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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07화 (207/403)

207. 신학기.-1-

전설 아닌 레전드로 역사에 남을 졸업식이 끝나고 며칠의 시간이 지났다.

어느덧 바깥에는 이른 봄의 기운이 새싹처럼 피어나기는 개뿔. 아직 더럽게 춥다. 혹시 가끔 만화에 나오는 멋진 기술 같은 걸 실제로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는가?

할 수 있다. 굉장히 간단하다. 이 시즌에 아침 조깅 2, 3km 정도 빡세게 뛰면 기어 세컨드를 쓸 수 있게 되거든. 뭐, 겉보기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일이 끝나고 요 며칠간 제법 반가운 소식이 몇 가지 있었다.

하나는 비로소 이 은근히 넓은 기숙사를 혼자 쓰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내 룸메가 개학을 사흘 정도 앞두고 복귀했다.

다른 하나는 대회반에 대한 이야기다.

대회반은 철저한 실력주의로 운영된다. 그래서 인원을 선발할 때도 실기 테스트와 이전 학급의 교사가 기록한 생활기록부 따위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 뒤에야 뽑는다. 어느 쪽이든 기준이 굉장히 엄격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담당교사인 교장 선생님이나 박예휘 선생님이 세 학년 전체의 선발을 항상 주관할 수는 없는 일. 그렇기에 2학년이나 3학년은 보통 이전 년도의 실적만으로 퉁치는 경우가 많다.

실적이 확실하다면 잔류. 그렇지 않다면 재시험.

여기서 또 다른 지원자와 점수를 겨루어 만약에 뒤처진다면 그날로 자리가 교체되는 식이다.

잔류자 선발 과정은 보통 개학 이전에 전부 끝나게 되는데, 마침 그 결과가 얼마 전에 통지됐다. 보통은 가슴 졸이며 기다릴 이벤트겠으나 애당초 난 그걸 까먹고 있었기에 딱히 마음 쓸 일도 없었다. 어차피 잔류 같은 건 볼 것도 없이 확정이니까.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이 그런 걸 어찌하리오.

나뿐만이 아니라 이제 곧 학년이 올라가는 다른 1학년 팀원이나 2학년 선배들도 전원이 그대로 잔류한다는 소문이다.

작년 2학기 때는 열리는 대회가 없어 참가할 곳을 찾는 것만도 고생이었다지만, 다들 가만히 놀고먹은 건 아닌 듯하다. 하긴, 그럴 사람이면 처음부터 대회반에 들어오질 못했겠지만.

이상의 이유로 나는 비교적 편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개학식 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2학년이라……."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는 비상식적인 일을 겪은 뒤로도 나는 차근차근 나이를 먹고 있다. 일이 이렇게 되니 그런 정상적인 일이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고등학생이란 입장으로 2학년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특히나 실감이 크다.

시간이 흐르면 나도 얼마 전의 한석준 선배처럼 이 학교를 졸업할 날이 오겠지.

과연 그날의 내가 이전의 나와, 그리고 지금의 나와 얼마나 달라졌을지 가끔 상상해보곤 한다.

뭐, 내가 무슨 미래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지만,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다. 그 어느 때의 나와 비교해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으리란 것.

물론 변질한다거나 꿈이 바뀐다는 게 아니다. 단지 몰라보게 성장하리라는 믿음이 있을 뿐.

지금의 나는 그 믿음을 굳게 다짐함과 동시에, 그 믿음을 나 자신이 배신하는 일이 없게끔 해가 바뀐 올해에도 더더욱 노력할 채비를 단단히 굳혔다.

***

개학식 날이 되어 나와 철정이 녀석은 학교에서 고지받은 대로 우리의 새로운 교실을 찾아 등교했다.

우리도 2학년이 된 만큼 새로이 2학년 교실에 반을 배정받은 것이다.

뭐, 그렇다곤 해도 어차피 반인원은 바뀌지 않았지만.

1학년 1반이 그대로 올라가 2학년 1반이 됐다. 심지어 담임선생님도 1학년 때 담임이셨던 박예휘 선생님이 그대로 맡으신다.

특이한 일이지만, 어차피 2학년 때부터는 반이라는 조직이 가진 의미가 1학년 때에 비해 굉장히 퇴색되기에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은…….

"저희 성심고는 2학년부터 학점제를 통해 수업을 실시합니다. 학생 본인이 필수과목과 교양과목을 최소치 이상에 맞게 결정하여 수업을 듣고, 각 수업에서 받은 학점을 통해 진급과 졸업 여부가 결정됩니다."

라는 거다. 요컨대 대학교 식 수업이란 뜻이다.

국영수과 같은 필수 교과목과 한, 양, 일, 중, 제과제빵 중 자신이 전공으로 삼고 싶은 필수 실기과목. 거기에 더해 제3외국어 계열의 교양과 각 실기과목의 심화는 일종의 준필수 과목 등으로 나뉜다.

이 과목 중 학생은 본인이 듣고 싶은 과목을 학점이수 최소치를 선정해 수강하게 되는 거다.

이제까지 평범하게 학교에서 정해주는 대로 수업을 받은 학생들에게는 이런 방식 자체가 굉장히 생소할 것이다. 아마 뭘 어떻게 들어야 하나 고민하는 학생도 많겠지.

그렇기에 우리도 개학 후 일주일 정도는 각 과목을 충분히 돌아보며 선택할 시간이 주어진다.

'아무리 그래도 좀 촉박하게 느껴지는 건 매한가지지만…….'

하지만 이제 와서 자기 주 종목을 고르지 못하는 학생은 없을 것이다.

1학년 때 했던 지옥주, 전공탐색 수업은 바로 이날을 위한 예행연습이었으니까.

학생 자신이 어떤 수업을 받고 싶은지 자아성찰을 할 시간은 충분히 주어졌다고 볼 수 있겠지.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이 무색하게도 개학식이 끝난 직후 반 아이들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수선해진 상태였다.

"야, 넌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어. 전공은 대충 하겠는데 교양을 뭘 골라야 할지 도통 모르겠네."

"나는 전공부터 막힌다. 지금 양식 쪽 생각하고 있는데 전공은 딴 걸로 하고 심화를 양식으로 돌릴까?"

"굳이? 야 그럴 바엔 그냥……."

"아니, 특기 과목을 골라서 점수를 낭낭하게 빼는 게……."

"그러지 말고 모르는 걸 배우는 것도 꽤……."

뭐, 대충 이런 느낌이다.

"하하, 개판이네."

"뿌듯한 얼굴로 뭔 잡소리를 까고 있노."

"어, 왔냐. 현주는?"

"저 짝에 있다. 아직 전공 고민하고 있다 안 카나."

오랜만에 직접 대면하는 양희연. 여전히 쪼그맣다. 아니, 어째 시선을 더 내리깔아서 봐야 하는 느낌이다. 아, 이건 내 키가 커서 그런 건가.

뭐 어쨌든, 녀석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힐끗 시선을 향하니, 과연. 책상에 앉아 매서운 얼굴로 종이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는 나현주의 모습이 보인다.

쟤는 특기가 특정한 요리가 아닌 고기라는 재료에 있는 녀석이니까. 종목에는 구애받지 않아 다른 아이들보다 선택이 자유로운 만큼 더더욱 고르기 까다롭겠지.

그에 비해 양희연. 이 녀석은 딱 반대되는 경우다.

"너는 다 골랐어?"

"나? 하모."

양희연은 통지서를 들어 자신이 찍은 과목을 내게 보여주었다.

필수 실기는 일식과 중식, 심화도 일식 심화와 중식 심화. 거기다가 교양은 일본어 회화랑 영어 회화?

"와, 양심이 터져 버렸네."

영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전직 일본인이 교양으로 일본어 회화를 듣는다고? 원어민 강사 대신 얘가 강의를 뛰어도 될 건데. 얼마나 학점이 갖고 싶었던 거야. 이 작은 녀석에게서 벌써 학점노예의 기질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끄럽다. 어차피 교양 아이가. 뭘 듣든 뭔 상관인데?"

"그것도 그거지만, 네가 일식이랑 중식을 들으면……."

"다물라 했다."

앗, 옙.

녀석의 매서운 눈초리에 나는 입을 꾹 닫았다. 뭐, 나도 말은 이렇게 했지만 좋은 선택이다.

한식도 그렇지만 일식 또한 중식에서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은 식문화. 그렇기에 일식과 중식은 함께 배울수록 그 시너지가 그야말로 블츠와 베인처럼 끝도 모르고 상승하게 된다. 고사기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뭐라 카노?"

"아, 미안."

버릇에 가까운 잡소리였다.

"그런데 니는? 다 정했나?"

"나? 나는 뭐……."

나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냥 내가 대충 체크한 통지서를 녀석에게 넘겨주었다. 잠시 후, 양희연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니, 이게 지금 다 뭐꼬?"

상상한 대로 제법 격한 반응을 터트리는 양희연. 녀석이 이런 반응을 보일 만도 하다. 왜냐하면, 내가 건네준 통지서의 체크리스트는 필수 과목을 제외하더라도 대략 열 개에 가까운 박스에 체크가 들어가 있었으니까.

보통 교양이나 준필수 과목에서 학년 이수를 하기 충분한 숫자는 대략 둘에서 셋 정도면 충분한데, 나는 그것의 서너 배에 달하는 과목을 듣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 녀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보는 이유도 알만하다.

"니 미쳤나? 심화란 심화는 죄다 찍어놨네? 이건 또 뭐꼬? 유럽역사를 통해 아는 서양요리 발전사?"

"아, 빠질 수 없는 과목이지."

음식의 발전은 곧 문화의 발전. 문화의 발전은 곧 역사 그 자체다.

음식을 아는 것으로 역사를 알고, 역사를 아는 것으로 요식의 최전선에서 싸운 과거의 위인들 본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니. 이거 완전 최고 아니냐?

"…… 니, 머리 괘안나? 겨울 때 혹시 빙판에서 미끄러져가 머리 부딪힌 거 아이제?"

나를 불쌍한 놈 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양희연에게서 조심스레 눈을 돌렸다. 그만둬. 날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줘……!

"야, 야. 뭐 사람을 환자 취급하고 그러냐. 난 지금 충분히 정상이야."

"아닌데. 니나 저 머스마들이나 똑같아 보이는데."

녀석이 가리킨 쪽을 바라보니, 김철정을 비롯한 남학생 몇 명이 창가에 모여 바깥 어딘가를 살피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쟤네들은 저기서 뭐 하는 거야?

"후후…… 신입생 녀석들인가."

"과연 몇 놈이나 2학년이 될 수 있을까."

"저 중에 몇 명이나 전학 갈지 내기할래?"

아, OK. 일단 정상적인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겠다. 입학식을 하러 교문으로 몰려드는 신입생을 바라보는 녀석들의 표정이 어딘가 그윽하다. 뭐지? 전부 미쳐 버린 것인가?

"니도 똑같아 보인다."

"내가? 농담도 그쯤 하면 재미없다, 야."

"농담이 아니면 좀 재밌겠나."

그래, 뭐. 농담은 이쯤 하도록 하자.

나도 안다. 필수도 아니고 교양 과목을 이렇게나 많이 들을 필요도 없거니와, 정말 이 커리큘럼 그대로 수강신청을 넣어 버리면 2학년 한 해 내내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학교의 것이 되고 말겠지.

필수 과목까지 합쳐 대략 열다섯 개가 넘는 수업! 과제도 존나 많겠지! 누가 진짜 학교의 노예냐? 내가 바로 10점 만점에 12점짜리 노예다!

…… 같은 말이 농담이 아니게 되는 것도 자명한 일이다.

저걸 필수 과목이랑 같이 전부 수강한다면 내 앞길은 그야말로 핏빛 불꽃이 싱그럽게 피어오르는 지옥불꽃길이 되겠으나. 그래도 뭐, 나도 생각이 없는 건 아니라 이거야.

"괜찮아. 계산해봤는데 충분히 여유 있어."

"이게? 아니 잠깐. 그걸 계산했다꼬? 니 진심이가?"

"물론이지. 난 처음부터 진심이었어."

일단 나는 양희연이나 저기 철정이 놈들과 전제 자체가 다르다.

알다시피 나는 대회반이다. 여기서 알아야 할 건, 대회반은 그 자리를 지키는 자체로 학교에서 주는 가산점과 대회 수상 등의 실적을 쌓았을 때 주는 또 다른 실기 가산점이 있다.

이론상 한 해에 요리대회에서 두 번 이상의 우승을 할 경우, 국영과수 네 가지의 교과목만 듣고 그 외의 필수 수강 점수를 대회반 가산점만으로 채울 수 있다!

그렇다면 교양과 준필수 실기 심화를 저만큼 듣는 것도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생각해봐. 수업 내용 자체는 필수 실기보다 심화 쪽이 훨씬 깊은 내용을 다루잖아? 솔직히 말해서 난 필수 수업 정도는 이제 안 들어도 별로 상관없는 수준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현역 최전선에서 뛴 선생님들이 밑천까지 탈탈 털어서 해주는 심화 수업만 듣는 게 이득이지 않을까?"

"……."

보아라! 아무 말도 못 하는 이 가련한 중생의 모습을!

내 이론이 너무나도 완벽하여 반박거리조차 찾지 못하는 모습이 참으로 딱하지 아니한가!

아무런 말도 없는 양희연에게 득의양양한 웃음을 보이자, 녀석은 이제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듯 탄식어린 목소리로 담담하게 한마디 말을 읊조릴 뿐이었다.

"정신 나간 또라이 새끼……."

"……."

아무래도, 이번에 반론을 펼치지 못하는 건 내 쪽이 된 듯싶었다.

물론 내 뜻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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