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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02화 (202/403)

202. 컨트리 로드.-6-

"고맙구나."

"예?"

뭐가요? 라고 되물을 틈도 없이, 할아버지께서 뒤이어 말씀하셨다.

"혼자 산에 오르는 게 슬슬 적적해지는 참이었거든."

영하 아래를 찍은 지 오래인 날씨. 땀이 나면 그대로 얼어 버릴 것 같은 바람이 내리 부는 산비탈. 올해에는 아직 눈이 내리지 않은 덕분에 앙상한 나뭇가지와 낙엽만 가득한 산의 풍경이 황량하다.

'이런 풍경도 나쁘지는 않지만…….'

확실히, 계속 보고 있기에는 쓸쓸한 풍경이긴 하다.

…… 그렇다고 내가 동행자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닌데 말이야.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스스로에게 질문해도 변변찮은 대답이 돌아오진 않는다. 뭐, 그냥 우연이지. 우연.

아침 산행이 취미이신 할아버지.

아침 운동이 일과인 나.

우연찮게 비슷한 시간에 활동하다 보니 이렇게 됐을 뿐이다.

할아버지의 제안을 면전에서 거절하기도 좀 그랬고, 어차피 나온 거 아무래도 괜찮겠지 싶어 동행하게 된 것.

"매일 이렇게 산을 타시는 거예요?"

"이 시골에서 할 게 뭐가 있겠니. 아침에는 산 타고, 점심에는 밭 좀 보고, 저녁에는 신문이나 TV라도 보면 하루가 훌쩍 가지. 덕분에 몸만 튼튼해져."

"몸이 건강해지면 좋죠. 건강이 곧 자산이라잖아요."

"맞는 말이구나."

할아버지 댁 근처의 뒷산을 올라가는 내내 그렇게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철이 든 뒤로…… 라기 보단, 회귀 후 처음 뵙는 할아버지가 어색한 탓도 있겠지만,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두 사람 다 그렇게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시간보다는 풍경을 보는 시간이 긴 등산길.

그렇게 가파르지도 않고 등산로도 잘 닦여서 걸으며 구경하기 좋은 산이긴 했지만, 이래서야 동행한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등산을 시작한 지 30분 정도 지났을까, 나는 정상 부근에 거의 다다랐다는 것을 눈치챘다. 우리 두 사람의 걷는 속도가 빠른 덕이기도 했지만 산 자체가 그리 높은 산은 아닌 것 같다.

'하긴, 아래서 봐도 그리 높아 보이진 않았지.'

해봤자 집 뒷산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나 정작 정상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다른 의미로 살짝 놀라고 말았다.

"…… 엥?"

앞서 올라가시는 할아버지를 따라 발을 내디딘 산 정상.

그 얼마 안 되는 평지 중심에 우뚝 선 오두막이, 내 시선을 단숨에 앗아갔으니까.

"…… 이건 또 무슨……."

"어떠냐. 제법 괜찮지?"

지어진 지 제법 시간이 흐른 듯 여기저기 먼지가 잔뜩 쌓인 오두막이라고 부르기에도 살짝 난감한 가설건물. 그래도 작은 창문이 달린 페인트칠 된 벽돌로 쌓인 벽이나 슬레이트 지붕이 제법 그럴듯하다. 성인 남자 대여섯 명 정도는 거뜬히 들어갈 수 있을 듯 보인다.

하지만 이런 게 왜 뒷산에 있는 걸까. 동네 뒷산에 운동기구 같은 게 몇 개 설치된 건 봤어도 오두막이 지어진 건 처음 보는데. 설마 할아버지가 지으신 건가? 아무리 그래도 산 정상인데?

"이걸 혼자서 지으셨어요?"

"꽤 옛날에 다 같이 지은 비밀기지다."

다 같이?

"네 큰 아빠들 말이다. 상일이, 상준이 녀석이 어릴 때 같이 지은 곳이야."

그래, 딱 네 나이쯤 됐었을 때였겠구나. 어딘가 아련한 시선을 내게 향하신 할아버지가, 그 오두막의 문을 열고는 내게 손짓하셨다.

"들어오려무나. 잠깐 쉴 겸 말동무 좀 되어다오."

***

할아버지를 따라 들어온 오두막 안은 생각보다 꽤 깔끔했다. 살짝 먼지가 날리긴 해도 산 특유의 풀냄새, 흙냄새가 섞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정상인만큼 제법 강하게 부는 바람도 튼튼하게 지어진 벽이 잘 막아주어 제법 따뜻한 느낌까지 든다. 수십 년은 된 곳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관리가 잘 되어있네요."

"당연하지. 집안 남자들끼리 네 할머니 몰래 짓는다고 고생한 곳인데 쉽게 무너지면 쓰나."

"근데 산에 이런 거 지어도 괜찮은 거예요?"

"어차피 산이 내 건데. 뭘 짓든 뭐라 할 사람이 어딨겠니."

아, 할아버지가 소유한 산이었어? 그럼 인정이지.

"그나저나 꽤 일찍 일어나는구나."

"아침에 운동하는 습관이 배서요. 어제 꽤 일찍 자서 그런지 오늘은 특히 좀 일찍 일어났고요."

"그래. 좋은 습관을 들였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으시는 할아버지. 내가 당신께서 가진 것과 같은 습관을 가졌다는 것이 내심 마음에 드신 듯하다.

"그러고 보니 나올 때 부엌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혹시 그것도 너냐?"

"네. 아침 식사 준비를 미리 좀 해두고 있었어요."

"허어, 어제도 그렇고 시키지도 않은 걸…… 덕분에 잘 먹긴 했다마는."

"할머니 혼자서 하기엔 식구가 너무 많으니까요. 제가 잘 하는 게 요리뿐인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신경 써줘서 고맙구나."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이지만 작은 흡족함이 서린 말투에 나도 웃음으로 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뜬금없는 화제를 던지신다.

"찬혁아. 혹시 유산이 갖고 싶은 게냐?"

"예?"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다만, 환심을 사려는 게 이 할아비 눈에도 훤히 보이더구나."

"그건……."

"너도 이럴 때에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나서서 해가며 예쁨 받으려 노력하는 이유가 있겠지. 나는 유산 말고 그 이유가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미정이가 그리 하라 시키든?"

"아뇨. 그건 아니에요. 절대로."

환심을 사려 애쓰고 있다. 할아버지의 말씀이 찔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내가 행동한 건 어디까지나 내 선택이었다. 유산을 위해서도 아니고, 어머니가 시켜서는 더더욱 아니다.

"전부 네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궁금하구나. 왜 그런 행동을 한 건지."

"예쁨 받으려고 했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게 유산 때문은 아니었어요."

"말로는 누구나 그럴 수 있지."

"정말이에요. 사실, 유산에는 별 관심 없어요.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그리 대단히 남겨줄 게 있는 건 아니라고."

뭐, 우리한테 넘어올 몫이 수억 단위로 넘어간다거나 하면 상당히 구미가 당길지도 모르지만 내가 봤을 때 아마 유산을 다 합쳐도 그 정도 규모는 절대 못 된다.

"관심이 없다고?"

"예."

"아직 어려서 돈의 힘을 잘 모르는 것 같단 생각이 드는구나."

"아뇨. 알고 있어요. 돈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

이건 굳이 회귀 전의 이야기를 끌고 오지 않아도 충분하다.

돈이란 곧 21세기의 신분이다. 없으면 천대받고, 있으면 그 자체로 권력이 된다. 난 그 사실을 중학생 때 간 경찰서에서 뼈저리게 느꼈었다.

"돈이 없단 이유로 이래저래 고생도 꽤 해봤어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직접 돈을 벌기도 했고요."

조금 쓸 곳이 있어서 그때 벌었던 건 그렇게 많이 모으진 못했지만 말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무지한 건 아니에요. 분명 저희가 유산을 많이 분배 받게 된다면 큰 힘이 되겠죠."

"그걸 알면서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게냐?"

"예. 왜냐면, 액수가 정해진 돈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요."

자, 여기 천만 원이 있다. 이것을 가지려면 힘들진 않더라도 꽤 많은 귀찮음을 무릅쓰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누군가에게 있어 이 천만 원은 아주 큰돈일지도 모른다. 일 년 내내 벌어도 벌기 힘든 돈일 수도 있고, 연봉의 반에 달하는 돈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라면 아무리 귀찮은 일을 겪든 꼭 갖고 싶겠지.

하지만 또 누군가에게 있어선 그 정도 금액의 돈은 그런 귀찮음을 무릅쓸 가치가 없는 돈이다.

그런 일로 귀찮은 일에 시간을 허비할 바에야 다른 일에 그 시간을 투자하여 더더욱 큰 이득을 이끌어낼 능력을 가졌다면, 아마 그 사람은 굳이 그 돈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 있어 유산이란 바로 그 천만 원이다. 유산의 액수가 더 될 수도 있다. 아마 몇 배가 더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굳이 그걸 얻겠다고 고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왜냐면, 난 언제든 그 정도 돈은 벌 수 있단 걸 '알고' 있으니까. 이건 예상이 아니다. 확신이다.

이미 이제까지 쌓은 커리어는 국내 식당이라면 어디든 당당하게 입사지원서를 낼 수 있을 정도고,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껏 상금 등을 통해 번 돈을 회귀 전에 알게 된 주식에 전부 꼴아 박고 큰 수익을 노릴 수도 있다.

애당초 이제 나에게 있어 돈이란 건 크게 욕심나는 분야가 아니다. 수전노 같이 굴던 건 그냥 어릴 적부터 배인 습관일 뿐이지.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을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언제든 가질 수 있는 것에 애써 연연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내게 중요한 건 돈 이외의 무언가다. 예를 들면 가족, 예를 들면 친구, 예를 들면 스승.

예를 들면 꿈. 최고의 셰프가 되겠다는 꿈. 그것은 돈으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나의 지상과제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언제든 충분한 돈을 벌 수 있다고 자신하는 나를 보며 할아버지는 어이가 없단 표정을 지으신다.

"그게 이유라고?"

지금 자기보고 그걸 믿으라는 거냐는 듯 눈꼬리를 올리시는 할아버지를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거릴 수밖에 없었다.

허황된 소리로 들린다는 건 이해 한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애송이가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들릴 테니까. 하지만 사실이다.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기엔 뭐하지만, 난 이래 봬도 이 나이에 벌써 내 전공으로 공중파 방송까지 출현한 난 놈이니까.

"그럼 그렇게 잘난 네가 왜 그리 예쁨 받겠다고 애를 쓴 게야?"

"그건……."

할아버지께서 보내시는 의아한 눈빛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부끄럽긴 해도 숨길 일은 아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그런 거였어요. 넓게 보면 우리 가족 전부를 위한 거였지만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저희 가족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할아버지한테 특히 도움을 많이 받았잖아요. 저도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사업 뒷정리에 할아버지가 되게 힘을 많이 써주셨다는 거랑, 그 탓에 고생하신 것도요. 큰아버지나 고모들도 그 일로 저희한테 안 좋은 감정이 쌓이셨을 텐데, 제가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하면 어머니한테 화살이 향했을 거예요. 그러지 않았으면 했거든요."

"……."

"어쩔 수 없는 사건 탓에 일어난 일로 타박하실 분들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저희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으니까요."

"…… 그렇, 구나."

내 말이 끝난 뒤, 나와 할아버지 사이에는 긴 시간 침묵이 흘렀다.

오두막 안에 있던 플라스틱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은 지 십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가만히 창밖을 살피시던 할아버지께서 앞서 말을 꺼내셨다.

"찬혁아."

"네."

"너무…… 어른 행세는 하지 않아도 된다. 애한테는 일러."

"…… 그렇죠."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그치만 어른이 돼야 했어요. 전 장남이고, 집에 한 명뿐인 남자니까. 가족을 책임질 수 있는 건 어른뿐이잖아요."

"…… 다 상준이 녀석이 먼저 간 탓이지. 못난 놈 같으니."

탄식 섞인 한숨을 길게 내뱉은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놈. 그래도 자식 하나는 똑 부러지는 걸 남기고 갔구나. 지를 꼭 닮았어."

"닮았나요?"

아버지와의 추억이 없는 나로선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렴. 닮았지. 그 녀석은 집안사람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었으니까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말썽을 부리는 개구쟁이였지만, 막상 할 때는 가장 야무진 놈이었어. 그야말로 두 얼굴의 사나이였지. 네 할머니하고 난 매번 그놈한테 끌려다니기만 했단다."

"……."

"상일이 앞에서는 못 할 말이다만, 제 형보다 난 놈이었어. 난 그 녀석이 분명 크게 되리라 믿었다. 헌데……."

할아버지는 잠시 말을 잊으신 듯, 두 눈을 꾹 감고 굳게 입을 다무셨다. 무어라 위로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불효막심한 녀석이, 제 뜻도 제대로 펼쳐보기 전에 가족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떴으니 얼마나 원통했을까. 그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깼지. 그런데……."

"?"

"찬혁아. 널 보니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드는구나."

"…… 절요?"

"상준이 놈도 널 본다면 분명……."

할아버지께선 하던 말을 멈추시고 가만히 날 바라보셨다. 피하지 않고 그 눈을 마주 보니, 이내 피식 웃으신다. 두 번째로 보는 웃음이었다.

"됐다. 이만 내려가자꾸나. 더 있으면 몸 식겠다."

"아, 네."

할아버지께선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으셨던 걸까.

중간에 끊긴 말이 신경 쓰였지만, 앞서 산을 내려가시는 할아버지의 발걸음은 어딘가 올라올 때보다 한결 가벼워진 듯 보였다.

***

할아버지 댁으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마친 후, 나는 어머니와 따로 독대하여 내 뜻을 전달했다.

우리는 유산을 포기하자고. 당장에는 큰돈이겠지만, 나는 미래에 틀림없이 그런 돈은 '따위'로 보일 만큼 성공할 수 있다고.

우리 친척은 다들 미래에 어떤 일로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인맥이 될 수 있다. 유산을 포기함으로서 그런 인맥을 보전하는 게 우리에게는 돈보다 더 큰 자산이 되리라고 말이다.

어머니는 내가 갑자기 이렇게 나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신 듯했지만, 내 뜻에는 찬성을 표하셨다.

그건 분명 내가 어머니에게 그만한 신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저녁 시간이 되기 전에 모인 일가 앞에서 우리는 유산을 받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아버지의 일, 그리고 그 후에 남은 우리를 위해 할아버지께선 이미 많은 자산과 수고를 베푸셨다는 이유였다.

"제수씨 뜻이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정말로 괜찮겠어요?"

"다시 생각해봐 올케. 안 그래도 돼."

"맞아.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가 모르는 것도 아닌데."

"괜찮아요. 이미 큰애가 충분히 한 사람 몫 이상을 해주고 있거든요."

"아무리 철이 들었어도 애는 애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봐요."

다들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설이던 찰나, 그 상황을 할아버지가 나서서 정리하셨다.

"됐다. 본인들 뜻이 그러하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다만,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와도 좋으니 너무 너희끼리만 끌어안고 있진 마라."

"…… 예, 아버님."

20년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날. 가계의 유산에 대한 이야기는 별 탈 없이 끝을 맺었다.

'역시 아주 없거나 너무 부자인 것보단 적당히 있는 게 나은 건가.'하는 감상이 머리를 스쳤다. 안 그랬으면 진흙탕 싸움이 됐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상의가 끝난 뒤의 저녁. 이번에도 솜씨를 발휘해 저녁을 만들었다.

다행히 여태껏 했던 식사 시간과는 달리 이번에는 제법 활기가 넘치는 자리가 됐다.

무거운 이야기가 확실히 끝을 맺은 덕분이겠지. 적어도 겉으로나마 웃음과 덕담이 오가는 자리는 후식을 먹을 때까지 이어졌다.

나도 고생을 좀 하긴 했어도 충분히 득을 봤다.

그런데, 여기서 사건이 하나 일어난다.

설거지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와 장판에 몸을 지지며 노곤함에 빠져 있던 그때, 갑자기 거실에서 어머니 옆에 붙어 TV를 보던 주아 녀석이 문을 박차며 들어온 것이다.

"오, 오빠! 오빠!!"

"무, 뭐야? 깜짝 놀랐네."

"저, 저, 저기, 저기……!"

"아니, 뭐 어디 불났어? 말을 못 해."

숨까지 헐떡이며 안색이 시퍼렇게 된 주아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이 달려온 거실 방향을 가리키며 외쳤다.

"T, T, TV!"

"그게 왜. 터지기라도 했냐?"

"오빠! TV!"

…… 뭐지? 하도 도롱이 벌레처럼 살더니 드디어 언어능력까지 상실해 버린 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스스로가 본인도 답답했는지, 녀석은 드디어 내 팔을 잡아끌며 나를 거실로 연행해갔다.

"아니 대체 무슨……?"

내가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거실에 모여 있던 식구의 시선이 죄다 내게로 꽂혔다. 잠깐이지만 쫄았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야.

좀처럼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 혼란해하며 그들이 보던 TV에 시선을 향한 순간, 나는 약간이나마 주아나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됐다.

─다음 주! 새해 특집! 재야의 고수가 골목을 찾아온다? 올 겨울 인터넷을 달군 숨은 맛집의 정체를 밝힌다! 다음 주도, 채널 고정!

거하게 들뜬 목소리의 나레이션의 외침이 들려오는 TV 화면 속. 그 중심에, 아주 잠깐 나온 거긴 하지만. 저건 분명……?

"…… 뭐야?"

내가 왜 거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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