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05화 (205/403)

205. 이별의 날.-2-

기숙사에 복귀한 다음날. 얼굴이 그립다가도 은근 만나면 킹받을 것 같은 룸메의 얼굴이 그리워지는 방에서 홀로 깨어난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깅 후 샤워를 마친 뒤에야 교복을 입고 방을 나섰다.

"새로 살 때가 됐나?"

어째 옷을 입고 보니 밑단이 살짝 짧은 게 느껴진다. 복숭아뼈가 그대로 드러나는 감촉.

아무리 성장기의 마지막 급물살을 타고 있다지만 제법 넉넉하게 샀을 교복이 벌써 짧아질 줄이야. 마지막으로 키를 쟀을 때 분명 170 중반을 기록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정도면 정말 올해 중순이 됐을 때쯤엔 회귀 전 신장에 근접할지도 모르겠다.

뭐, 아무튼. 키가 큰 걸 실감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라지만 지금 당장에는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양말이 짧은 것밖에 없어서 발목이 시리단 말이지.

새벽나절의 공기는 밤 동안 식은 탓에 유난히 차갑다. 특히 바닥에 깔린 냉기는 과장 좀 보태서 얼음물에 발을 담근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젠장. 망할 놈의 나라 같으니.

대체 왜 이런 이상한 곳에 있어서 사계절이니 뭐니 하는 게 생기냔 말이다.

궁시렁거리며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학교. 뭐, 교복 같은 걸 입은 시점에서 이미 이곳 말고 더 갈 곳이 있을까.

다만 내가 향하는 곳은 학교 본관이 아닌 대강당이 있는 별관 쪽이다.

애당초 오늘은 수업은커녕 개학, 졸업식을 며칠 앞둔 날. 이런 날에 학교를 온 사람이 교실이나 들어가자고 왔을 리 없지 않은가.

오늘 내가 학교에 온 이유는 졸업 리허설을 하기 위함이다.

이래 봬도 우리 학교는 상당히 규모가 커서 크게 행사를 한다 치면 유입되는 외부객의 수가 장난이 아니다. 이전에 축제 때도 그랬듯이 말이다.

그런 만큼 학교의 운영진은 무슨 행사를 기획하든 최대한 잘 보이게끔 노력을 아끼지 않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구르는 게 나 같은 대회반 인원이다.

축사나 꽃다발 증정식, 그 외에도 이런저런 단계에서 할 일이 많다.

그런 와중에 실수라도 하면 그 즉시 웃음거리가 될 테니 리허설까지 해가며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이다.

거기다 내 경우엔 일단 1학년 팀장이란 딱지를 달고 있어서 더더욱 단단히 준비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그래서 나름대로 제대로 하자고 각오를 하고 왔는데, 아무래도 내 준비가 너무 과했나 보다.

"……아무도 없네."

기세 좋게 대강당 문을 열고 들어왔으나, 대강당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너무 일찍 온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이나 좀 먹고 올걸. 괜히 긴장 안 하게 속 비우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전등과 히터는 켜져 있으나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대강당.

허탈한 심정으로 강당의자를 펴고 앉았다가, 문득 축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축제 때 대강당에 이런 의자 같은 건 전혀 안 보였는데. 설마 그거 한 번 하자고 의자를 다 떼어놨던 건가. 이 학교라면 가능성이 있다는 게 더 무섭다.

온기를 간직한 의자에 몸을 파묻고 멍을 때리던 그때, 갑자기 내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마치 갑자기 불이 죄다 꺼진 것 같은 어둠. 하지만 딱히 놀랄 것도 없다. 아니, 놀랄 일이긴 한가.

눈두덩에서 느껴지는 손바닥의 감촉. 갑자기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내가 알기로 두 명 정도란 말이지.

"누구게?"

"백 씨. 이거 놓고 이야기합시다."

"정답!"

그리고 이번 범인은 그 둘 중에서도 작은 쪽이었다. 거 만나자마자 장난질을 치고 있네. 손모가지가 아깝지 않으시구나.

눈가에 올린 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가를 찌르는 빛.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니 여느 때와 같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은 백예은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나를 반긴다.

"오랜만!"

"그래,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별로 잘 못 지냈어."

"왜 또."

"혁이가 밤마다 잘 자라고 전화해줬으면 잘 지냈을 것 같은데."

"……그냥 평생 못 지내지 그러냐."

"너무해."

얼굴을 내밀기가 무섭게 쉰소리를 뱉기는. 이 녀석은 그냥 놔두면 끝도 없이 장난칠 게 분명하니 적당히 대꾸하며 끊어줘야 나도 편하다.

"그나저나 혁이야말로 대체 어떻게 지낸 거야? 반 애들끼리 혁이 얘기 엄청 많이 나오는 거 알아?"

"뭐?"

이건 또 무슨 소린지. 설명을 요구하는 내게 백예은이 나보다 더 황당하단 표정으로 답했다.

"연락도 잘 없는 애가 갑자기 TV에 나오면 안 놀랄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아, 그거."

"아 그거?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소리야?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숫제 소리를 치는 녀석의 반응에 좀 과한 거 아닌가 싶다가도 이게 또 공감이 안 되는 건 아니라 애매모호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어느 날 갑자기 이 녀석이 지상파 방송에 얼굴을 들이밀면 안 놀라고 배길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 반응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별거 아니었어. 리허설 끝나고 천천히 얘기해줄게."

"진짜지? 약속했다?"

여전히 호기심을 버리지 못한 듯 눈알을 굴리는 백예은이었으나, 당장의 큰불은 꺼졌는지 더 이상 질문을 해오는 일은 없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신변잡기가 섞인 잡담을 질리지도 않고 건네올 뿐이다.

그 잡담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시간을 보낸 지 몇 분이 지났을까, 비로소 찬바람과 함께 대강당 문을 열고 들어온 반가운 면면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안 씨 남매, 1학년 팀의 여준기와 송지영. 윤재 형을 비롯한 2학년 팀. 마지막으로 올해 졸업을 맞이하는 한석준 선배를 비롯한 3학년 팀까지.

여태껏 너무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낸 탓일까. 헤어진 지 고작 한 달 밖에 안 된 얼굴들이 어쩐지 굉장히 반가운 느낌이다.

다만 한 가지 불편한 게 있었다면…….

"야, 찬혁아! 너 방송 그거 뭐야?!"

"우리 동생 왜 갑자기 TV에 나와?"

"찬혁아, 방송……. 아, 이미 다른 애들이 많이 물어봤나 보구나."

날 보는 사람마다 가장 먼저 꺼낸다는 소리가 바로 이것이었다는 거다.

그만 좀 물어봐줘…….

***

우리보다 십 분 정도 후에 오신 선생님들이 한창 달아오른 일행의 호기심을 식힌 뒤에야 우리는 리허설을 진행할 수 있었다.

졸업식 행사의 단계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인사, 훈화, 표창장, 꽃다발 전달 및 축사1, 졸업생 대표 연설, 축사2, 이후 종료.

아마 '마지막으로'라는 말이 몇 번 나오느냐에 따라 행사 전체의 길이가 판이하게 달라지겠지만 우리가 신경 쓸 부분은 딱히 그쪽은 아니니까 제쳐두자.

여기서 우리 대회반이 맡는 부분은 표창장, 꽃다발 전달과 축사1.

표창장 때는 안효민 선배를 비롯한 2학년 일행이 교장 선생님을 도울 테고, 꽃다발 전달은 1학년이 맡는다.

축사는 각 학년의 팀장이 한 번씩. 축사2는 교장 선생님의 몫이다.

행사 진행 예상 시간은 대략 한 시간 반 정도.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3년의 학창 생활을 마무리 짓기엔 너무 짧은 것 아닌가 하는 감상이 머리를 스친다.

"나는 그것보다 더 짧았으면 좋겠는데……."

"다물어. 주둥아리 찢어 버리기 전에."

"아, 넵."

그 와중에 어그로를 끈 식중독 트리오가 최여린 선배에게 진압당하는 것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리허설 중간의 쉬는 시간을 만끽하는 도중, 대강당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내 옆에 누군가가 앉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안경 아래 고요한 호수 같은 지성의 빛이 담긴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선배?"

3학년 팀의 팀장인 한석준 선배였다.

"교장 선생님이랑 연설문 수정하고 계신 거 아니었어요?"

"방금 끝내고 왔어."

"그래요? 아, 들어봤는데 되게 명문이던데요. 문창과 가셔도 되겠어요."

"끔찍한 소리 마라. 실업 기술 배워서 무슨 문창과야. 가봤자 졸업하고 닭 튀길걸."

"푸흡."

아, 잠깐. 현웃 터졌어.

"아, 그럼 안 되죠. 치킨 튀기는 데만 쓰기에는 재능 낭비죠."

"그렇지? 그래도 맨날 어려운 것만 건들다 보면 치킨 튀기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싶긴 해."

하긴,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뭐, 치킨 장사는 그것대로 어려운 점이 많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국내 요식업 중 가장 경쟁이 치열한 업종이란 말은 허세가 아니니까.

서로 한참을 웃던 나와 선배의 웃음소리가 멎은 뒤, 선배가 앞서 입을 열었다.

"시간 참 빠르다."

"예?"

"여기 처음 입학했을 땐 진짜 시간이 더럽게 안 갔거든. 맨날 칼 휘두르고, 팬 돌리고, 국자 젓고. 그러다 물집 잡혀도 멈추지도 못하고 터질 때까지 계속 그러고 있고……. 이 짓을 3년이나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시간이 가는 것 같지가 않더라고."

"……저도 막 입학했을 때는 비슷했던 것 같아요."

"그치? 그러다가 이게 일상이 되고, 대회반이다 뭐다 해야 할 일이 점점 많아지니까 오히려 시간은 빨리 가는 거야. 이걸 더 해야 하는데, 저걸 더 해야 하는데 하다 보면 어느새 밤이고, 새벽이고, 아침이고, 내일이지."

"그러다 모레고, 다음 주고, 다음 달이고요?"

"정확해."

역시 통하는 게 있다며 선배는 입꼬리를 샐쭉 끌어올렸다.

"언제 2학년을 끝내고 3학년이 된 건지도 실감이 잘 안 되는데, 눈 깜빡 감았다 뜨니까 졸업이네. 빨리 졸업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막상 졸업하게 되니까 실감이 잘 안 나."

"……."

잘 안다, 그 기분.

나이를 먹을수록 늘어나는 건 주름과 잔머리, 그리고 초침의 속도다.

무엇 하나 급할 거 없던 학창시절 때는 느리게만 흐르던 시간도, 막상 사회에 나가서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느라 잠시 고개를 딴 데로 돌렸다가 다시 보면 어느새 저 멀리 달아나 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 시간을 좇겠다고 달리다 보면, 나 또한 뒤에 많은 걸 남기고 너무 급하게 달려왔다는 걸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뭐, 대한민국 남자는 그러다 한 번쯤 어쩔 수 없이 돌부리에 발이 걸리는 때가 있긴 하지만.

심적인 연장자로서, 이제 곧 사회로 나갈 한석준 선배에게 해주고픈 말이 제법 많긴 하지만 굳이 지금 할 필요는 없겠지.

기회는 아직 있고, 무엇보다 굳이 여러 번 말하지 않아도 잘 해나갈 선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 발돋움을 약간 도와주는 것뿐이다.

"그래서, 졸업하기 싫으세요?"

"아니? 당연히 하고 싶지. 여기 1년만 더 있다간 내 연골이 먼저 나갈 거야. 뭣보다 난 지금 커리어 하이를 찍는 중이란 말이지. 제일 몸값이 높을 때 뭍으로 나가야 누구든 건져주지 않겠어?"

"그럼 졸업하신 뒤에 계획은요? 진학하시게요?"

"응. 마침 불러주는 곳도 있겠다, 기회가 왔으니 잡아야지."

요리사는 학벌과 관계가 없는 거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어느 직업이든 학벌은 그 사람이 가장 먼저 챙길 수 있는 무기 중 하나. 사회는 전쟁터고, 그 중심에서 학벌이란 최선의 무기이자 방패가 된다.

나도 그걸 깨달았기에 무리해가며 해외 유학까지 뛴 거니까. 슬럼가 일보 직전의 거리에서 언제 총성이 들릴지 벌벌 떨어가며 살았던 추억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잘됐네요. 선배는 어딜 가든 잘 해낼 거예요. 다른 선배들도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뭐, 사실 이것도 전부 네 덕분이지만."

"? 제가 왜요?"

"정말 몰라서 물어? 푸드 엑스포 때 말이야. 사실 이번에 추천을 받은 것도 푸드 엑스포 수상 경력 덕분이거든. 네가 없었다면 이런 기회도 없었을 거야."

"그거야 제가 없어도 어떻게든……."

"아니. 너 아니었음 못 했어."

단호하게 내 말 허리를 끊은 한석준 선배가 말을 이었다.

"고마워.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었어. 선생님들은 우리 보고 역대 대회반 중 최고의 세대라고 말씀하지만, 네가 없었다면 최고는커녕 최악의 세대가 됐을지도 몰라."

"……."

"정말, 고마워. 학교에서 보는 건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 3학년 팀장으로서든, 나 개인적으로든."

"……천만에요."

"겸손한 놈일세. 그래도 뭐, 어차피 최고의 세대 같은 말은 1년도 안 갈 것 같긴 하다만."

"?"

"바로 다음 세대에 너나 효민이 같은 녀석이 버티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타이틀 유지를 하겠냐. 그러니까……."

대본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 선배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잘 해. 후배. 우리 같은 건 금방 사람들 머리에서 잊히게끔 말이야."

자긴 연설문이나 마저 외우러 가겠다며 단상 너머로 발걸음을 돌리는 선배를 보며 난 생각했다.

과연, 지금의 내가 봐도 상대를 찾기 힘들 만큼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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