겠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감정을 미처 떼어놓지 못한 채, 그들은 대책회의를 이유로 일찍 자리를 파하게 됐다.
***
"드디어 잡혔네요, 대회 일정."
"그러게. 난 올해까지 꽝이면 어쩌나 싶었다니까?"
대회반이 해산한 뒤, 나와 효민 선배는 대회반 전용 휴게실에서 따로 모임을 가졌다.
모임이라고 해봤자 단 두 명밖에 없는 단촐한 인원이지만, 어차피 이 상황에 사람이 많아 봐야 크게 의미도 없는 것 같고.
모인 이유는 당연히 대회 때문이다. 현 부장으로서 전 부장인 선배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았으니까.
"안 그래도 공부다 뭐다 바쁘실 텐데 괜히 불러서 죄송하네요."
"됐어, 됐어. 귀여운 동생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지."
"그건 기분 나쁘니까 다른 호칭으로 좀 부탁드리고요."
"쌀쌀맞아라."
한 차례 큭큭 댄 선배가 책상에 턱을 괴는 것을 보며 내가 말을 이었다.
"올해는 3학년도 같은 대회에 참석하게 됐네요."
"사실 이게 정상이야. 작년이 좀 유별난 경우였잖니."
"하긴, 대회 경험도 없는 애들을 데려다 바로 현장에 투입하는 건 경우가 없는 일이긴 하죠."
그때는 3학년 선배들의 대회 불참 때문에 1학년이 자체적으로 팀을 맺어 출전하게 됐으니까. 지금 다시 생각하면 용케 우승했다 싶다.
"그래도 저흰 운이 좀 따라준 편이었어요. 팀웍 쌓는 게 크게 어렵진 않았으니까."
"…… 1학년들, 아직도 서로 어색해 해?"
"예. 근데 뭐, 그럴 수밖에 없죠."
내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거다.
지금 1학년들은 자주 나와서 연습을 하긴 해도 각자 따로 노는 느낌이 강하다. 모처럼 여럿이 사용하는 주방에서 혼자서만 요리 연습을 하고 있다.
아마 1학년 애들이 각각 다른 반에서 뽑혀 온 탓인 것 같긴 한데, 의외로 이게 평균적인 모습이라고 한다.
"너네가 너무 일찍 친해진 거야. 원래는 서로 손발 맞추는 것도 몇 달은 해야 좀 유기적으로 돌아가는데."
"선배 때도 그랬어요?"
"그렇대도. 난 한 달 동안 대회반 오면 아무 말도 안 하고 지냈잖아."
정말로? 그건 진짜 믿음이 안 가는데.
내 기수는 그럴 이유가 딱히 없었다. 여준기나 송지영은 그렇다 쳐도 안창민이나 백예은, 그리고 나는 같은 반에서 왔었으니까.
게다가 워낙 친화력이 좋은 녀석이 있으니 친해지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만난 지 보름도 안 돼서 단체 톡방을 판 기억이 있으니까.
아무튼, 그런 1학년들을 위해 나도 아무 일도 안 한 건 아니다.
일부러 독서실을 놔두고 실습실까지 와서 시끄러운 조리소리를 감내하며 열 개를 넘어가는 과목의 과제를 해치우던 것도 혹시나 모를 불상사를 예방하는 겸 그들이 나를 좀 더 친근하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고, 마침 백예은 녀석은 눈치가 빨라서 내게 잘 맞춰줬지만, 결과는 딱히…….
한 달이 거의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도 그들 사이에 이렇다 할 관계 변화는 눈에 띄지 않는다.
"구심점이 없는 게 문제네."
"아무래도 그렇죠."
우리 때는 백예은이 애들을 뭉쳐놓으면 내가 어떻게든 방향을 제시하는 걸로 서로 한 뭉치의 눈덩이가 되어 같은 방향으로 굴러갈 수 있었지만, 지금의 1학년들은 눈덩이가 아니라 대충 쌓인 눈더미 같다. 바람이 불면 순식간에 흩어질 것 같은 눈더미.
"근데 당장은 그래서 더 좋을지도 몰라."
"예?"
"3학년이랑 2학년이 1학년을 각 팀으로 갈라서 조수로 데려가야 하잖아."
어차피 갈라져서 연습할 거, 어정쩡하게 팀웍을 쌓은 다음 갈라져서 기껏 기른 팀웍이 초기화 될 바에야 차라리 아예 백지 상태인 게 낫다는 것이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이런 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야."
그보다는. 이라고 말을 끊은 선배가 뒤이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킨다.
"지금 부장이 해야 할 일은 다른 거."
"다른 거라뇨?"
"당장 구심점이 없는 애들의 구심점이 되어주는 거."
"그거야 알고 있긴 한데요."
"찬혁이 너라면 방법도 잘 알 거 아냐."
"…… 뭐, 그렇긴 하죠."
구심점이 된다는 것은 다르게 풀이하면 단체 사이에서 권위를 세운다는 뜻이다.
리더는 그 말 그대로 남들을 이끄는 존재. 권위가 없는 리더는 그 누구도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권위를 세우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양 떼를 모는 개가 짖고 밀치며 자신의 존재를 양 떼에게 각인시키듯이.
고삐를 잡은 마부가 올바른 길로 말을 채찍질하듯이.
철새 무리를 이끄는 선두의 새가 특출난 방향감각으로 무리를 견인하듯이.
인간의 무리가 이런 예시와 아주 똑같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우리 같은 현장에서 발로 뛰는 계열의 사람들에게는 그만한 방법도 없다.
"그러니까 일단 보여줘 봐. 대회반에 들어올 정도면 자기가 어떤 사람을 따라야 하는지 정도는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
다음 날. 어제 들은 통지에 따라 열다섯 명의 대회반 학생이 전부 실습실에 모였다.
전원이 모인 자리. 홀로 앞으로 나선 찬혁은 전날 박예휘를 통해 받은 참가자용 대회 안내서를 나눠주곤 대회 요강에 대해 설명했다.
경기도 일산에서 열리는 다기업 공동 주최 경연대회.
종목은 전시와 라이브. 전시는 2학년, 라이브는 3학년이 주관하며 1학년은 서로 다른 팀으로 갈라져 조수 역할을 맡는다.
작년에는 푸드 엑스포라는 이벤트가 있어 이루어지지 않은 조합이지만, 이게 대회반의 기본 출전 골자다.
2학년과 3학년은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기에 대부분의 설명 시간은 1학년의 질문과 답변 등을 위해 쓰였다.
"저, 그럼 팀은 어떻게 나누어지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만약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팀이나 체험해보고 싶은 종목이 있다면 본인이 고르면 되는데……."
선뜻 나서는 이가 없자 말꼬리를 흐린 찬혁이 뒤이어 말했다.
"당장 고르지 못하겠으면, 일단은 내가 팀을 지정해줄게. 연습이 어느 정도 진행된 뒤에는 팀을 바꿔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으니까, 만약 팀을 바꾸고 싶으면 최대한 일찍 와서 말할 것."
그 말을 끝으로 찬혁은 1학년들을 각자 저마다의 팀으로 배정했다.
"강백도. 라이브 팀."
"오하림. 전시 팀."
"차예지. 라이브 팀."
"정도준. 전시 팀."
"김아라. 라이브 팀."
자신이 속한 팀이 당장 어떤 연습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1학년 일행이 눈을 깜빡이고 있을 때, 배정을 끝마친 찬혁이 손뼉을 치며 외쳤다.
"자! 배정 끝! 지금부터 연습 시작할 테니까 1학년은 얼른 준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