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이별의 날.-3-
며칠에 걸친 리허설이 끝나고, 비로소 졸업식의 날이 다가왔다.
자리 자체는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라 별문제 없었지만, 요 며칠에 본 것과 다른 게 있다면 대강당의 반의 반절 가량을 채운 반듯한 교복 차림의 3학년 선배들이 자리했다는 것이겠지.
단상 위에선 빳빳하게 다린 양복을 맵시 있게 갖춰 입은 교장 선생님이 훈화에 한창 열을 쏟고 계신다.
"…… 오랜 배움 끝에 당당한 모습으로 이 학교를 졸업하시는 여러분의 앞날에 밝은 미래가 있기를 기원하며, 또 마지막으로……."
과연. 리허설 때와는 기백이 다르다. 덤으로 '마지막으로'라는 말이 나오는 횟수도 다르다.
그 증거로, 보라. 당초에는 기합이 빡세게 들어가 있던 졸업생의 눈빛이 점점 흐려지고 있지 않은가.
…… 뭐, 후자야 농담으로 치더라도 앞서 말한 기백 이야기는 진짜다. 담담하게 이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뼛속까지 울리는 진중한 목소리. 카리스마라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한 가지 더 당부드리고 싶은 게 있다면……."
근데 카리스마가 있으면 뭐하나. 정작 듣다가 잠들어 버릴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교장 선생님도 꽤 흥분하신 것 같다. 이번 기수 졸업생은 특히 감개가 깊으시다는 건가. 할 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깊은 사랑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이상으로 훈화를 마치겠습니다. 제38기 졸업생 여러분. 여러분이 자신의 꿈을 성취할 수 있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도무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훈화는 학생 쪽이 먼저 쓰러질 것 같은 때쯤이 돼서야 간신히 끝났다. 박자를 놓치고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박수 소리가 그들의 지친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들리는 건 내 착각일까.
그나마 다행인 건 이후 과정은 몸을 움직일 필요가 있어 졸다 걸릴 일은 없다는 거려나.
직후 이어진 상장 수여 및 졸업장 수여. 그리고 나를 필두로 한 꽃다발 증정식이 끝난 뒤, 드디어 나를 긴장케 하던 시간이 찾아왔다.
"다음으로는 여러분의 후배가 준비해온 축사를 전달하는 시간이 있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착석해 주세요."
축사는 2학년 대회반 팀장이자 부장인 효민 선배부터 시작하고, 그다음 차례가 바로 나다.
"……."
나는 미리 챙겨놨던 축사가 적힌 종이를 꺼내 들었다. 없는 필력을 어떻게든 짜내어 제법 알차게 만든 축사. 쓰고 외운다고 제법 공을 들였더랬지.
효민 선배는 평소의 장난스런 기색은 어디 갔다 팔았는지, 1년 내내 본 적 없는 진중한 목소리와 태도로 본인이 준비한 축사를 낭랑하게 읊는다.
교장 선생님의 그것과 비교해도 지지 않는 당찬 문장에 그녀 특유의 참기름을 뒤집어쓴 굴 마냥 귀에 걸리지 않고 매끄럽게 고막을 진동시키는 목소리가 합쳐지니, 분명 나름 상투적인 축사에도 명문을 들은 것 같은 착각이 인다.
역시 선배. 할 때는 진지한 사람.
하필 저 뒤 순서가 내 차례라는 게 고달프게 느껴질 만큼 훌륭한 축사였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몰아치는 박수 세례가 그걸 증명하는 듯하다.
효민 선배는 단상을 내려와 굳은 얼굴을 풀며 한숨 돌리겠다는 듯 세차게 날숨을 불었다.
"휴, 처음도 아닌데 되게 긴장되네."
"마지막이긴 하잖아요."
"그건 그래."
올해로 선배도 3학년으로 올라가 예비 졸업생이 됐으니, 후배로서 졸업생을 위한 축사를 읊을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리라.
"아무튼 혀 안 씹고 잘 말해서 다행이야. 다음은 찬혁이 차례지? 어때, 자신 있어?"
그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사실 나도 저만큼 잘 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뭐, 해본 적 없는 일이라고 꼬리를 말 수는 없는 거잖아.
"다음은 1학년 대표, 류찬혁 학생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나를 부르는 사회자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효민 선배와 다른 아이들이 응원한다는 듯 신뢰가 담긴 눈빛을 보내왔다.
"그래, 한 번 해보자."
스포트라이트를 따라 단상 위로 올라서니, 얼마 안 가 3학년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강당을 채우는 게 느껴졌다. 잠시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했지만, 곧 답을 찾았다.
"야, 쟤 뭔가 얼굴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어, 맞아. 봤어. 근데 어디서 봤지?"
"TV에서 본 것 같은데……."
"TV에 왜…… 아, 맞다. 골목 레스토랑."
"뭐? 쟤 골목 레스토랑 나왔어?"
"몰라? 지금 엄청 나오고 있잖아."
이와 비슷한 논조의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과연, 왜 이러는지 알겠다. 슬슬 떡밥이 식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대회반 사이에서만 그런 거였구나.
하긴, 사람이 기백인데 방송 챙겨 보는 사람 몇 명은 있겠지.
잠시 당혹스런 기분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단 생각이 든다.
아까 효민 선배가 축사를 발표할 때와 같은 진중함은 날라갔지만, 그 대신 이목 하나는 확실하게 끌리지 않았는가. 그럼 써주지 않을 수 없지.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1학년 대표로 축사를 맡게 된 류찬혁이라고 합니다."
천천히 걸어 단상에 선 나를 수백 쌍의 눈이 바라본다.
"제가 이번 축사를 어떻게 잘 해보겠다고 사흘 밤을 새서 대본을 준비해봤는데요."
그 시선을 앞두고 일부러 뜸을 들여 품에서 축사 대본을 꺼낸 나는, 이윽고 그 종이를 깔끔하게 손으로 구겨서 어깨 뒤로 던져 버렸다.
"아무래도 필요 없을 것 같으니까 잠시 치워두겠습니다."
***
갑작스런 찬혁의 폭거에 깜짝 놀란 학생들의 이목이 더더욱 찬혁을 향해 쏠린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똑같이 단것만 먹다가는 질리지 않을 수가 없는 법.
지금까지 안영길과 안효민의 축사가 순한 감칠맛과 같았다면 찬혁의 갑작스런 행동은 혀를 향해 160km 직구로 날아드는 자극적인 매운맛 그 자체였다.
그 화끈함에 놀란 학생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찬혁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래저래 준비한 말은 많은데 이걸 읽으려고 보니까 교장 선생님 말씀에서 반, 안효민 선배 축사에서 나머지 반 정도가 이미 다 나왔더라고요. 들은 말 또 듣는 건 선배님들도 싫으시죠? 아니라고 말하지 마세요. 교장 선생님 훈화 때 주무시는 분 계신 거 봤으니까. 근데 이해해요. 교장 선생님 훈화가 좀 길어야지."
동의를 구하는 제스쳐에 3학년들이 폭발적인 기세로 화답했다.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들도 막 수능이란 대목을 간신히 넘긴 전직 고3. 언제든 머리에 걸린 정신줄을 제 손으로 끊어 버릴 수 있는 인종이었고, 그렇기에 누구보다 또라이에 열광할 수 있는 시기를 겪는 청춘이다.
그런 그들의 앞에 전무후무한 또라이가 나타났다.
그들을 가르친 서른 명가량의 교사진 앞에서 대놓고 교장을 디스하는 놈이 또라이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자신의 후배 중 이렇게 되바라진 놈이 있다는 사실에 갈채를 보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자, 진정하지 마시고 좀 더 소리치세요. 인생에 한 번뿐인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소리 좀 지른다고 사람이 죽기라도 한답니까. 아, 그렇다고 욕은 쓰시면 안 되고. 고운 말 쓰세요, 고운 말."
가히 폭주하는 차량의 엑셀 위로 누름돌을 얹으려 드는 찬혁의 행태에 대회반 일행도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야, 저 미친놈."
"저거, 원래 대본이야?"
"설마. 미쳤다고 저걸 대본으로 줬겠어."
"꺄악! 혁이 잘한다!"
뭐, 그렇지 않은 사람도 몇 있었지만.
열광하는 3학년과, 당황한 대회반과, 갑작스런 사태에 아예 굳어 버린 교사진.
그 세 집단의 중심에 낀 찬혁은 그딴 게 뭐가 대수냐는 듯 말을 이어나간다.
"제가 원래 말씀 드리고픈 게 되게 많았는데, 앞에 다른 분들이 먼저 다 해 버리셔서 어쩔 수 없이 딱 세 개만 말씀드릴게요. 제가 따로 아는 셰프가 해주신 금과옥조 같은 인생의 조언이니까 꼭 새겨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이제는 아예 단상에서 마이크를 뽑아든 찬혁이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와 말을 이었다.
"첫째. 오늘 졸업식 끝나면 매일 밤새 술 드시고 노세요. 이때 아니면 마음 놓고 놀지도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수험표 아직 갖고 계시죠? 살면서 이만한 할인 티켓이 없대요. 재미 챙기는 겸 지역 경제 발전에 도움도 좀 주시고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좋게 말해도 학교의 졸업식에서 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발언이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졸업생들의 화답은 열기를 더해갔다. 찬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이건 듣기 싫으실 수도 있는데, 남자 선배님들은 곧 영장 나올 겁니다. 싫어도 올 거예요. 어쩔 수 없어요. 저도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보통 군대는 일찍 갈수록 이득이란 말이 있는데, 제가 들은 인생 꿀팁을 하나 드릴게요. 군대는 20대에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인생관계 리셋 버튼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내가 내 인생에서 2년을 쓰더라도 지금 인간관계를 깔끔하게 청산하고 싶다 싶을 때 쓰면 됩니다. 아,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인데, 조리과 나왔다고 취사병은 하지 말래요. 진짜 죽을 수도 있다네요."
찬혁의 발언에 황당하다며 웃음소리를 높이는 남학생들을 보며 찬혁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들도 언젠가 이 발언을 진지하게 되새길 때가 분명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찬혁 자신도 포함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배님들께 여쭤볼 게 하나 있어요. 선배님들, 학창 생활 힘드셨죠?"
"당연하지!"
"너는 안 힘드냐!"
"물론 힘들었죠. 근데 이거 하나만 명심하세요. 사회는 분명 이 학교에 있을 때보다 배는 힘들고, 배는 불합리할 겁니다. 처음 가는 주방에서 왜 이것도 못하냐고 욕먹는 일도 부지기수로 있을 거예요. 폭언, 폭설, 폭력에 쉽게 노출되는 곳이 주방이니까요."
현실을 지적하는 찬혁의 말에 한창 뜨겁게 달아올랐던 졸업생 집단의 열기가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듯 단숨에 가라앉는다. 그러나 찬혁은 그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마이크를 잡고 말을 이어나갔다.
"너무 힘들어서 울고 싶을 때도 있을 거고, 다 때려치우고 그만두고 싶을 때도 분명 있을 겁니다. 장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든, 그런 상황을 이겨내야만 무언가가 주어집니다. 울어도 좋아요. 때려치워도 좋습니다. 하지만 결코 멈추지는 마세요. 서서 걷지 못한다면 기어서라도 나아가야 해요. 멈추는 건 쉽지만 다시 시작하긴 어렵습니다. 명심하세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때는 추락할 때가 아닙니다. 제자리에 안주해 버렸을 때입니다."
일개 고등학생의 말이라고 보기엔 과하게 무거운 발언.
강당에 싸늘함을 넘어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하고, 환호의 자리를 침묵이 대신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찬혁은 다시 마이크를 입 가까이 가져왔다.
"꿈과 이상이 아무리 높아도 현실의 벽은 언제나 그보다 높습니다. 하지만……."
말끝을 흐리는 찬혁을 향해 관중의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믿어야 합니다. 자신의 꿈과 이상이 언젠가 현실의 벽을 넘을 수 있다고 믿고 행동해야 합니다. 저는 선배님들께 그런 힘이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성심고라는 벽을 넘어섰으니까요. 선배님들. 성심고는 여러분에게 만만한 벽이었나요?"
"…… 아니!"
잠깐의 침묵 후, 그들 중심에서 누군가가 부정의 뜻을 외쳤다. 뒤이어 또 다른 곳에서,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아니야!"
"이 학교가 얼마나 빡센데!"
"만만했으면 내가 억울하지라도 않지!"
마치 불이 번져나가는 것처럼, 부정의 외침은 하나의 커다란 파도가 되어 강당에 팽배한 침묵을 몰아치는 해일처럼 쓸어버린다.
그것이야말로 찬혁이 원하는 반응이었다.
"벽을 한 차례 넘어섰다는 건 선배님들이 그만한 힘을 갖췄다는 뜻이겠죠. 사회도 마찬가지예요. 눈앞에 닥친 벽부터 차근차근 넘어설 수 있다면, 언젠가는 아무리 높은 벽이라도 넘을 수 있게 될 겁니다. 이 학교를 졸업하시는 선배님들이라면 분명 그럴 수 있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무대 앞으로 바짝 나와 있던 찬혁이 등을 돌려 단상으로 되돌아가더니, 마이크를 제자리에 꽂고는 마지막 인사로 축사를 끝맺었다.
"이상, 대회반 1학년 팀장이자 선배님들의 후배, 류찬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깊게 고개를 숙이는 찬혁의 머리 위로, 우레와 같은 갈채가 쏟아진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가까운 타이밍에 시작된 박수.
한동안 멈출 생각을 않고 이어지던 박수는 무대 뒤로 물러서 있던 안영길이 나선 다음에야 간신히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무대를 내려간 찬혁을 대신하여 단상에 선 안영길이 헛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참, 졸업식 축사로는 부적절한 발언이 조금 있긴 했습니다만……."
고개를 몇 차례 저은 그의 시선이 무대 아래 좌석에 앉은 찬혁을 향한다.
"제가 교탁에 선 이래 들었던 그 어떤 학생의 축사보다 훌륭한 축사였습니다. 이토록 훌륭한 축사를 남긴 여러분의 후배에게, 다시 한번 박수 부탁드립니다."
안영길의 말에 대강당이 다시금 박수갈채 소리로 가득 차올랐다. 후배에게 보내는, 선배의 감사의 마음이 담긴 화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