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컨트리 로드.-5-
'유산?'
예상치 못했던 단어에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아니, 할아버지 연세를 생각하면 아주 나오지 못할 것도 없는 말이긴 하지.'
다만 내가 놀란 이유는, 할아버지의 유산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은 게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를 회귀 후 처음 만난 건데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더 놀란 거다.
왜냐면, 나는 회귀하기 전에도 어머니나 친척들 입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으니까.
'이런 일이 원래 있었나?'
자그마치 유산이다. 할아버지도 꽤 오랜 고민 끝에 결정하시고 일가를 불러 모으셨을 터.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길 일이 아니란 걸 생각하면 분명 회귀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런데 난 듣지 못했어. 그렇다는 건…….'
어딘가에서 정보의 차단이 있었다는 걸까.
그렇다면 그 범인은 친척이 제일 유력하지만…….
'뭔가 이상한데.'
아무리 기를 쓰고 감춰봤자 유산이 분배된다는 사실을 누군가한테 숨겨야 할 만큼 유산쟁탈이 격화된다면 친척 사이의 불화를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회귀 전에 만났던 그분들은 딱히 서로 악감정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아버지,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빠. 무슨 일 있었어? 혹시 병원에서 무슨 이야기라도 들은 거야?"
이런 무거운 이야기에 함부로 참견할 수 없는 나를 비롯한 손주 라인이나 고모부들 대신 큰아버지와 고모들이 끼어든다.
격정적인 말투라기보다는, 걱정스런 어조. 유산 보다는 그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훨씬 중요하단 태도였다.
가식…… 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나도 나름 사회물을 먹었던 놈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연기를 하려 해도 저도 모르게 본심이 섞이는 법이다. 적어도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솔직히 좀 신기하다. 아무리 의좋은 형제라 한들 돈이란 마물 앞에서는 그 관계가 쉬이 흔들리는 법인데. 그런 게 보이지 않는다는 건 드문 경우다.
내심 얼굴을 들이미는 호기심을 속으로 감추고 있자니, 할아버지께서 큰아버지와 고모들의 말을 끊으며 말씀하신다.
"됐다, 이놈들아. 내 나이가 곧 여든인데 슬슬 준비는 해둬야 하지 않겠냐."
"아버지, 그래도……!"
"됐대도. 내 몸은 내가 알아. 당장 드러눕진 않아도 결국 갈 사람은 가는 법이야."
반박하려 드는 큰아버지의 심란한 표정을 되밀며 할아버지는 큰아버지 앞으로 서류철 하나를 내려놓으셨다.
"이건……."
"아는 친구 도움 받아서 뽑은 재산명부다. 이 집하고 주변 땅. 그리고 남은 재산의 반은 네 어머니 몫이야. 나머지는 너희가 알아서 상의하고 나눠."
"아버지, 그러니까 이런 거 꼭 지금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하라면 해 둬. 아직 내 몸 멀쩡할 때."
인상을 찌푸린 큰아버지와 그걸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바라보시는 할아버지.
체감적인 시간으로는 배는 되는 것처럼 느껴졌던 짧은 눈싸움 뒤, 하는 수 없다는 듯 큰아버지가 서류철을 집으셨다.
"알겠지만, 너희 뒷바라지한다고 남은 것도 별로 없다. 너네 다 잘 사는 거 아니까 욕심 부리지 말고 적당히 나눠 먹어.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까지 돈 때문에 쌈박질하는 거 못 두고 본다. 괜히 지금 하란 거 아니다."
"…… 알겠어요."
"상일이랑, 상화, 상희. 그리고……."
말을 끊고 우리 사이를 훑던 할아버지의 시선이 우리 가족이 모인 쪽을 향했다.
"미정이. 넷이서 잘 이야기하고, 내일 다시 모이자."
그것을 끝으로 할아버지는 자리를 파하셨다.
그 가운데, 피를 나눈 형제들 사이로 끼게 된 어머니는 그저 당황스런 눈빛을 감추지 못하신 채 앉아계실 뿐이었다.
***
"…… 오빠. 괜찮겠지?"
"뭐가."
"엄마 말이야."
할아버지께서 자리를 파하신 뒤, 큰아버지와 고모들, 그리고 어머니를 제외한 일가는 서로의 방으로 돌아가게 됐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유산분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다.
나와 함께 방으로 돌아온 주아는 그것이 못내 걱정스러운지 방으로 돌아온 뒤 여태껏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걱정 마. 괜찮겠지."
"그래도. 왜, 드라마 같은 거 보면 맨날 이런 걸로 싸우고 그러잖아."
"그건 드라마고."
사실 드라마 쪽이 훨씬 순화된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굳이 그걸 지적할 필요는 없겠지.
"됐으니까 그냥 조용히 있어. 어린애가 벌써 그런 거 걱정하는 거 아니야."
"치, 지도 애면서."
"중학생 주제에 고등학생 오빠한테 막말을 던지네."
"그럼 고등학생은 뭐 성인인가."
"청소년이지. 너는 소년이고."
"아, 예. 그렇게 대단하셔서 내 나이 때 경찰 신세를 지셨구나."
거 해도 하필 부끄러운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어.
살짝 위로 올라온 주먹이 '한 발이면 돼. 부탁한다, 제발 한 발만 쏘게 해줘!'라며 핵꿀밤을 장전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내 마음을 잠식한다. 사람이 늙었나. 벌써 환청이 다 들리네.
"아무튼 그냥 걱정 말고 쉬고 있어."
언뜻 볼 땐 가녀리게만 보이는 어머니지만, 나는 안다. 어머니는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는 걸.
그렇지 않다면 우리 남매가 이토록 장성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야 그 사이에 끼어 대화를 나누는 건 분명 힘든 일이겠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큰아버지나 고모들은 그렇게 유산에 목숨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으니까. 설령 우리에게 돌아올 유산이 적어질지언정 싸움판이 열리지는 않으리라.
희망사항이긴 해도, 이번엔 내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니, 지금은 믿고 내 할 일을 하자.
"응? 오빠 어디 가?"
"부엌."
"부엌은 또 왜?"
호감도 작…… 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러 간다.
"곧 저녁이잖아. 밥 해야지."
또 할머니 혼자 준비하고 계실 거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곤 전부 한 곳에 묶여 있으니까 말이야.
"아, 그럼 나도 도와줄까?"
"됐어. 너 똥손이잖아. 이상하게 너는 라면을 끓여도 맛이 없더라."
가정적인 거에 쓸 재능을 죄다 그림 쪽에 때려 박기라도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솜씨에 기겁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내 지적에 길길이 날뛰는 주아에게 강한 부정은 곧 강한 긍정이란 금언을 남긴 나는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
할머니를 도와 저녁을 만들고 일가에게 대접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렇게 폭발적인 호응은 얻을 수 없었다.
음식이 점심 때보다 어설펐던 건 아니다. 양을 살짝 더 적게 조정하긴 했어도 그만큼 질에 공을 들여서 만들었으니까.
다만, 순수하게 음식을 즐기기엔 집의 분위기가 좀 무거웠던 거겠지.
아무리 가볍게 받아들이려고 한들 유산이란 건 분명 무겁지 않을 수 없는 소재니까.
살짝 찜찜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식사는 조용히 마무리 됐다. 점심과 같았던 건 깔끔하게 사라진 접시의 내용물 정도가 전부였다.
"엄마, 괜찮아?"
"응? 어, 응. 물론 괜찮지."
"누가 보면 무슨 해코지라도 한 줄 알겠다. 걱정 말라고 했잖아."
"으음……."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것과는 별개로, 어머니는 앞서 큰아버지 일동과 나눈 대화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신 듯했다.
"내일 할아버지랑 다시 얘기하기로 했으니까, 그때 말해줄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고 있으렴. 아들도. 오늘 고생 많았어. 엄마가 너무 고마워."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뭐."
"한 게 없긴. 아주 많은 걸 해줬잖니."
내 덕에 고모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들었다며 어머니는 좋아하셨다. 그야, 그건 나도 좋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나보다는 어머니 쪽이.
그러나 결국 유산 문제에 대해선 어영부영 끝나고 말았다. 사실 이제 와서 유산 같은 건 관심 없지만. 어차피 유산 같은 거 없어도 나름 잘 먹고 잘 살았었고.
'그래도 궁금하긴 하네.'
아직 알아내지 못한 게 몇 가지 있다.
내가 유산의 존재를 몰랐던 건 누군가 유산의 존재를 감추었기 때문에.
하지만 방금 그 분위기를 보면 굳이 그걸 감추려들 사람은 없어 보였다.
회귀 전과 회귀 후인 지금. 내가 모르는 부분에서 변화가 생겼다. 아마 이건 올해 할아버지 댁에 올 수 있게 된 덕분인 것 같긴 한데…….
"모르겠다."
어차피 이미 바뀐 거,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나도 유산에 대해 내 나름대로 생각한 부분은 있다. 아마 우리 가정에 있어서 최선책이 될지도 모르는 방법이 말이다.
그저 멍하니 머리를 굴리며,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셋이 다함께 모인 이부자리 위에서 잠이 들었다.
***
12월 말일. 20년의 마지막 날.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녘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눈을 떴다.
나는 잠이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다. 정말 무리를 한 뒤라면 모를까 평소에는 네다섯 시간만 적당히 자도 크게 피곤함을 느끼진 않는다.
어제 한 일이라고 해봐야 고작 일가족 식사 준비가 전부. 점심 저녁을 합쳐 30인분 남짓 정도로는 아무것도 안 한 거나 크게 다를 거 없다. 오늘도 평상운전이다.
평소의 아침 루틴대로, 적당히 옷을 챙겨 입고 일어나 아침 운동에 나선다. 학교에서도 아침 조깅 정도는 항상 뛰는 편이다. 고향 집에 왔을 때 정도는 쉬는 게 어떤가 싶긴 해도 그런 하루의 게으름이 운동의 가장 큰 적이니까. 다만…….
'오늘은 파트너가 없어서 좀 쓸쓸하겠네.'
문득 한 달째 연락도 없는 멀대 헬스 파트너가 그립다. 그 녀석은 키도 나보다 큰 주제에 비율도 좋아서 페이스에 맞추려면 꽤 힘들긴 했지만 운동이란 게 힘들어야 제 맛 아닌가.
나중에 들어오면 신년인사라도 돌려볼까 하는 생각과 함께 방을 나서다, 문득 주방 안쪽에서 보인 빛줄기에 시선이 갔다. 누군가 있는 건가 싶어 발을 옮겨 주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살짝 불어오는 훈훈한 공기. 그제야 난 빛줄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았다.
"아."
온돌을 데우려 피워둔 아궁이 속 장작불의 잔불이 공기 유입을 조절하기 위해 가려둔 벽돌 사이로 빛을 뿜고 있던 것이다. 과연, 문이 살짝 열려 있던 건 부엌에 연기가 차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구나.
그걸 보고 그냥 나가려다가, 기왕 온 거 그냥 가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해 뜨려면 조금 기다리긴 해야 하니……."
겨울의 아침은 늦게 찾아온다. 뛰기 좋을 만큼 날이 밝아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 시간을 무료하게 기다릴 바에야 아침 준비라도 미리 조금 해두는 게 낫겠지.
항아리에서 쌀을 꺼내 씻은 뒤 물에 불려두고, 냉장고 속에서 이런저런 재료를 꺼내 적당히 메뉴를 선별한다.
"보자……."
아침 메뉴는 소불고기에 쌈채소, 가지볶음, 감자전, 두부김치, 된장국 정도로 해두면 되려나.
감자는 껍질을 까서 물에 담가 갈변을 막는 겸 전분이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두고, 마침 있던 바지락을 소금물에 넣어 해감한다. 채소는 먹기 직전에 씻으면 되니 손질만 적당히. 장독대에서 김치를 꺼내 아궁이 근처에 두고 살짝 온기를 머금게 해주면 볶을 때도 빨리 속까지 익어 편하다.
"마지막으로 쇠고기를 양념에 재워주면……."
음. 이걸로 준비 끝. 시침도 이제야 막 6시를 가리키기 시작한 참이니, 적당히 한 시간 정도 조깅을 뛰고 돌아온 다음 씻고 준비하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다.
준비도 다 끝냈겠다. 그럼 슬슬 뛰어볼까.라고, 대문을 열고 나온 그때, 나는 뜻밖의 인물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어, 할아버지?"
"음? 찬혁이냐?"
제법 단단한 차림으로 기능적인 모양의 지팡이까지 챙긴 할아버지가, 대문 앞에서 체조로 몸을 풀고 계셨던 것이다.
문을 연 상태로 굳은 나와 기지개를 핀 채 정지한 할아버지.
몇 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내 천천히 자세를 푼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나를 보며 영문 모를 말씀을 꺼내셨다.
"산. 가지 않겠느냐?"
"…… 예?"
아, 아침산행 트라우마 에반데.