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신학기.-2-
"언젠가 너는 성심고등학교에 입학할 거다."
소년 정도준은 그가 아직 한글을 막 뗀 어린아이일 적 그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 이라고 해도 고작해야 매일 아침마다 뇌가 리셋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기억력을 갖고 있다는 영유아보다 조금 더 나은, 해봤자 유치원에 막 들어갔을 때쯤의 어슴푸레한 잔상과도 같은 기억이지만.
사실 그 대화가 오간 것이 언제인지도 잘 알 수 없는 처지다. 그만큼 옛날 일이었기에.
하지만 지금도 그 이름 하나만큼은 마치 두개골 안쪽에 끌로 새겨놓기라도 한 것 마냥 선명하다.
성심고등학교. 더 정확한 이름은 성심조리과학고등학교.
이름을 들으면 알 수 있다시피 성심고등학교. 줄여서 성심고는 조리전문 특성화 고등학교다.
'그치만 그 말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학교지.'
성심고는 조리전문 특성화 고등학교. 그중에서도 감히 최고라는 말을 붙이기에 모자람이 없다. 아니, 오히려 최고라는 단어가 모자람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국내에서는 단연코 최고. 세계를 둘러보아도 성인을 대상으로 한 유명 요리학교 몇 곳을 제외하면 가뿐히 정상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는 학교다.
반대로 말하자면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교육하는 요리 교육기관 중에서는 따라잡을 곳이 없는 최고라는 뜻.
이건 단순히 이 학교의 오만이나 학생을 끌어모으기 위한 과대광고 따위가 아닌, 실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교사진의 엄청난 경력, 요리대회에서의 수상이력, 이 학교를 졸업한 인재들에 대한 업계에서의 평판. 그 모든 것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다.
그 외에도 최소 해에 한두 사람은 미래의 스타셰프를 키워낸다는 캐치프레이즈까지.
일례로 2년 전, 17세의 나이에 국가대항전에서 승리를 따내어 한국팀 우승의 포석이 된 안효민 등의 인재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뭐, 요즘 먹히는 사람은 따로 있지만…….'
아무튼, 소년 정도준의 아버지는 어째서 자신의 아들이 그런 엄청난 요리학교에 입학하길 바랐는가. 아니, 입학할 것이라 확신했는가.
그건 생각보다 단순한 이야기다. 그의 아버지가 요리사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쪽도 성심고와 같이 평범한 요리사는 아니다.
한 때 화랑호텔의 주방에서 현장을 책임지던 부 총주방장 출신의 요리사이자, '아직 현장에서 더 일하고 싶다.'는 이유로 약속된 총주방장의 자리를 마다하고 자신의 레스토랑을 차려 이전의 성공 이상으로 승승장구를 이어나가고 있는 요식업계의 엘리트.
그것이 바로 정도준의 아버지다.
또한 그는 이전 성심고를 졸업한 성심고의 졸업생이기도 했으며, 자신의 아들이 고되더라도 자신이 성공한 길을 그대로 따라 걸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이상의 설명으로 알 수 있다시피, 그는 자신의 바람을 소원으로만 간직하는 타입의 인간은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 정도준은 그런 아버지에게 어릴 적부터 꽤나 혹독한 영재교육을 받아온, 그야말로 준비된 인재였다는 뜻이다. 그것도 그와 비슷한 과정을 밟은 학생이 제법 많은 성심고에서도 특출난 수준의 인재로 꼽힐 만큼.
그런 성장과정을 거쳐 정도준은 그런 아버지의 바람대로 올해 2021년 제41기 신입생으로서 성공적으로 성심고에 입학했다.
정해진 레일이 깔린 삶. 누군가는 불행한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다행히도 정도준은 자신의 삶이 결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교육 탓인지, 아니면 본인의 천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도준은 요리사의 길을 걸어 성공하고 말겠다는 소망과 그에 걸맞은 굳센 각오를 가진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렇기에 정도준은 '입학'이라는 아버지의 목표와는 또 다른 자신만의 목표를 갖게 되었다.
입학했다면, 그중 최고가 되어 보이겠다.
그리고 참으로 시의적절하게도 성심고에는 그런 최고의 척도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대회반.
성심고를 대표하여 국내, 국외를 불문하고 명망 높은 요리대회라면 언제든 출전하길 마다하지 않는 성심고 내부의 학생단체.
다르게는 성심고의 얼굴이라고도 불리며 각 학년 당 오직 다섯 명만 선출되는, 15인으로 구성된 성심고의 정상.
학교 내의 거의 대부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요리 실력을 연마하기 위한 일이라면 아주 약간의 제약 외에는 모든 것이 가능한 특권을 가진, 그야말로 그들만의 리그에서 노는 이들.
높은 이름값만큼 그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사투는 피와 불꽃이 터지는 치열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아니, 베이면 피보고 화구에선 불 나오니 진짜 터지긴 터지는 건가.'
정도준의 목표는 바로 그곳, 대회반이었다.
그리고 입학식을 치른 지 약 3주가 지난 뒤인 저번 주 금요일. 그는 마침내 인고의 대결 끝에 대회반의 일좌를 차지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 사실에 뛸 듯이 기뻐했고, 성취 보상이라며 용돈도 두둑하게 받았다.
'……반 넘게 엄마한테 뺏기긴 했지만.'
어머니는 통장에 넣어서 잘 보관해준다고 말씀하셨으니 거짓말은 아닐 터다. 아마도.
여하튼, 대회반 합격을 통지 받고 돌아오는 주의 첫 등교일인 오늘.
그는 드디어 말로만 들었던 성심고의 6층에 발을 들였다.
성심고 본관 건물 중에서도 오직 대회반과 교사만이 출입할 수 있다는 6층.
사람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는 하나 정도준은 혈기 넘치는 신입 고교생이었고, 살날 걱정은 이른 젊은 피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혀 달랐다.
마치 자신의 인생이 바로 이 한 걸음을 위한 일이었던 것 같은, 그런 영문 모를 감개가 그의 온몸을 덮쳤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그의 앞에 아직 길고 험한 길이 그대로 남아 있듯이, 지금 또한 그에게 주어진 목표가 있었으니까.
6층의 조리실습실. 신입 대회반까지 포함한 대회반 전체의 미팅이 그곳에서 열린다는 소식에 그는, 그리고 남은 네 사람의 신입생 또한 함께 이곳에 온 것이다.
'아직 애들 이름도 잘 모르지만…….'
정도준은 무리 짓지 않고 이리저리 따로 떨어져 걷는 면면을 뒤에서 살폈다.
각각 다른 반에서 선발된 그와 같은 대회반 부원들.
같은 반에는 벌써 꽤 사이를 터고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밟고 있는 아이들이 몇 있었지만, 이들은 대회반 시험을 계기로 처음 얼굴을 본 사이라 서로가 서로를 어색해하는 상황이었다.
이전 기수, 찬혁의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른 셈이다.
'그래도 이 녀석들하고 굳이 친해질 것도 없지.'
그들은 분명 이 학교에서 그와 함께 대회반의 일원으로 함께할 능력 있는 학생들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자신의 가장 큰 적수, 라이벌이다. 굳이 사이를 벌릴 필요는 없겠지만 친해지려고 노력할 필요도 크게 느끼진 못했다.
'다 비슷한 것 같은 느낌이고…….'
자신의 눈에 색안경이 껴진 탓인지는 몰라도, 정도준이 보기엔 자신이나 그들이나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으로만 보였다.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발걸음을 옮기는 일행.
이윽고 통지 받은 실습실 앞에 도착한 일행은 긴장된 심정으로 문 앞에 정렬했다.
'이 문을 뒤에…….'
'대회반 선배들이…….'
꿀꺽.
누군가가 낸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빈 복도에 울린다. 통행하는 사람도 적어 복도가 황량한 탓일까.
누구도 쉬이 문고리에 손을 올리지 못하던 그때, 정도준이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선배라는 이유로 아직 얼굴도 못 본 사람을 상대로 마냥 긴장만 하고 있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덤으로, 사춘기 남자아이 특유의 강해보이고 싶은 마음이 약간이나마 섞인 탓도 있었다.
─드르륵!
평소 손질을 꼼꼼하게 해두어 본래는 소리도 나지 않을 문이 과도하게 힘을 준 탓에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린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와 동시에 거의 호통에 가까운 인사.
만약 누군가 안에 있었다면 깜짝 놀라지 않았을까. 자신의 실수를 자각한 정도준이 무심코 저지른 실수에 숙였던 고개를 급히 들어 올린 그때, 그는 자신을 맞이하는 그림자를 눈에 담았다.
그것은 실습실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역광을 배경 삼아, 마치 빛이 거부하는 존재인 것처럼 두터운 심연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
그것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저 담담하게, 온몸을 눈에 보이지 않는 구속구로 묶어둔 듯 고정된 자세로 두 팔만을 천천히, 그리고 규칙적으로 앞뒤로 움직인다.
─스릉, 스릉.
팔이 움직일 때마다 울려 퍼지는 소름끼치는 쇳소리.
꼭 무언가의 비명처럼도 들리는 그 규칙적인 소리가, 어느 순간 뚝 하고 정지한다.
천천히. 천천히.
그것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아온다.
강렬한 역광 탓에 아픔을 호소하던 눈이 비로소 빛을 받아들이고 초점을 수정하기 시작한다.
큰 키에 날렵한 몸매, 그에 비해 분명히 넓은 어깨. 빛에 익숙해질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그것의 얼굴은 말 그대로 무표정이다.
그제야 정도준은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남학생이다. 그것도 조리복을 정갈하게 차려 입은 남학생.
그 두 손에는 언뜻 보아도 한 자는 넘어 보이는 길고 폭이 좁은 날을 가진 칼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야나기?'
정도준은 그것이 흔히 사시미라고도 불리는 일본식 회칼의 일종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방금 막 씻어낸 듯 물기를 머금은 칼날은 그의 그림자 속에서도 닿는 것을 단번에 갈라 버릴 것 같은 위험천만한 예기를 번뜩였다.
과연, 그 소름끼치는 쇳소리의 정체는 숫돌에 칼을 가는 소리였던가.
하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그리 상황이 좋아지진 않았다. 안 그래도 야나기는 깡패가 쓰는 대표적인 흉기라는 안 좋은 인식이 있는데, 저 사람이 들고 있는 저것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위험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아, 안녕하세요."
쭈뼛쭈뼛. 정도준을 비롯한 일행이 당장에라도 뒤로 물러설 것 같은 걸음으로 조심스레 실습실 안에 들어온다.
그나마 정도준은 상황이 좋은 편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이 상황 자체에 압도되어 인사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여태껏 무표정을 고수하던 남자의 입이 열린다.
"뭐냐, 너희."
저건 질문인가? 그런 것 치곤 의문문처럼 들리질 않았는데.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정도준의 뇌리를 스쳤다. 인간은 정말 급박한 상황이 되면 반대로 머리가 딴 생각을 한다던데, 이게 바로 그런 걸까.
스스로 생각해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자문자답을 하고 있자니, 점점 정도준의 눈에 비친 남자의 표정이 바뀌기 시작한다.
무심한 듯 반듯한 일렬을 유지하고 있던 눈썹과 눈꼬리가 위를 향하고, 반대로 양 입꼬리는 아래로 조금씩 내려온다.
단지 그것뿐. 고작 그것뿐인데, 정도준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너네 뭐냐고."
그가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듯 예리한 칼끝으로 그들을 가리킨다. 아니, 정도준이 그렇게 느꼈을 뿐인지도 모른다. 상대는 처음 칼을 든 자세 그대로 딱히 팔을 움직이고 있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분위기가 그러했다. 평범하게 잘생긴 얼굴인데 어찌나 살벌한 표정인지, 꼭 사람 한둘 정도는 담가본 것 같았다. 그 기세에 압도당한 일행은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마치 전부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히, 흐힉."
기분 탓일까, 그의 뒤에 있던 일행 중 한 명인 여자아이의 입에서 울먹이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아니, 실제로 울먹이고 있는 걸지도. 남자인 자신도 지릴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도 없는 일, 정도준은 최대한 용기를 끌어모아 그의 질문에 답했다.
"저, 저희는 그러니까, 대회반 신입생인데, 선생님이 여기로 가라고 하셔서 왔는데, 요."
좀처럼 똑바른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 말.
그러나 남자는 그 말을 용케 알아들었는지,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곤 답했다.
"신입생? 아, 너희가?"
"에, 예……!"
"……이번 신입생은 싹수가 노랗네. 선배한테 제대로 인사하는 녀석이 다섯 중에 하나밖에 없냐."
선배? 저 사람이 지금 선배라고 한 것인가?
'……아니, 잠깐. 당연한 거잖아.'
대회반 관계자 외에는 출입을 금지하는 6층. 그중에서도 대회반 전용 실습실에 있다는 건 이 남자 또한 대회반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정도준은, 그리고 다른 일행은 무거운 절망감을 느꼈다.
이 남자, 이름도 모르는 이 남자가 자신들의 선배라니.
틀림없다. 성격이 제대로 된 인간일 터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람 머리를 빵 사이에 끼운 뒤 "넌 뭐라고?"라는 질문에 "전 병신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타입의 인간일 것임이 분명하다!
설마 이런 선배 아래서 최소 1년, 최악이면 2년 동안 지내야 한단 것인가.
그들이 절망하기엔 그 사실 하나로 충분했다. 그들의 뇌리에 미래의 사건이 펼쳐졌다. 허구한 날 욕 먹는 자신,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한다고 조인트를 까이는 자신, 욕 먹기에 지쳐 방구석에 쪼그려 울먹이는 자신.
마치 1초가 1시간 같은 절망과 고통의 시간이 지나갈 무렵, 갑자기 그들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얘들아, 여기서 뭐 하니?"
이번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앞에 있는 저 남자 선배와는 전혀 다른 밝은 기운이 가득한 여성의 목소리다.
일행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간 그곳엔 남자와 마찬가지로 조리복을 차려입은 한 명의 여학생이 서 있었다. 그들과 다른 2학년의 명찰. 그들의 선배였다.
"어라? 얘들아, 표정이 왜 그래?"
잔뜩 울상이 된 일행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는 그녀, 이윽고 그녀는 앞에 선 남자를 향해 시선을 향하곤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야! 너 애들한테 뭐 한 거야!"
"……."
"!"
그 당돌한 외침에 오히려 놀란 쪽은 일행이었다. 어떻게 저런 사람한테 대고 고함을 칠 수 있단 말인가. 반대로 덤벼들면 어쩌지? 잠시 그런 불안감이 엄습했으나, 그들은 곧 남자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 설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그들에게 희망의 빛이 내리 쬐었다. 이 사람한테는 저 남자 선배도 함부로 못 대하는구나!
그렇다면 그녀야말로 그들의 희망이었다. 적어도 이 선배 옆에 붙어 있는다면 어떻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 희망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몰카를 해도 애들을 이 꼴로 만들면 어떡해?!"
"……예?"
방금 이 사람이 뭐라고 한 거지?
몰카?
일행의 뇌리에 마치 처음부터 같은 머리를 공유하고 있던 것 마냥 같은 의문이 솟구쳤다.
하지만 더더욱 충격적인 사건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남자가, 꼭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배때기에 칼을 쑤셔 박을 것 같은 지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어이가 없단 표정을 짓더니 인상을 푸는 것이 아닌가.
"아니, 몰카는 지가 하자고 해놓고 왜 나한테 성질이야."
"전통이잖아, 전통!"
"지킬 전통이 따로 있지 왜 하필 그런 꼴같잖은 전통을 지키겠다고 난리래."
"어차피 전통이라곤 그거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것도 그렇네."
두 남녀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 정도준 일행은 마치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것 같은 상태가 됐다. 머리가 상황의 변화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얼빵하게 정신줄을 놓고 있던 그들 앞에 맨손으로 다가온 남자가, 아까와 달리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다. 성심고 대회반 부장 류찬혁이라고 해. 대회반에 온 걸 환영한다."
대회반…… 부장?
그 순간, 정도준은 마침 머리 주변에서 아른거리던 무언가가 갑자기 뒤통수를 강타하는 느낌을 받았다.
'생각났다.'
작년부터 시작하여 올해 초, 아니. 지금까지 끊임없이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성심고 학생이자, 또한 재작년 활동을 끝으로 이렇다 할 활동이 없는 안효민보다 더욱 활발한 활동으로 세간의 이목을 한 몸에 받는 남학생.
TV에서 보고 '나도 저렇게 당당한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감명받았던 그 남학생의 인상착의가, 지금 눈앞에 있는 남학생과 대단히 비슷하단 것을, 정도준은 깨닫고 만 것이다.
기실, 다른 일행도 늦으나 빠르나 정도준과 같은 사실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성심고에서 나누어준 포트폴리오에 가장 큰 면을 차지한 학생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충격과 공포.
온갖 감정의 폭풍우가 휘몰아친 뒤 텅 비어 버린 일행의 머릿속을 같은 생각이 잠식해나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2년, '우리는 끔찍한 시간을 보낼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생각이.
***
아 씨, 깜짝이야.
왜 들어오면서 소리를 지르고 난리래.
칼 갈다가 놀라서 손 나갈 뻔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