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03화 (203/403)

203. 컨트리 로드.-7-

"오, 오빠! 뭐야 저거?!"

"……."

어……. 글쎄다. 저게 뭘까.

아늑한 한옥 인테리어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느낌의 제법 커다란 TV.

낡은 티가 나는 외관과 넓은 베젤, 최신형에 비하면 두께가 족히 배는 더 두꺼운 물건이다. 구식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느껴본 적 없는 정겨움을 주는 화면 가운데에 떡하니 나온 누군가의 얼굴.

고작해야 5초 남짓 화면에 얼굴을 비췄을 뿐이지만 잘못 볼 리가 없다.

매일 아침 화장실에서 보는 얼굴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나네?"

나다.

틀림없이 내가 맞다.

내가 대체 왜 TV에 나올까…… 같은 생각은 이미 예전 일이다. 뭐 TV에 처음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내 의문은 대체 왜 '지금' 나오느냐는 것이다.

짧은 영상. 예고편이 나온 직후 화면을 대신 차지한 골목 레스토랑의 로고에 의문은 깊어졌다. 분명 새해특집 끝난 다음에 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이러면 새해특집이 끝난 뒤가 아니라 내가 나온 게 새해특집이 될 판인데.

"오빠, 오빠! 저거 오빠 맞지? 그치?"

"이게 어떻게 된 거니, 찬혁아?"

"어……."

잠시 후, 예고편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아와 어머니가 내게 달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골목 레스토랑 촬영했단 건 숨기고 있었나? 아니, 딱히 숨긴 게 아니라 말을 안 했을 뿐이지만.

……솔직히 털어놓자면, 조금 두 사람을 놀라게 해주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긴 했다.

'그런데 이게 스노우볼이 구르네.'

이미 두 사람뿐만 아니라 거실에서 TV를 보던 모든 식구들. 다시 말해 주아를 뺀 연소자 라인을 제외한 일가 어르신 거의 전원의 시선이 내게 모인 상황. 호기심에 물든 여러 쌍의 눈빛이 반짝이다 못해 번뜩이며 내게 꽂힌다.

부담스럽다.

아니, 부담을 넘어 숫제 공포마저 느낀다.

심리적인 공간이 점점 좁아진다. 꼭 낭떠러지에 몰려 대답을 강요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대체 이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아니, 내 감각이 이상해진 걸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대수가 맞긴 하지.

"어. 저거 나야."

"역시! 언제 촬영한 거야? 어디서 찍었어? 박종원은? 박종원은 만나봤어?"

"박종원 선생님이 네 친구냐."

질문을 긍정하기 무섭게 득달같이 달려들어 갖가지 의문을 추가로 쏟아내는 녀석의 내민 얼굴을 검지로 쿡 찍어 되밀었다. 아직 알려주기는 좀 이르니까. 엠바고라는 것도 있고.

주아의 관심은 그 정도로 끊을 수…… 없었다. 에라이, 저 호기심 덩어리를 무슨 수로 이기냐. 일단 잠깐 유예를 만들었을 뿐, 언젠가 풀어주지 않으면 잠도 못 자게 할 기세다.

그리고 그건 다른 친척 어르신들도 마찬가지인 눈치다.

체통을 지키시느라 적극적으로 묻지 못하고 계신 거지, 다들 눈동자 바깥으로 호기심이라는 이름의 샘물이 넘칠 듯 너울거리는 게 훤히 보인다.

……하는 수 없지. 조금 시간을 들여서라도 여기서 풀고 가지 않으면 날 용서하지 않을 분위기다.

다만, 그 전에.

"잠시 전화 좀 하고 올게요."

"응?"

나도 내 궁금증을 푸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

"조기방영이요?"

─예.

거실을 나와 방우석 PD님에게 전화를 걸어 묻자, 그는 내게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원래는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신년 특집 방송 다음 방영할 계획이었는데, 그게 좀 힘들게 됐어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다름이 아니라…….

그의 말을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현재 참가자들은 대부분 영업을 다시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게 조금 논란이 생긴 모양이었다.

─찬혁 씨가 줬던 과제 있잖아요? 참가자 대부분이 지금 포기를 선언한 상태에요.

"……포기요."

─예. 아무리 해봐도 도저히 같은 메뉴를 완성할 수가 없다고, 다들 한 끗 뒤처지는 수준 정도는 됐지만요. 박종원 선생님이 보시기에도 맛 하나만은 처음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하고요.

"그건 다행이네요."

진심이다. 사실 난 그들이 이 과제를 성공할 거라곤 별로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기껏 해봐야 내가 알려준 레시피로 연구하며 자기들 실력을 조금이나마 늘리길 바란 거지.

─저도 동감입니다. 근데 요즘 시청자 게시판에서 그 이야기와 관련해서 조금 불판이 났습니다.

"불판이요?"

─예. 왜 저번보다 맛이 없어졌냐고 불평하는 시청자랑 그렇지 않다는 사람들끼리 살짝 싸움이 났거든요.

말이 살짝이지 서로 대면하고 말했으면 정말 주먹질이 오갔을 거라며 방우석 PD님이 농을 던졌다.

"왜 갑자기 시청자끼리……."

─그게 아무래도, 찬혁 씨가 대리운영 했을 때에 오셨던 분들과 그렇지 않은 분들로 갈라진 것 같아요.

과연. 요컨대 내가 만든 요리를 먹어봤던 시청자와 그렇지 않은 시청자 사이의 싸움이라는 말이었다.

왜 저번보다 맛이 없어졌냐 vs 이 정도면 충분히 맛있는데 뭘 그리 깐깐하게 구느냐

가게 사장님들 입장에서는 난처한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그들도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비교 상대가 좋지 않다. 나는 일단 프로 출신이고, 그들은 아직 일반인 수준에 머무는 사람들이니까.

─덕분에 저희 방송 시청자 사이에서 이번 에피소드에 대한 관심이 이례가 없을 만큼 높아졌습니다. 방영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양측을 가리지 않고 나오고 있어요.

"그래서 조기방영을……."

내가 조기종영은 들어봤어도 조기방영 같은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싶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긴 했구나.

이러면 고작 20초 남짓한 예고편에 내 얼굴이 그토록 길게 나온 이유도 설명이 된다.

지금 싸우고 있다는 시청자 중 절반 정도는 나를 한 번은 본 사람들일 테니까. 궁금증을 북돋아 주기에는 이만한 방법도 없었으리라. 내가 편집장이었어도 기립박수를 칠 아이디어다.

문제가 있다면 내가 편집장도, 편집자도 아니고 영상에 얼굴을 내민 장본인이라는 거지.

이 업계에서 얼굴 팔리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얼굴 팔리는 것만큼 나쁜 일도 몇 없다.

뭐, 득실을 따지면 당연히 득이 훨씬 많긴 하겠지만.

나는 말일까지 이렇게 흔쾌히 내 궁금증을 풀어주신 방우석 PD님께 마지막 인사를 전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전에 잠시.

"PD님. 아까 참가자 중 대부분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아직도 영업 시작 안 한 곳이 있는 건가요?"

─아, 예. 저번에 가장 처음 대리운영 했던 분식집 아시죠? 그 집은 아직도 포기선언을 안 했습니다. 여전히 연구 중인 것 같던데, 박종원 선생님 말씀으론 곧 끝날 것 같다고 하시네요.

"호…….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우상구 사장님. 마음을 단단히 먹었구나.

다른 참가자 가게가 한창 손님을 땡길 때 혼자 운영을 안 하고 있으면 손해가 분명 적지 않을 텐데. 용감하고, 또 현명한 결단을 했다.

첫 손님을 확실하게 잡아야 끝까지 남는 법.

아마 내가 준 레시피를 완성한다면 여태껏 본 손해를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의 이득이 분명 우상구 사장님에게 주어질 것이다.

"자 그럼……."

내 궁금증은 해결됐겠다, 다른 식구들 호기심도 풀어주러 가보자.

─에취!

"야, 류주아. 나와."

저기 방 바깥에서 추위를 견디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못난 동생까지 합쳐서.

"에헤헤, 티났어?"

"통화하는 내내 코를 훌쩍거리는데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추위 탓에 상기된 얼굴로 헤실헤실 웃는 녀석의 코를 한 차례 딱밤으로 튕기며 마주 웃었다.

***

"허어……. 그게 정말이냐?"

"예. 살짝 인지도가 있거든요."

찬혁의 조부인 류상길은 그의 막내 손자가 꺼낸 이야기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아침에 산에서 한 이야기가 허세가 아니었단 말이지?'

돈이야 얼마든 벌 수 있으니 유산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확실한 근거도, 대책도 없는 이야기라 어린 아이 특유의 치기와 허영심, 오만, 자신감이 섞인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만도 않은 이야기였다.

두 번의 이름 높은 국내대회 우승.

세계적인 행사에서의 수상.

그것을 발판 삼아 오른 방송 출연까지.

이미 그의 손자는 국내에서도 충분히 인정을 받는 위치를 제힘으로 쟁취한, 어느 의미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자수성가를 이루어낸 아이였던 것이다.

'아니, 아이 같은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구나.'

이미 아이와 어른 같은 구별 자체에 의미가 없었다.

아침에 들었던 찬혁의 말따마나 자기 자신을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것이 어른이라 한다면, 찬혁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어른이었으니까.

류승길은 그 사실이 대견하면서도, 못내 서글퍼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아이는 이토록 어린 나이에 벌써 스스로 어른이 된 것이다.

나이 따위가 허울에 불과하단 것을 잘 아는 류승길이지만, 시간만 한 스승이 없다는 것 또한 사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남들과는 다른, 그야말로 물과 쇳물처럼 전혀 다른 밀도의 시간을 살아왔으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마음이 들지 않으려야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도 저것도 찬혁이 회귀했다는 것을 누구도 모르는 탓이었다. 남에게 말 해봐야 믿지도 않을 것이고, 믿는다고 해도 오히려 그쪽이 더 귀찮은 일이 벌어질 테니 찬혁으로선 답이 정해진 이지선다였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 사건 이후로 찬혁과 그 가족을 향한 일가의 눈길이 전혀 다른 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먼저 가장을 떠나보낸 가정을 향한 동정심과,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잘 키우고 잘 자란 그들을 향한 대견함이 섞인 시선이었다면, 지금은 역경을 뛰어넘어 성공을 쟁취한 위인이라도 보듯 선망과 동경심이 그들의 눈빛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서? 상하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그게, 원래는 저희도 그냥 관광 겸 푸드 엑스포에 참관하러 간 거였는데 거기서 제 선배들이……."

일도 끝났겠다. 아직은 서먹한 친척들 틈바구니를 빠져나와 혼자만의 휴식시간을 갖고자 했던 찬혁은 어느새 그들 중심에 서서 그들의 무료함을 달래주고 호기심을 채워주는 이야기꾼이 된 지 오래였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찬혁은 못내 그 자리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기회를 계기로 다른 친지들에게 좋게 보여서 하등 나쁠 것이 없었으니까. 설령 그 스스로가 약간의 희생을 감수한다손 쳐도 말이다.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평소 말이 없는 찬혁은 이야기꾼의 재능이 제법 출중한 편이었다.

이건 찬혁이 훨씬 넓은 세계를 탐험하며 쌓은 경험 덕분이기도 했다.

서울시에서 열린 대회에 나갔을 때의 이야기엔 갑작스러운 타 학교 학생의 만행에 일가가 다 함께 분노했고, 상하이에서 겪은 그의 선배들 이야기에는 모두가 헛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 외에도 부산에서 겪었던 사건.

찬혁이 선생의 이야기로 각색한 직접 프랑스나 해외에서 겪은 이야기 등등.

수십 년 평생을 종량제 봉투 채우듯 꽉꽉 눌러 담은 찬혁의 이야기보따리는 밤이 되어도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그야말로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이야. 찬혁이 너는 자서전을 내도 팔리겠다."

"아하하……."

"유럽도 마냥 사람 살기 좋은 곳은 아니구나. 나는 거기 사람들은 다 럭셔리하게 사는 줄 알았어."

"거기도 한국이랑 별로 다를 거 없어요. 사람 사는 곳인데요, 뭐. 과하게 자유분방하고 개인주의가 섞여서 익숙해지기는 좀 힘들겠지만."

그토록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보니 어느덧 시계의 시침이 12시를 한 발 앞둔 시간이 되었다.

20년이라는 나름 기록적인 한 해가 마무리되는 날.

찬혁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아프다는, 태어나 처음 맛보는 감각에 생소해하며 TV스피커로 흐르는 제야의 종소리를 일가와 함께 맞이했다.

바야흐로 2021년의 시작을 알리는, 회귀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새해는 놀랍도록 새로운 일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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